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정직한 영화 ‘작은 연못’

2010.04.12 18:15
김규항 칼럼니스트

[시론]정직한 영화 ‘작은 연못’

양식 있는 부모들은 대개 아이가 무기 장난감을 갖고 노는 걸 싫어한다. 아이에게 폭력성이 길러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성은 폭력적인 물건을 갖고 놀거나 익숙해져서 생기는 게 아니라 남보다 더 가지려는 욕심에서 생겨난다. 총을 잘 다루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더 가지려는 사람이 총을 사용하는 것이다.

전쟁은 인간 폭력성의 가장 대대적인 형태다. 전쟁은 더 가지려는 한 줌 지배세력의 욕심이 국경마저 넘어서는 현상이다. 물론 지배세력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전쟁을 치르진 않는다. 그 나라의 보통 사람들(서민대중, 민중, 인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애국심, 조국 수호, 자유 수호 따위 달콤한 말로 꼬드겨서 전쟁을 치르게 한다. 전쟁은 직접 군인으로 동원되는 보통 사람들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까지 죽인다. 20세기에 벌어진 두 번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한국전쟁 등을 되새겨본다면 인류가 정신적으로 진보해왔다는 말은 거짓말임에 틀림없다. 인류는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야만으로 퇴보하고 있으며 단지 그 퇴보를 포장하는 수법만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전쟁으로 생태계의 파괴로 끝없이 펼쳐지는 폭력을 포장하는 수법은 이른바 ‘자유로운 시장’이다.

전쟁은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 존재해야 하는가를 회의하게 한다. 지구의 차원에서 인간은 멸종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문제는 이 탐욕스럽고 영악한 종을 처리할 수 있는 다른 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그나마 나은 인간들이, 인간이 저지른 가공할 악행들을 되새기고 성찰함으로써 그런 악행이 가능한 한 적게 일어나도록 노력하는 것.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은 바로 그런 노력의 예술적 성취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민간인 300여명이 희생된 노근리 사건은 20세기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자유의 수호자’ 미군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라 60년이 되도록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1년 AP통신 기자가 이 사건을 취재해 퓰리처상을 받으면서부터다. 그 소식은 곧 한국 영화인들에게 ‘당신들은 뭐하는 건가?’라는 야유성 질책으로 받아들여졌다. 고 박광정, 문성근, 송강호, 문소리, 강신일, 이대연, 김뢰하, 전혜진, 유해진, 박원상 등의 주류영화계 배우들이 무료 출연으로 연대함으로써 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 제작의 동기와 과정 자체가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거스르는 ‘반폭력 연대’였던 것이다.

극장에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이 사회적 의미를 가진 영화를 우선시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영화 제작의 동기와 과정과 함께 이 영화가 가진 특별한 미덕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 첫번째는 정직함이다. 실재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다. 그러나 그 영화가 그 사건의 실제 인물들에게 지지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극적 가공을 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실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 생존자와 유족들은 이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에게 감사패를 주었다.

“거짓말하지 않는 영화, 카메라 장난을 치지 않는 영화, 그냥 정직하게 찍어서 정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이상우 감독) <작은 연못>은 정직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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