“미투 나섰다가 결국 문화계 떠나는 걸 볼 때 가슴 아파요”

2019.04.24 06:00 입력 2019.04.24 17:30 수정

문화예술계 사람들에게 들어본 ‘이윤택 이후 14개월’

“미투 나섰다가 결국 문화계 떠나는 걸 볼 때 가슴 아파요”

■ 미투에 나선 문화예술계 성폭력 피해자가 지난 1년간 들은 말

작업 계속하려면 참고 넘어가라

미투보다 작업이 더 중요하다

그 작가 망치려고 하느냐

왜 이제 와서 얘기해

그만해라

미투로 인지도 높이려고 한다

지겹다


14개월 전 이윤택 전 예술감독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미투’(나도 고발한다)가 터져나온 이후 연극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 권위자들이 줄줄이 법과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다. 이 전 예술감독은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은 데 이어 최근 항소심에서는 ‘업무상 위력 추행’까지 인정돼 형량이 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이 전 예술감독처럼 형사처벌까지 받게 된 경우는 드물다. 특히 미투로부터 1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변화를 체감하기에는 이르다고 예술인들은 말한다. 소수의 권위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구조가 여전하고, 불안정한 창작 환경 역시 개선되지 않고 있어 성폭력 사실을 고백하기 어렵게 만든다.

경향신문은 이윤택 항소심 선고 이후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을 인터뷰해 지난 1년여를 되짚어봤다. 문화예술인들은 성폭력을 뿌리 뽑기 위해 여전히 분투하고 있었다.

■ 떠나는 피해자, 괴롭히는 가해자

용기 낸 ‘미투’ 이어지지만
이윤택처럼 형사처벌 희박
소수에 권력 집중된 구조
눈 밖에 난 순간 일감 ‘뚝’
되레 피해자가 업계 떠나

“피해자가 결국 이 업계를 떠나는 걸 볼 때 마음이 아파요.” 부산의 한 예술인 ㄱ씨는 지난 1년여 동안 성폭력 피해 사례를 모으고 피해자를 지원하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이렇게 꼽았다. ㄱ씨는 “미투에 나선 피해자는 ‘그 작가(가해자)를 망치려고 하느냐’ ‘왜 이제 와서 이야기하느냐’ ‘작업 계속하려면 참고 넘어가라’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냐’ 같은 말을 수시로 듣는다”며 “어렵게 용기를 냈던 피해자가 이런 비난 때문에 떠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ㄴ씨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피해자를 지지한 이후 동료들로부터 “네가 위드유(with you) 중이라고 해서 다들 섭섭해하고 있다” “네가 그래서 되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ㄴ씨에게 “너도 위드유 중이냐”고 물었던 사람 중에는 ㄴ씨의 가해자도 있었다. ㄴ씨는 이후 일자리를 옮겼지만, 그 후에도 가까웠던 동료가 자신과 친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연락을 끊기도 했다.

ㄴ씨는 “가해자 쪽에선 초반에 일을 최대한 키우지 않기 위해 중간에 낀 사람들을 모아 여론을 형성하려고 엄청 애썼다”며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심한 말이 오가는 건 예사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미투에 나섰던 ㄷ씨는 최근까지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가해자 측은 ㄷ씨 지인들까지 괴롭혔다. “ㄷ을 편들 거면 네 경력도 지우라”는 식의 회유였다. ㄷ씨는 “나를 강력하게 지지해줬던 한 친구는 정신적 고충을 토로할 정도였다”면서 “결국 몇몇 친구들에게는 SNS도 지우라고 권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기회’를 가장한 착취도 여전

가해자의 주변인들이 이렇게까지 가해자 옹호에 열성인 이유는 문화예술계의 실력자인 ‘선생님’의 한마디, ‘선생님의 사랑’이 여전히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던 이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분야에서 제왕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해자가 쥔 권력은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북 전주에서 활동하는 ㄹ씨는 “지난해 미투에서 지역 모 협회 부회장이 가해자로 지목됐다. 그는 피해자가 속한 단체가 협회에 정식 등록하지 못하도록 힘을 행사하고 단체를 제명하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전했다. 가해자는 시장 등 지역 내 인맥이 강하다. 가해자는 최근에 피해자의 업무와 관련이 깊은 한 문화사업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ㄹ씨는 “피해자는 가해자가 다시 현장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을 느끼는데, 가해자는 처벌은커녕 공적으로 면죄부를 받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투 이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가해자의 눈 밖에 났다간 오디션 기회가 사라지고, 일감을 뺏기기 일쑤다. 과거 ㄷ씨는 한 배우가 ‘선생님’의 성적인 접근을 거부한 이후 오디션 볼 기회를 면전에서 박탈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만큼 ‘선생님’의 권한은 무한하다. ㄷ씨는 “부당한 것에 대한 거부를 가해자들은 배신으로 여긴다. 아예 무시하거나 못 본 사람 취급하기 때문에 한번 찍히면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분위기는 여전하다”고 전했다.

