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 회장님, 죽은 동생의 힘을 빌릴 수밖에는···”

2014.07.26 11:33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

40일 전에 발견한 시신이 알고 보니 유병언이란다. DNA까지 들이밀며 믿으라고 하니 믿지 않을 도리는 없다. 일부 누리꾼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무 시신이나 갖다가 유병언의 것이라고 우기는 일은 사실상 어렵다. 시신의 대퇴부에서 얻은 DNA를 유병언의 형과 비교했고, 또 유병언 집무실에서 채취한 DNA와 대조했으니 말이다. 형제가 아닌데 DNA에서 “같은 부모를 뒀다”고 나올 확률은 극히 희박하니까. 물론 시료 바꿔치기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이 정부의 행적으로 보아 그렇게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야 한다. 그래도 뭔가 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조상의 슬기를 오늘에 되살리는 의미로, 이 지면에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이 25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과수 서울분원에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인 감정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ㅣ연합뉴스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이 25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과수 서울분원에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인 감정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ㅣ연합뉴스

첫째, 동생설.

“회장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동생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측근의 말을 듣던 유병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병언에게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동생이 있었다. ‘이 아이는 장차 집안을 말아먹을 것’이란 점쟁이의 예언 때문에 어릴 적 다른 친척집에 입양을 보내버렸는데,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그 동생은 유씨 가족에 대해 엄청난 반감을 갖게 된다. 평생 직업을 갖지 않은 채 성공한 형을 찾아가 수시로 돈을 뜯으며 살던 그는 그간 마신 술 때문에 간경화로 고생하다 6개월 전에 죽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유병언이 쫓기는 몸이 되자 그 동생을 이용할 생각을 한 거였다. 측근은 백골이 다 된 동생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냈고, 유병언의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긴 뒤 스쿠알렌이 든 가방과 함께 매실밭에 놔뒀다. 가방에 소주 두 병을 넣은 것은 평소 술을 좋아한 동생에 대한 예우였다. 왼손은 지문을 모두 없앴고, 오른손에는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것처럼 유병언의 지문을 입혔다. 시신의 DNA가 유병언의 형과 ‘형제관계’로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평소 그가 유병언의 집무실을 자주 드나들었으니 거기서 채취한 DNA와도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시신의 키가 유병언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

2014년 7월22일 사이판. 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이제야 신원 확인이 된 모양이네요. 눈에 잘 띄게 매실밭에 놔뒀는데, 40일이나 걸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옆에 있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이제부터 발 뻗고 잘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왼쪽 두 번째 손가락이 유난히 짧았다.

둘째, 지연설.

“시신이 하나 발견됐는데 아무래도 유병언인 것 같습니다.”

6월12일, 정부 모 기관에 걸려온 전화로 비상이 걸린다. 곧 회의가 소집됐다.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세월호 사고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 구조과정에서 해경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국민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진상규명을 할 의지가 없었던 정부는 유병언을 극적으로 체포하면서 세월호 사건을 종결짓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병언이 6월까지는 잡히면 안됐다. 그때만 해도 세월호 유족들이 사고의 진상규명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었고, 여론은 여전히 유족들에게 동정적이었으니까.

“최소한 한 달 정도는 더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신원 확인을 안 했다고 하고 시신을 냉동고에 넣어둬야 합니다.”

7월, 세월호 사태가 4개월째에 접어들자 확실히 여론의 추이가 변했다. 실종자 숫자는 여간해서 줄어들지 않았다.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헬기가 추락했다. 세월호 특별법을 이용한 언론 플레이는 결정적이었다. “유족들이 의사자로 대우해주고 연금도 달라고 떼를 쓴다”느니 “유족들이 자녀의 특례입학을 요구한다”는 소문을 열심히 퍼뜨렸다. 심지어 심재철 세월호 국정조사특위 위원장도 그런 내용의 글을 퍼 나르는 데 동원됐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들은 시신이 유병언의 것임을 공개했다. 세월호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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