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부조차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게 현실"

2019.12.08 09:06

처음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1953년 당시만 해도 가정에서 여성을 대신해 가사 및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을 ‘식모’ 또는 ‘유모’라고 불렀다. 가사와 육아는 당연히 ‘노동’이 아니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 제11조 1항은 단서조항으로 “동거하는 친족만을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과 가사(家事) 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6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조항은 여전히 유효하다. 근로기준법 제11조 1항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늠자다.

지난 수십 년간 가사노동자 보호를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18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매번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안’ 제정법안이 발의됐지만 모두 임기만료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도 임기만료 폐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최영미 한국가사노동자협회 대표(58)는 20년간 가사·산후관리 노동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가사노동자 보호법 제정 운동을 벌여온 가사노동 역사의 산증인이다. 최 대표는 “가사노동자의 문제는 여성운동의 문제이자 이주노동자의 문제, 거기에 가사에 대한 홀대 인식이 모두 복합적으로 엮인 문제”라며 “시장은 변화를 요구하는데 정부는 입법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12월 5일 최 대표를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정부조차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게 현실"

-가사노동자보호법안이 매번 국회에서 임기만료 폐기되고 있다.

“18대 국회에서 김상희 통합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처음 법안 발의를 하면서 물꼬를 텄다. 우리 협회가 의원실에 요청해 법안도 함께 만들었다. 그런데 임기만료 폐기됐다. 19대에서도 임기만료 폐기, 20대 국회에서도 이정미 정의당 의원, 서형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부법안 등 3개 법안이 발의됐지만 역시 임기만료 폐기가 되지 않겠나 싶다.”

-통과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첫째로 이 법안에 매달리는 의원이 없다. 처음 18대 국회에서 법안 발의가 됐을 때 노동부를 가니 ‘이건 여성 일자리 문제니까 여성가족부로 가라’고 했다. 그런데 복지문제도 걸려 있으니 이번에는 ‘복지부로 가라’라고 했다. 결국 싸움 끝에 이건 고용노동부의 문제로 결론을 내렸는데도 그 안에서도 담당 부서별로 또 미뤘다. 근로기준법 문제와 이주노동자 문제가 걸려 있고, 여성고용복지 문제도 걸려 있으니 고용노동부 안에서도 여성고용정책과에서 다룰 거냐, 근로기준과에서 다룰 거냐 등을 가지고 서로 떠넘겼다. 어느 부처, 어느 부서도 딱 집어 자기 업무라고 밝히질 못했다. 국회를 가봐도 환경노동위원회는 이 문제 외에도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처리 순위에서 계속 뒤로 밀렸다. 20대 국회에서도 3개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발의한 의원들이 전부 환노위를 떠나니 환노위 소속 어떤 의원도 더 이상 ‘내 법’이 아닌 것처럼 취급했다. 또 가사노동자보호법 관련 사안은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 중 융합과제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이 ‘국정과제로 들어가 있는 것은 전부 동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또다시 브레이크가 걸렸다.”


-가사노동자 관련 법안 처리는 시급한 문제 또는 중요한 문제로 보지 않는 느낌이다.

“10년 동안 내내 중요성을 말해도 막상 공식 토론 자리가 아닌 편안한 자리에 가면 꼭 담당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쌓여 있는 노동 현안이 많은데 굳이 집에 들어앉아 일하는 사람들 문제까지 당장 건드려야 하느냐’, ‘나도 지금 가사도우미나 베이비시터 구하려면 힘들어요. 우리가 을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한다. 그런 마인드가 굉장히 강하다. ‘지금 그런 것까지 다뤄야 해?’, ‘(가사노동자 문제는) 너무 작은 이슈 아니야?’라는 거다.”


-60여 년이 지나도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은 변하지 않는 듯하다.

“가사노동자는 여성노동 중에서도 가장 하위에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이들의 노동을 노동으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장벽이 많이 있다. 4대 보험은커녕 노동자로서의 기본적인 보장을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몇 달 전에도 경기 부천에서 가사노동자 한 분이 집안 청소를 하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 지금도 자기 돈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산업재해 보호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치면 실직상태가 된다. 그럼에도 실업급여도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조금은 그들의 어려움을 눈감고 싶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가사노동자들은 직장여성의 경력단절을 막는 방어막의 기능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퇴직금 및 최저임금 등을 모두 보장할 경우 ‘직장여성의 임금=가사노동자 임금’도 가능해진다. 이는 결국 직장여성의 경력단절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 지적도 틀리지는 않다. 그래서 국제적으로도 이 문제를 ‘국제노동계의 마지막 현안’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가사도우미·베이비시터 이렇게 세분화해도 결국 부모 대신 아이를 키우면 집안일을 안 할 수가 없다. 집안에서 해야 할 모든 업무가 가사노동이다. 여성의 경제활동을 어떻게 보장하고 책임져야 하는지 사회가 고민해야 할 부분을 결국 전부 개인(직장여성)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벨기에나 프랑스 등은 가정 내 소득과 관계없이 여성의 경제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정에 ‘돌봄쿠폰’을 지급한다. 쿠폰으로 정부가 가사노동자 임금의 30~50%를 지원한다. 이런 틀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런 틀이 탄탄하게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가사노동자 보호를 위한 정책만 만들면 결국 여성과 여성, 개인 간의 갈등이 되고, 국가는 바깥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가기 위해 베이비시터에게 몇 주가량 쉬라고 했다고 고용주를 부당해고로 처벌받게 할 수 있을까. ‘집에서 아이랑 있을 테니까 오늘은 쉬시고, 내일 나오세요’라고 하는 경우까지 근로기준법이 어떻게 다 규정할 수 있겠나. 반대로 가사노동자가 ‘오늘은 몸이 아파서 쉴게요’ 하면 처벌할 수 있나. 때문에 20대 국회에서도 개인 간에 발생한 거래(고용계약)는 법으로 규율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법안을 만들었다. 대신 가사노동자를 고용하는 업체를 육성해 이용자는 업체에 책임을 묻고, 노동자도 업체 안에서 4대 보험 가입 등의 보호를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아직 20대 국회가 남아 질문이 적절하진 않지만 21대 국회에도 법안 발의 작업을 할 계획인가.

“나는 이제 못 하겠다(웃음). 2008년부터 싸워왔던 활동가들의 동력도 많이 약해졌다. 게다가 현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조차 전부 남성노동 영역만 다루고 있다. 음식배달·대리운전·퀵서비스 기사 등의 문제는 다뤄도 가사노동은 다루지 않는다. 남성노동에 밀린다. 여성노동이 2019년 현재 어떤 위치인지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다. 올해 초 고용노동부 담당과에 법이 통과되지 못하더라도 법 없이도 가능한 직업훈련 문제부터라도 해보자고 제안했더니 ‘그건 다른 부서의 업무’라며 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여성친화적 정부라는 이 정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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