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년 전 건물 ‘조선은행’ 간판 그대로… 중구 ‘수탈 잔재’ 많아

2015.01.26 21:48 입력 2015.01.26 21:50 수정

(4) 인천 조계지

▲ 일본제1은행·일본제58은행… 일 ‘자금줄’, 수탈 전초기지 역할
응봉산 중턱 깎아 영사관 짓고 공병대 동원 홍예문 터널 뚫어

일제는 1883년 조그마한 포구였던 제물포항(인천항)을 강제로 개항시켰다. 초가집 40∼50가구에 불과했던 제물포항에 서구 열강이 몰려들면서 이 일대에는 조계지가 형성됐다. 조계지는 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한 구역이다.

일제는 조계지에 영사관과 은행, 점포, 상회, 우체국, 가옥 등을 짓고 자국민을 통제했다. 일본 화폐를 사용하기 위해 은행을 세웠고, 인천항에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도록 갑문도 만들었다. 인천∼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선과 여주·이천의 쌀을 가져가기 위한 수인선(수원∼인천)도 건설했다. 일제는 인천 조계지를 조선 수탈의 전초기지로 만들었다.

1899년 건립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인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현재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899년 건립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인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현재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인천 조계지는 조선 수탈의 전초기지

인천항 개항 초기 300여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은 1934년 1만2000명으로 늘어났다. 그해 인천 인구는 6만여명이었다. 일본인이 인천 인구의 20%를 차지한 셈이다. 일제는 서울과 가깝다는 것을 활용해 조계지인 인천 중구 신포동 일대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 중턱에는 일본영사관이 있다. 일본영사관은 1883년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위해 가장 먼저 세운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인천을 통치했던 조선총독부 산하 인천부 청사로 사용됐다. 2층 목조 건물인 일본영사관에는 임시청사 부속경찰서가 설치됐다.

1933년 목조 건물을 헐고 지상 2층짜리 벽돌 건물을 지은 인천부청은 50개의 방과 증기 난방시설, 수세식 화장실도 갖췄다. 해방 이후엔 3층으로 증축돼 인천시청으로 사용됐다. 1985년 인천시청이 현재의 남동구 구월동으로 신축·이전하자 인천 중구가 입주해 사용하고 있다. 일본영사관 건물은 등록문화재 249호로 지정됐다.

일제가 1883년 인천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응봉산 중턱에 지은 인천부 청사. 현재는 인천 중구청이 쓰고 있다.

일제가 1883년 인천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응봉산 중턱에 지은 인천부 청사. 현재는 인천 중구청이 쓰고 있다.

일본영사관 앞은 계획된 격자형 도로로 시가지가 조성돼 있었다. 일본영사관 바로 밑으로 일본 은행 3곳(일본제1은행, 일본제58은행, 일본제18은행)이 나란히 자리했다. 르네상스식 1층 석조 건물로 1899년 지어진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현관 중앙 위에는 ‘조선은행(朝鮮銀行)’이란 한자가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일본제1은행은 처음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금과 사금을 매입했다가 이후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개항장에서 해관(세관)이 관세와 수수료를 징수하고, 대한제국 정부에는 어음을 줬다. 이후 규모가 점차 커져 한양에 출장소도 개설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바뀌었고, 1911년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바뀌면서 조선은행 인천지점이 됐다.

해방 이후 한국은행 인천지점과 인천지방법원 등기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인천 중구가 2006년 매입했다. 수탈의 잔재가 남은 대표적인 일본 건축물이다. 중구는 이 건물을 근대 유물과 자료들을 전시하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1층 석조 건물인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인천항 일대와 인천 시가지 전경. 일제는 인천 시가지를 격자형 도로로 조성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인천항 일대와 인천 시가지 전경. 일제는 인천 시가지를 격자형 도로로 조성했다.

■ 일제, 공병대 동원해 터널 뚫고 ‘홍예문’ 설치

은행 이름에 붙은 숫자는 일본의 국립은행 조례에 따라 인가된 허가번호이며, 이는 국가의 통제를 받아 민간업자가 설립한 은행이다. 1890년 건립된 은행 내부에는 화강석 바닥에 철판으로 된 천장, 이중창과 철제 문이 있는 6∼10㎡ 공간의 대형 금고가 있었다. 이 은행은 일본 나가사키 상인들이 설립했다. 이들은 중국 상하이에 수입된 영국 면직물을 다시 수입해 대한제국에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하면서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도 지점을 낸 것이다. 이 은행은 1936년 조선식산은행에 양도될 때까지 47년간 인천에서 금융업무를 봤다.

해방 이후 이 은행 건물은 카페와 중고가구 도매점 등으로 쓰이다 중구가 매입해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 전시관’으로 개관했다. 이곳에는 영국인 사업가 제임스 존스톤 별장,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 주택, 영국·러시아 대사관, 한국 최초의 해관, 외국인 사교클럽인 제물포구락부, 답동성당 등 인천 개항장 내 일본, 청국, 서구 근대 건축물의 모형 및 건축자재 등이 전시돼 있다.

일본 오사카에 본점이 있던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은 대한제국의 주화를 일본 조폐공장에서 주조한 새 주화로 교환하기 위해 설립됐다. 프랑스 건축양식의 2층 벽돌 건물로 마감재로는 석판을 사용했다. 1946년부터 조흥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인천시 요식업조합이 쓰고 있다.

일제가 인천 중구에 있던 조계지를 동구까지 확장하기 위해 만든 홍예문.

일제가 인천 중구에 있던 조계지를 동구까지 확장하기 위해 만든 홍예문.

중구청에서 신포동을 거쳐 자유공원 쪽 500m 거리에는 홍예문이 있다. ‘무지개 모양의 동그란 돌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중구와 동구 만석동을 연결한다. 당시 홍예문 주변에는 경찰서·공회당 등 주요 시설이 많았다. 일제는 조계지가 자국민의 유입으로 포화상태에 이르자 응봉산을 넘어 중구 내동과 동구 만석동까지 확장하려 했다.

하지만 동구까지 가려면 산이 가로막아 해안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공병대를 동원해 터널을 뚫었다. 이 터널을 홍예문이라 불렀다. 홍예문은 폭 4.5m, 높이 13m, 길이 8.9m로 식민지 시대에는 우마차 등이 통행했다.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은 “일제는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 인천항 갑문과 경인선을 건설하고 은행과 정미소 등을 열어 한국 수탈의 관문으로 활용했다”면서 “해방 이후 인천에는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 ‘인천은 왜색이 강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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