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로 남은 ‘을’들의 꿈…남양유업 갑질투쟁, 그 후

2019.06.22 06:00 입력 2019.06.22 13:25 수정

[커버스토리]상처로 남은 ‘을’들의 꿈…남양유업 갑질투쟁, 그 후

경기도에 사는 김윤미씨(41)는 우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커피 등의 제품을 살 때마다 제조사명을 눈여겨본다. 한때 물량 밀어내기 갑질 파문을 일으켰던 남양유업 제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지난해엔 한 누리꾼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남양유업 제품 목록을 정리해 올린 게시물을 봤다. “나만 아직도 불매운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니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6년 전인 2013년 5~6월은 남양유업 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주문하지도 않은 제품 물량을 떠안기며 욕설·폭언을 퍼부은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던 시기다. ‘갑질’이란 표현이 이 사건을 계기로 널리 쓰이게 됐다. 2013년 이전까지 ‘갑질’을 언급하는 보도는 10여건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해 5~6월엔 3000건이 넘었다. 특히 물량 밀어내기를 참다 못해 거리로 나온 남양유업 대리점주들은 ‘갑’에 짓눌려 사는 ‘을’들의 고통을 일깨웠다. 더불어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가 이때 생겨났다. 주류 제조업체 배상면주가의 대리점주, BGF리테일 편의점주가 물량 밀어내기와 불공정 계약 문제로 괴로워하다 자살한 사건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을의 반란’을 상징하던 그 ‘을’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밀어내기 갑질 횡포와의 싸움을 처음 시작한 남양유업 대리점주는 이창섭(46)·정승훈(46)·김대형(39)씨다. 욕설 파문을 계기로 시작된 이들의 ‘갑질투쟁’은 큰 화제가 됐고 이들이 꾸린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 회원은 나중엔 100여명으로 늘었다.

남양유업 갑질투쟁 이후 국회는 대리점주가 입은 피해액의 최대 3배까지 기업이 배상할 수 있는 ‘남양유업 방지법’(대리점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법을 적용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대리점협의회는 부족한 피해배상과 상생기금,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놓고 분열했다. 최초 투쟁을 이끌었던 이창섭·정승훈·김대형씨는 직접 만든 이 단체를 차례로 나와야 했다. 6년 전 사측 입장에 섰던 대리점주 장성환씨(48)는 오히려 지금 남양유업과 싸우고 있다.

남양유업 갑질투쟁기를 네 사람 각각의 관점으로 담았다. 각자의 독백은 서로 맞물리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투쟁 후의 이야기까지 알릴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한때 우리가 배상을 넘어 더 큰 꿈을 꿨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다른 을들은 우리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고 싶다”고 했다.

네 사람의 이야기는 늘 온전치 못한 ‘을’의 몫, 이상적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연대를 통한 변화’, 때로는 쉽게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드는 ‘갑’ 등에 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당신이 6년 전 ‘갑질’과의 싸움에 나섰던 남양유업 대리점주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 ‘을의 연대’로 구조를 바꾸진 못했지만…누군가 꿈을 이어받길”

<b>미완의 승리</b> 김웅 전 남양유업 대표(왼쪽)와 이창섭 대리점협의회 회장이 2013년 7월 단체교섭을 마무리하고 악수를 하고 있다. 이때의 단체교섭을 통해 ‘남양유업 공정거래 및 상생협약’이 만들어졌다. 대리점협의회 점주들의 개별 피해배상은 이듬해 피해배상중재기구를 통해 진행됐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미완의 승리 김웅 전 남양유업 대표(왼쪽)와 이창섭 대리점협의회 회장이 2013년 7월 단체교섭을 마무리하고 악수를 하고 있다. 이때의 단체교섭을 통해 ‘남양유업 공정거래 및 상생협약’이 만들어졌다. 대리점협의회 점주들의 개별 피해배상은 이듬해 피해배상중재기구를 통해 진행됐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이창섭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 전 회장