계약서 쓰기 어려운 환경
“성폭력 방지 조항 넣자”
대책 탁상공론 그치기도

이 같은 폐쇄적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작업계약서에 성폭력 방지 조항을 넣자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성폭력 방지 조항은커녕 예술인들이 제작자에게 계약서 작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연극인 ㅁ씨는 “계약서를 쓰는 작업 자체가 손에 꼽고, 쓴다고 해도 눈속임을 위한 약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할 기회를 아예 잃게 될까봐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 지방 예술인의 더 힘든 싸움

지방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교수, 대표 등 업계 권위자인 가해자들이 지방자치단체나 각종 행사를 주관하는 공공기관, 재단과 네트워크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 선배가 업계 선배가 되고, 한번 맺어진 사제관계가 졸업 후에도 이어진다. 예술활동 범위가 서울에 비해 좁은 탓에 학연·혈연이 한층 공고하다.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하기도 힘들지만, 문제제기가 지속되기는 더욱 힘든 구조다.

부산의 경우 지난해 운영되던 문화예술계 성폭력 전담 시설이 예산 문제로 4개월 만에 사라졌다. 후속 조치에 대한 논의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ㄱ씨는 “현재 시 차원에는 지속적인 실태조사, 가해자가 참여하는 사업 배제, 예방 교육 인프라 등 체계적인 성폭력 예방 시스템이 없다”며 “예술인 개개인의 헌신과 역량만으로는 문제를 개선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역 여성단체와 예술인의 적극적인 연대로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이어졌지만, 예술계 행정조직이나 지자체를 보면 아직도 변화가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현장과 행정 간 괴리가 그만큼 크다”고 덧붙였다.

ㄹ씨는 “지역에선 정부·지자체나 문화재단의 보조금으로 활동하는 단체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여러 단체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된다”며 “문화예술인들끼리 연대해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에선 ㄹ씨가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방지 대책을 위한 간담회조차 열리지 않았다. ㄹ씨는 “미투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디로 가서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예술가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미투 나섰다가 결국 문화계 떠나는 걸 볼 때 가슴 아파요”

■ 도전 앞둔 문화예술계

그럼에도 포기 않고 ‘미투’
“용기 모이면 세상은 변해”
연극계는 ‘인권 규약’ 준비

힘든 상황 속에서도 문화예술계의 성폭력 반대 활동은 이어지고 있다. 연극인들은 지난 1년여간 관객들로부터 가장 큰 힘을 받았다고 말한다. ㄷ씨는 “결국은 관객이 있어야 작품이 완성된다는 교과서의 내용을 관객이 완성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ㄴ씨 역시 “관객들의 위드유는 연극 사회에 던진 강력한 경고였다. 결코 우리끼리만의 싸움이 아니구나 깨닫고 펑펑 울었다”며 “이제는 가해자가 돌아왔을 때 다시는 그전처럼 활개 치고 다닐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놓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제작 생태계를 바꾸기 위한 도전의 일환으로 연극계에선 ‘한국형 연극 스탠더드’(KTS)를 준비하고 있다. 오디션 단계부터 제작자와 배우 등 작업에 관련된 모두가 성평등과 안전을 위해 준수해야 할 규약을 담겠다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미국의 ‘시카고 연극 스탠더드(CTS)’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성폭력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제작 과정에서 전반적인 인권 보장을 다룰 예정이다. 현재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내에 전담 실무진이 꾸려진 상태다. 이들은 또한 예술작품이 여성을 어떻게 비추는지도 모니터링하고, 문화예술계 특징을 반영한 교육용 콘텐츠도 만들 계획이다.

ㄱ씨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이 나일 수 있다는 용기를 각각 가졌으면 좋겠다. 용기와 결단이 모이면 세상은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ㅂ씨는 “성적인 착취를 하지 않고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가해자가 자연스럽게 퇴출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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