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의 시대

2019.10.07 20:47 입력 2019.10.07 20:48 수정

[전우용의 우리 시대]법치의 시대

조선 태종 4년 10월, 의정부에서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 반포하고 각 관리들에게 강습시키라고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경국대전>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국초에 만든 <경제육전>이 너무 소략해서 적용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우용의 우리 시대]법치의 시대

당장 죄인을 장형(杖刑)에 처하는 경우에도, 몽둥이의 크기와 때리는 강도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의정부는 이렇게 썼다.

“무릇 태(笞) 하나 장(杖) 하나라도 반드시 율문(律文)에 따라 시행해야 합니다. 만약 율문을 살피지 않고 망령된 뜻으로 죄를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줄 것입니다. 또 형(刑)은 사람의 죽고 사는 일과 직결되므로 언도하는 자가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근래 형물(刑物)의 크고 작은 것을 제멋대로 제작하므로 태와 장으로 인하여 죽는 자가 자못 많습니다. 금후로 가쇄(枷鎖·목과 발목에 씌우는 형구), 태, 장, 추(杻·일종의 수갑)는 모두 율문에 의해 제작하게 하며, 관찰사가 이를 살펴 함부로 제작한 수령은 죄를 주어야 합니다. 각 고을 수령이 옥사(獄事)를 결단할 때 율문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태를 써야 마땅한데 장을 쓰고, 장을 써야 마땅한데 신장(訊杖)을 쓰고, 볼기를 쳐야 마땅한데 허리를 때리고, 넓적다리를 때려야 마땅한데 등에 채찍질을 하여 인명을 손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하건대, 태 하나 장 하나라도 반드시 율에 의해 결단하게 하고, 장죄(杖罪) 이상 사죄(死罪)이면 법에 비추어 도관찰사(都觀察使)에게 보고하게 하고, 도관찰사는 율학인(律學人)으로 하여금 다시 검토하게 하십시오.”

법치주의를 근대의 산물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근대 이전의 유교문화권 국가들에서도 법치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었다. 다만 예(禮)를 법보다 앞세웠기 때문에 ‘예치(禮治)’라고 부를 뿐이다.

예치의 원칙에 따르면 문자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대하는 예가 서로 달라야 했고, 군주를 대하는 예와 서민을 대하는 예도 달라야 했다. 같은 죄를 지었어도 사대부에게 내리는 벌과 평민에게 내리는 벌이 달랐다. 법에 따라 벌을 줄 때에도 예는 지켜야 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소멸하면서 만인에게 평등한 법의 시대, 이른바 법치의 시대가 열렸다. 이어 1895년에는 지방관이 독점했던 재판권을 분리하여 심문과 기소는 검사에게, 판결은 판사에게 맡겼다. 하지만 오래된 관행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신분제는 사라졌으나 신분의식은 남았으며, ‘사람 봐가며’ 수사하고 기소하고 판결하는 현상도 여전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민족차별’이라는 새 신분제를 만들었다. 본래 신분제는 법치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이들이 만든 새 신분제는 예치를 회복한 것이 아니라 비례치(非禮治) 또는 무례치(無禮治)로 이어졌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에 한해 시행한다는 전제하에 ‘조선태형령’과 ‘태형집행심득’을 제정, 공포했다. “태형은 수형자를 형판 위에 엎드리게 하고 양팔을 좌우로 벌리게 하여 형판에 묶고 양다리도 같이 묶은 후 볼기 부분을 노출시켜 태로 친다. 형장에 물을 준비해 수시로 수형자에게 물을 먹일 수 있게 한다. 수형자가 비명을 지를 우려가 있을 때에는 물에 적신 천으로 입을 막는다” 등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법규로 정했으니, 그야말로 법치주의의 완벽한 구현이라 할 만하다.

태는 경무총감부에서 일괄 제작하여 각지 헌병 분견소와 경찰 주재소에 보냈다. 그러나 지방 관헌이 임의로 태를 개조하는 행위는 눈감아 주었다. 관제(官製) 태에 납덩어리를 박는 일은 흔했다고 한다. 여기에 민족차별 의식이라는 ‘사감(私感)’이 작용하여 일제강점기의 태형은 조선시대 태형보다 훨씬 잔혹했다. 조선인에 한정된 야만적이고 반인도적인 폭력이 ‘법치’의 이름으로 횡행했다.

조선태형령은 3·1운동 이후 폐지되었지만, 조선인에 대한 예의 없는 법치, 반인도적인 법치는 여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요릿집에서 경찰이나 검사가 민족의식이 높은 기생들에게 은근히 모욕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 그들은 기생 집 앞에 몰래 잠복해 있다가 기생이 남자와 함께 있는 기색이 보이면 급습하여 밀매음 혐의로 체포하곤 했다. 그들은 체포한 기생을 속옷 차림으로 머리 위에 베개를 인 채 경찰서까지 걷게 했다. 기생이 왜 이렇게 모욕을 주느냐고 항의하면, 그들은 낄낄 웃으며 속옷과 베개가 밀매음의 증거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법적 증거물’을 모욕적 방법으로 확보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다. 그 탓에 기생은 재판도 받기 전에 온 동네 사람들에게 ‘밀매음녀’로 낙인찍혔다.

물론 고문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시대에, 이 정도의 모욕을 문제 삼는 건 정신적 사치였다.

해방 이후에도 경찰, 검사, 판사들은 수시로 수사, 기소, 재판 과정에 사감과 사욕(私慾)을 담았으나, 이는 고문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였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이후 통닭구이, 전기고문, 물고문 같은 것들은 사라졌으나 피의자와 그 가족에게 모욕을 주는 정신적 고문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수사 과정에서 취득한 정보를 공개할 것이냐 말 것이냐, 피의자에게 모욕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검찰 마음대로 정하는 관행도 요지부동이다.

법치주의와 준법주의는 다른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사람 봐가며’ 사감이나 사심을 담는 행위야말로 법치주의의 원칙을 부정하는 짓이다. 지금은 국민이 주권자인 시대다. 주권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법치의 시대를 어떻게 열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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