남양유업 갑질투쟁은 거대 자본권력과 싸워서 이긴 최초의 성공 사례였다고 생각한다. 피해배상이 끝났고 대리점협의회가 결국 와해되다시피 했는데 우리의 투쟁사를 굳이 얘기해야 하냐고? 나는 알리고 싶다. 6년 전에 우리가 ‘피해배상’을 넘어 더 큰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대리점·가맹점 같은 을이 갑(기업)에게 당하기만 하는 근본적 구조, 그 틀을 바꾸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밀어내기 갑질과의 싸움은 2013년 1월26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공정위에 남양유업을 신고하고 7명의 대리점주를 모아 집회를 했다. 당시 본사는 “불만을 가진 일부 대리점의 일방적 주장”이라며 밀어내기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의 이야기가 뉴스로 다뤄지기도 했지만 그해 봄에는 사실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매일같이 집회를 했는데 모이는 대리점주들이 많지 않아 홀로 서 있을 때도 있었다. 본사 직원이 찾아와서 “집회한다고 신고해놓고 왜 이렇게 사람이 없느냐”라고 물으면 겸연쩍어서 “다들 밥 먹으러 갔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남양유업 갑질’ 하면 30대 본사 직원이 50대 대리점주에게 ‘물량을 받으라’며 욕설·폭언을 퍼붓는 녹음파일을 떠올릴 것이다. 그 녹음파일이 큰 동력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갑을 구조’로 향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녹음파일을 공개하기 전 약 3개월 동안 본사의 ‘물량 밀어내기’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를 만들어서 450명의 기자 e메일로 정기적으로 제보했다. 욕설 사건이 터진 후 집회 현장에 갑자기 200명가량의 기자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밀어내기 횡포를 설명한 후 이렇게 덧붙였다. “기자님 e메일로 자료를 이미 보내놓았습니다.”

사실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갑질은 입증이 어려웠다. 예를 들어 남양유업 대리점이 전산시스템으로 우유 500개를 주문하면 본사가 600개로 수정할 수 있었고 최초 주문량 기록은 지워지는 식이었다. 이 전산시스템은 컴퓨터 화면 캡처도 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나중에 검찰수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그래서 다들 밀어내기를 당하고도 증거자료를 제대로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밀어내기 갑질 입증 어려움 뚫고 거대 자본권력과 싸워 이긴 성공사례
그러나 피해 해결돼도 갑질 반복 뻔해…‘을’의 힘을 키우고 싶었다
우리는 생각 차이로 분열했지만, 다른 이들 못하리라는 법은 없어

나는 2008년에 웹개발업자로부터 강제로 화면 캡처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입했다. 그해부터 수시로 주문량 변조 입증 자료를 모았다. 이 자료로 공정위에 신고도 하고 ‘사문서위·변작’으로 고발도 했다. 기자들에게 보낸 자료도 이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한 변호사는 캡처 기록을 보고 나에게 ‘무조건 이긴다’면서 민사소송을 해서 피해배상부터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만 배상을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사고발을 하게 됐다.

어쨌든 남양유업은 욕설 녹음파일 파문 직후 대국민 사과를 했고 물량 밀어내기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며칠 뒤 내가 회장으로 있던 대리점협의회는 남양유업과 단체교섭을 시작했다. 어느 기자가 물었다. ‘피해배상만 받으면 되지 왜 이런 것을 하느냐’고. 나는 ‘불공정’이 만연한 ‘갑을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랐다. 단체교섭을 통해 불공정행위 근절·대리점계약 공정화 등을 뼈대로 하는 ‘남양유업 공정거래 및 상생협약’을 만들었다.

당시 단체교섭에서 ‘상생기금’ 30억원을 확보했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대리점·가맹점들의 힘을 한데 모으는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회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피해가 해결된다 해도 또 갑질은 있을 것이다. ‘을’ 스스로 힘을 키우지 않으면 갑질을 당할 때마다 여기저기 찾아가 살려달라고 매달려야 한다. 대리점주, 가맹점주 같은 자영업자는 ‘신분 세탁’된 노동자다. 노동자에게 노동3권이 있고 노동조합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방패막이가 있어야 한다. 이 기금은 모든 을을 위한 단체를 만드는 데 쓰고 싶다.”

