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의 시대

2019.07.15 20:52 입력 2019.07.15 20:55 수정

[전우용의 우리시대]혐한의 시대

1929년 9월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했다. 굳이 3·1운동 10주년을 맞아 이 행사를 기획한 데에는 ‘조선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인의 ‘자각’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진행된 이 박람회를 관람한 인원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합쳐 100만명이 훨씬 넘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발간한 한 잡지는 한 촌로(村老)의 소감을 이렇게 소개했다. “거 참 흉악한 놈들일세, 조선 사람의 흉거리란 흉거리는 다 모아 놓았네 그려.”

[전우용의 우리시대]혐한의 시대

이 촌로의 말대로, 조선박람회는 ‘조선의 모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모든 흉거리’를 전시한 행사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박람회를 이용해 열등한 조선인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것은 미몽(迷夢)에 불과하며, 일본인의 계도 아래 문명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을 조선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 새겨 놓으려 했다. 천도교계에서 발간하던 잡지 ‘별건곤’은 이에 맞서 ‘조선의 자랑’이라는 특집란을 만들었다. 일본이 보여주는 것만이 조선의 전부가 아니며, 조선인에게는 자랑거리도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잡지 지면이 장대한 스펙터클에 맞설 수는 없었다. 박람회가 끝난 뒤 ‘별건곤’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종로 네거리 우리 동포들의 상점지대로부터 북촌(서울의 조선인 거주지) 일대의 휑뎅그렁하며 빈 듯하며 어둠침침한 그것에 비하여 모든 사람의 눈을 현혹케 하여 마지않는 남촌(서울의 일본인 거주지)의 광경에 우리 정신까지도 전부 거기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우리 동포들이 한 번 이곳을 구경하고 이 땅을 밟을 때에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 이 놀람과 찬탄이 드디어 부러움과 동경(憧憬)의 표적으로 변하여 그네들의 머릿속에다 깊고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조선박람회장뿐 아니라 행사장이 자리 잡은 서울 경관 전체가 조선인에게 일본을 향한 동경과 자기 모멸의식을 심어주고 확산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이원적 경관조차도 민족 차별적 도시 행정의 소산이었다.

어느 나라나 근대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과 담론을 동원하여 자민족의 우수성과 자국사의 특별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자국사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타국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자국사를 ‘독창적이고 선진적이며 위대한’ 역사로 꾸미기 위해 인접국인 한국 역사를 ‘사대주의적이고 후진적이며 미개한’ 역사로 정리했다. 메이지유신 무렵부터 일본의 신문·잡지들에는 한국에 관한 기사들이 자주 실렸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갓 쓰고 도포 입은 노인이나 기생이었다. 반면 일본인의 대표 이미지는 양복 입은 장년 남성이었다. 이런 텍스트와 이미지를 수없이 접하면서, 일본인들의 의식 안에는 문명개화에 성공한 건장한 일본인이 미개하고 노쇠하며 연약한 조선인을 계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자리 잡았다. 한국인을 멸시하는 의식, 즉 ‘혐한의식’은 일본인들을 근대 국민으로 묶어 준 밧줄이었다.

일본인들의 혐한의식은 한국을 강점한 후 더 강해지고 정교해졌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선입견에 따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 풍속 등을 조사, 정리했다. 표현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결론은 한결같았다. 조선인은 이기적이고 나약하며 독립심과 책임감, 공익 관념이 없고, 배은망덕하며 나태하다는 담론이 진실인 것처럼 유포되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진행된 민족별 계층 분리 현상은 ‘빈곤의 속성’을 ‘민족의 고유 습성’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담론은 각종 매체, 특히 교과서를 통해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이식되었다. 많은 조선 지식인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상황 자체가 이 담론의 진실성을 담보한다고 믿었다. 조선 지식인들 스스로 조선인의 악습과 악덕을 개조하자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개조할 것인가? 그들에게는 일본이 모델이었고 일본인이 스승이었다. “스승을 미워하면 배울 수 없다.” 그들에게 ‘반일’은 배움을 가로막는 악덕이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어린애 같은 자존심’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가 홀로코스트를 낳았던 것처럼, 일본인들의 혐한의식도 종종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1923년의 관동대학살은 물론, 동학농민혁명, 의병전쟁, 경신참변 등 일본군의 학살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및 일본군 성노예 학대에도 혐한의식은 여지없이 작동했다.

패전 후 일본 평화헌법은 국가 간 대등관계를 명시했고 일본인 사이에서도 근거 없는 민족 우월의식과 주변 민족에 대한 혐오감을 청산하자는 문화운동이 벌어졌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1980년대 말, 경쟁 만능의 신자유주의 사조가 확산하자, 일본 내에서도 군국주의 시대를 반성하기보다는 영광으로 기억하자는 담론이 공공연히 유포되었다.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것은 일본인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지 반성할 이유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이 힘을 얻자, 잠재해 있던 ‘혐한의식’도 다시 표출되었다. 일본 도처에서 혐한시위가 벌어지고 한국인 학교 학생들이 폭행당하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국 지식인 일부는 이식된 혐한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국인들이 자기 모멸의식에서 벗어난 ‘정체성’ 담론에 익숙해진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세계사적 지각 변동에 따른 ‘힘 만능주의’의 부활은, 한국인에게 이식되었던 혐한의식까지 소생시켰다. 대일관계에서 늘 ‘우리 탓’을 하는 태도는, 우리 안에 잔존한 혐한의식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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