하지만 회원들 간에 생각차가 컸다. 회원들은 기금의 활용을 놓고 분열했다. 나는 단체교섭이 끝난 직후 총회에서 제명당했다. ‘독재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기금은 협의회 회원들이 나눠가졌다고 들었다. 나에게도 일정액을 주겠다고 연락을 해 왔지만 거절했다. 나는 독신이지만 대부분은 가정이 있었다. 당장 가정형편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의 그들을 설득하려면 ‘을의 연대’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줬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 책임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싸움을 계기로 남양유업 방지법(대리점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도 만들어졌다. 대리점들의 단체결성권·단체협상권이 꼭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국회에서 다 빠지고 말았다.

갑질투쟁이 끝난 후 고물상에서 구리를 사서 전선·파이프 등을 만드는 공장에 납품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지금은 전남 완도에서 친구가 하는 멸치잡이 등을 돕고 있다. 자원재활용연대에서 폐지 줍는 노인들의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드는 운동도 하고 있다. 그들은 자영업자들보다도 더 아래에 있는 ‘을’이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다가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결국 우리는 구조를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실패? 실패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못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서 더 알리고 싶다. 한때 우리가 꾸었던 꿈을 누군가가 이어받았으면 좋겠다. ‘을 스스로 갑을 구조를 바꾼다’는 정신이 기억됐으면 좋겠다.

# 단체교섭 이듬해에 피해배상중재기구가 구성돼 대리점주 각각에 대한 배상액이 정해졌다. 중재기구는 상생기금 30억원이 피해배상액 성격을 지닌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교섭과 중재에 관여한 변호사는 “이창섭 전 회장이 나간 후 상생기금이 피해배상액이 아닌 별도의 ‘기금’이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해 배상액에 대해 남양유업 측 주장이 더 반영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배상액은 점주들이 추산한 피해액의 3분의 1 이하로 확정됐다.


◆6년 전 그때 밀어내기에 맞섰던 ‘을’들은 지금

<b>‘밀어낸’ 제품들로 현실 알려</b> 주문하지도 않은 물량을 본사가 대리점에 억지로 떠넘기는 ‘밀어내기’ 횡포를 알리기 위해서 남양유업 대리점주 네 사람이 2013년 6월 당시 서울 중구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시위를 하던 모습.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 등을 억지로 떠안은 대리점주들은 제품 상당량을 폐기해야 했고, 물량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 빚더미에 올랐다. 대리점주들은 본사가 ‘밀어낸’ 제품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시민들에게 물량 밀어내기 현실을 알리고자 애썼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밀어낸’ 제품들로 현실 알려 주문하지도 않은 물량을 본사가 대리점에 억지로 떠넘기는 ‘밀어내기’ 횡포를 알리기 위해서 남양유업 대리점주 네 사람이 2013년 6월 당시 서울 중구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시위를 하던 모습.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 등을 억지로 떠안은 대리점주들은 제품 상당량을 폐기해야 했고, 물량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 빚더미에 올랐다. 대리점주들은 본사가 ‘밀어낸’ 제품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시민들에게 물량 밀어내기 현실을 알리고자 애썼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갑을관계 알린 자부심 있었지만…더는 세상과 싸울 수 없었다”

[커버스토리]상처로 남은 ‘을’들의 꿈…남양유업 갑질투쟁, 그 후

|정승훈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 전 총무

역사에 남을 자본과의 싸움
상생기금 30억이 갈등 불씨
사람에게 받은 상처 너무 커
4년 전 냉동트럭 기사로 전직
다른 ‘을’들의 갑질투쟁은
우리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4년 전부터 11t 냉동트럭을 몰고 있다. 냉동만두 같은 식품을 대형마트 등 소매점에 운송하는 일이다. ‘세상과, 사회와 싸우는 그러한 일이 없는 직업’이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바로 전직을 결심했다. 삶에 지쳐 있던 시기였다.

2013년에 시작해 이듬해까지 이어졌던 남양유업 대리점주들의 갑질투쟁은, 개인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피해배상도 받았고 기업의 악질적 행태도 좀 줄었다고 위안을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때 우리는 ‘갑을관계 문제를 우리가 온 세상에 알렸다’ ‘이곳(대리점협의회)이 자영업자의 성지가 될 것이다’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만약 대리점협의회가 흐트러지지 않았다면, 다른 기업 대리점들이 당하는 갑질도 함께 싸우고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창기 이 싸움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대리점협의회를 떠났고, 협의회는 더는 ‘을’을 위해 싸우지 않는 곳이 됐다.

역사에 남을 싸움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많이 생각해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꿈과 돈, 두 가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양유업 사원의 욕설·폭언 녹음파일이 공개된 이후 남양유업의 태도는 달라졌다. 2013년 본사와 대리점협의회는 단체교섭을 벌였다. 그렇게 ‘남양유업 공정거래 및 상생협약’을 만들었다. 협약엔 남양유업이 대리점협의회에 상생기금 30억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대리점주들의 개별 피해배상 건은 나중에 별도의 중재기구를 통해 진행하기로 했다.

“이 기금은 모든 을을 위한 것이다.” 당시 이창섭 대리점협의회장이 기금을 만들자며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박수를 쳤다. 하지만 그 기금이 모든 분란의 씨앗이 됐다. 돌이켜보면 이런 의문도 든다. ‘을의 단체’를 만든다 해도 꼭 ‘부자 단체’로 시작해야 했을까. 잘 모르겠다.

회장에게 ‘꿈’이 우선이었다면 몇몇 대리점주들에겐 ‘돈’이 먼저였던 것 같다. 2013년 1월 시위를 시작할 때 한 대리점주에게 “○○님은 제일 바라는 게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다 필요 없고 남양유업 회장 사과만 받으면 된다. ‘다시는 밀어내지 않겠다’ 그 말만 들으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대리점주의 눈빛이 반년 만에 달라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오해일 수도 있다. 사측 직원은 ‘누구누구가 따로 임원을 만나던데…’라고 일부러 말을 흘렸다. 사측은 회원 몇몇과 따로 만났다. 그 사실을 전해들을 때마다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겼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마 회사가 우리를 와해시키기 위해 돈 욕심을 부추기고 서로 의심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전략에 걸려든 것이 아닐까.

나 역시 의심을 받아서 대리점협의회를 나오게 됐다. 나는 2013년 7월 대리점협의회 대표자 중 한 명으로 남양유업과 협상했고, ‘모든 을을 위한 기금을 만들자’는 이창섭 회장의 뜻에 공감해 그에게 힘을 보탰다. 그런데 어느새 다른 대리점주들은 나와 회장이 그 돈을 개인적으로 가지려 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더는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쓰러지기도 했고, 그 후로도 몇 년간은 악몽에 시달렸다.

두 아들은 물량 밀어내기로 빚이 쌓여갈 무렵, 진로를 바꿔야 했다. 대부업체에까지 돈을 빌려 생활하던 시기였다.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 아들들은 지금은 각각 자동차정비·미용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한창 갑질투쟁을 할 때 아이들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지금 나는 아이들에게 ‘너무 나서지 마라’ ‘나 자신을 지킬 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물량 밀어내기 갑질을 없애기 위해 싸운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으로부터 입은 상처가 너무 컸다.

‘좀 잘하고 나오지 마지막에 왜 이렇게 됐어?’ 누군가가 나한테 이렇게 따져 물을 것만 같다. 많은 시민들의 응원 덕분에 남양유업이 잘못을 인정하고 갑질 문제가 개선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끝나서 너무나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회원들에게 기금을 만든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고 ‘우리가 받을 피해배상과는 별도의 몫’이라고 설득부터 할 것이다. 단체교섭이 끝난 후, 중재기구에서 진행할 개인 피해배상에 영향을 줄까 염려되어 기금의 존재를 나중에 알리기로 한 터였다. 하지만 뒤늦게 기금 조성 사실을 알게 된 회원들의 귀에는 ‘모든 을을 위한 기금’이란 취지가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

기자가 ‘투쟁 이후의 이야기까지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나는 알려졌으면 한다. 또 다른 ‘을’들이 갑질투쟁에 나설 텐데 우리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측 믿고 동의서 사인…그 후 손해 눈덩이, 배상도 못 받아”

[커버스토리]상처로 남은 ‘을’들의 꿈…남양유업 갑질투쟁, 그 후

|장성환 사측이 주도해 만든 ‘전국대리점협의회’ 북서울지점 대표

회사, 점주 30여명 따로 불러
다른 협회 만들어 달라 설득
할인 지원에 생계자금도 약속
대리점협의회 배상 소식 듣고
반발했지만 동의서가 ‘발목’
곧 판매위탁수수료 관련 소송

6년 전, 남양유업 사원의 욕설 파문이 터진 후 본사에서 나를 비롯해 대리점주 30여명을 힐튼호텔로 불렀다. 남양유업에선 상무급 임원들이 나왔다.

호화로운 식사를 했다. 임원들은 이런 말을 반복했다. “회사가 많이 어렵습니다. 도와주세요. 회사가 있어야 대리점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였다.

사측은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로 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와 이름이 유사한 ‘남양유업 전국대리점협의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른바 ‘어용단체’다. 회사에 맞서는 대리점협의회는 거의 배상을 받지 못할 것이고, 대신 우리에게는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긴급생계자금 500만원을 약속했고 제품을 싸게 팔 수 있도록 할인 지원금을 주겠다고 했다.

나 역시 ‘물량 밀어내기’의 피해자였고 큰 빚을 지고 있었다. 불안했다. 회사를 믿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할인 지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팔면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큰 회사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겠나 싶었다.

내가 속한 전국대리점협의회와 대리점협의회는 언론을 통해 맞섰다. 대리점협의회 사람들은 나를 ‘바보’로 보는 듯했다. 돌이켜 보니, 그들이 맞았다. 나는 바보였다.

당시 남양유업은 ‘상생을 위한 협상 동의서’를 내밀었다. 앞으로 공정하게 거래를 할 것이고 일정한 지원을 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막상 회사의 ‘할인 지원’은 3개월뿐이었고, 쪽잠을 자며 거래처를 뛰어다녀도 남는 돈이 없었다. 오히려 본사에 지급해야 할 물량대금 빚만 쌓여갔다. 보다 못한 남양유업 담당직원이 나에게 수천만원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열심히 하시는 분이니 꼭 갚을 것”이라며….

동의서에 사인한 후 1년여가 흘렀다. 대리점협의회가 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밀어내기 피해액이 7억여원에 이르렀다. 박리다매형으로 영업을 했기 때문에 밀어내기 당한 물량이 다른 대리점보다 훨씬 많았다. 남양유업 본사를 찾아가 피해자 모두에게 배상을 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고 따졌다. 회사에서는 당시 동의서에 사인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나에게는 배상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사인한 동의서엔 ‘회사를 상대로 일체의 소송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있었다.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다.

내가 반발하고 나서자 남양유업은 2015년 나와 거래를 끊었다. 대리점도 사라졌고, 남은 것은 그저 거래처와의 ‘신용’뿐이다. 지금은 친분이 있는 대리점주들에게서 제품을 현금으로 산 뒤 거래처에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소매점들도 나를 도우려 거래를 유지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 불어난 빚이 10억원에 달한다. 누나가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받은 대출금, 고모가 평생 모은 노후자금…. 네 식구가 월세방에 살고 있다. 월세도 6개월 밀렸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사채에도 손댔다. 회사를 믿은 대가가 이렇게까지 처참해야 할까.

대리점을 운영하던 2012년 한 대형마트로부터 받았어야 할 수수료 상당액을 받지 못했음을 알게 됐다.

대형마트로부터의 판매위탁수수료는 본사를 통해 건네진다. 대형마트로부터 직접 ‘수수료 내역장’을 받아보니 내가 받았던 금액과 큰 차이가 있었다. 수수료 편취 갑질을 다루는 기사도 나왔지만 이제는 남양유업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가라앉아서인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본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곧 남양유업을 사기로 고소할 계획이다. 일한 만큼의 몫을 꼭 찾고 싶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술만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가족만큼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두 아들과 아내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 남양유업 측은 “2012년 당시 본사는 대리점주가 받아야 할 수수료를 모두 제대로 지급했고 내역도 사후에 확인할 수 있게 했다”면서 어용단체 결성 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터져 현직 대리점주들에게 도와달라고 한 적은 있지만 전국대리점협의회를 ‘어용’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상생을 위한 동의서’에 사인했다는 이유로 피해배상을 못 받게 된 사례에 대해서는 “회사가 약속한 별도 지원 약속을 모두 지켰다”고 했다.

“상생기금 절반, 다른 ‘을’들 위해 쓰자 했더니 스파이로 몰려”

[커버스토리]상처로 남은 ‘을’들의 꿈…남양유업 갑질투쟁, 그 후

|김대형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 전 총무

지도부, 기금 비공개 원했지만
민주적으로 결론 내려 알려
갑질 당하는 대리점들 도우며
악에 받친 삶의 괴로움 녹여내

내 이름과 ‘손도끼’를 검색해보라. 남양유업의 물량 밀어내기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고 세 딸, 아내와 함께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던 내 사연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냉장트럭 운전석 옆에 손도끼를 두고 다녔다. 그만큼 악에 받쳐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길 줄 몰랐다. 2013년 5월, 남양유업 사원의 욕설 녹음파일이 공개된 후 사측과 협상(단체교섭)이 시작됐다. 협상은 이창섭 전 회장, 정승훈 전 총무가 진행했다. 합의된 협약(남양유업 공정거래 및 상생협약)의 내용에 실망했다. 남양유업 전산시스템은 대리점의 주문량을 사측이 수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점주 대부분의 밀어내기 입증 자료가 없었다. 협약을 보니, 피해가 ‘입증불명인 경우’의 배상 기준이 내가 보기엔 추상적이었다.

불안이 피어올랐다.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개별 피해배상은 전직 법관이 중재하는 기구를 따로 구성해 진행한다고 했다. 하지만 먼저 합의된 이 협약에서 더 구체적인 약속을 받아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협약에서 상생기금을 따로 약속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창섭 회장은 기금으로 ‘투쟁본부’ 같은 것을 꾸릴 심산이었다. 그가 일방적 결정을 내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돈 욕심도 났다. 물량 밀어내기로 큰 빚을 지고 있었고, ‘몸빵’을 하며 앞장서 싸웠다. 열심히 싸운 사람은 소수였고 회원 다수가 내 덕분에 배상을 받게 됐는데….

지도부는 개별 피해배상이 끝날 때까지 기금 존재를 ‘비공개’하기로 했지만 고민 끝에 회원들에게 이를 알렸다. 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결론을 내고 싶었다. 2013년 늦여름 총회가 열렸고, 이창섭 회장과 정승훈 총무가 협의회를 나갔다. 그 후 나는 회원들에게 이 기금의 절반은 ‘공로’를 세운 만큼 나눠 갖되, 나머지 절반은 원래 취지대로 다른 ‘을’들을 위해 쓰자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회원들 사이에서 나는 회사의 ‘스파이’로 몰려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술도 많이 마셨다. 기금의 존재를 알린 걸 후회하기도 했다. 협의회 사람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기금 전액을 나누어가졌다고 들었다.

2014년 겨울 즈음 괴로움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시민사회 활동을 하면서 ‘나를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지금은 방역보조 제품을 만드는 일로 돈을 벌면서 ‘대리점살리기협회’에서 갑질을 당하는 대리점들을 돕고 있다.

[커버스토리]상처로 남은 ‘을’들의 꿈…남양유업 갑질투쟁,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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