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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가난·시련 떨친 ‘성공신화’ CEO형 리더십

2007.12.19 23:05

신화는 계속되는가. ‘샐러리맨 신화’와 ‘청계천 신화’를 만들어온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가 19일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내 경선과 본선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도덕성 시비와 검증 공세를 뚫고 국민의 선택을 받는 데 성공했다. 현대건설 최고경영자에서 대한민국 최고경영자로 변신한 것이다. 가난이 부끄러웠던 야간 상고생,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주도한 대학생, 건설회사 회장, 국회의원 그리고 민선 서울시장을 거쳐온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측근들은 “이명박을 보면 굴곡의 현대사가 보인다”고 말한다.

이명박, 가난·시련 떨친 ‘성공신화’ CEO형 리더십

# 나의 스승은 가난과 어머니

이명박 당선자의 어린 시절 회상에는 항상 ‘가난’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이당선자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씨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3녀 중 다섯째다. 아버지는 경북 포항 흥해읍 덕성리가 고향으로 목장 일을 했고, 어머니는 지금은 대구로 편입된 반야월 출신이다. 이당선자 가족은 3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해방이 된 45년 포항으로 돌아왔다. 이당선자가 네살 때다.

이당선자의 족보상 이름은 상정(相定). 형제들 모두 상(相)자 돌림이다. 본인만 명박으로 지은 이유에 대해 그는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시고는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었다”고 설명한다. 출생지가 일본이고 한자가 ‘아키히로(明博)’라는 일본 이름과 같아 ‘형들과 배가 다르다’는 등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당선자는 이런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DNA 검사까지 받았다.

이당선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밀가루떡을 팔러 다녔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어머니의 풀빵장사를 돕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다”고 술회한다. 이당선자의 어머니는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집안의 희망이었던 둘째 형 상득(현 국회 부의장)의 뒷바라지를 위해 이당선자의 고교 진학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부를 택했다.

포항중과 동지상고 동기인 김창대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명박이가 늘 들고 다니던 단어장이 떠오른다. 영어 단어와 숙어 사전을 가지고 다녔는데, 궂은 날 장사를 하면서도 볼 수 있도록 표지를 비닐로 두껍게 입혀 놓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명박 당선자의 포항 동지상고 시절 생활기록부

이명박 당선자의 포항 동지상고 시절 생활기록부

동지상고 1년 선배인 이무진씨는 “명박이는 이른 새벽부터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수레에 야채를 싣고 포항의 골목골목을 배회하며 야채를 팔았다. 남다른 성실함은 한 학년 위인 우리 반에도 유명했다”고 전했다.

이당선자의 가족은 형 상득의 뒷바라지를 위해 상경했고 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기말시험만 치르고 서울로 왔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중고 수험서를 사서 공부한 끝에 61년 고려대 상대에 붙었다.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학비를 마련하며 대학을 다녔다.

이당선자는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뽑혔고 4학년 때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했다. 때문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면회 온 어머니가 “나는 네가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다. 소신대로 행동하거라”고 했다고 한다. 이당선자는 이 말을 지금도 강연에서 자주 인용한다. 이당선자의 어머니는 그가 석방된 지 한달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당선자의 회고록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사석에서도 어머니를 이야기할 때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우가 잦다. 이후보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도 어머니의 영향이다. 이후보가 군대에 갔다가 군의관으로부터 “군대가 병든 사람 치료하는 곳인 줄 아느냐”는 소리를 듣고 쫓겨났을 때는 “내 자식이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한 내가 잘못”이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이당선자는 회고한다.

<b>故 정주영 회장과 ‘망중한’</b>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왼쪽)가 현대건설 사장 시절 정주영 회장과 윷놀이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故 정주영 회장과 ‘망중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왼쪽)가 현대건설 사장 시절 정주영 회장과 윷놀이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샐러리맨의 신화

‘이명박’이란 이름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현대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다. 학생운동 경력으로 중앙정보부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그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된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박대통령을 수신인으로 한 편지에서 “전력을 밝히고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충정을 토로한 뒤, 사회의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높게 비판했다”고 술회한다. 당시 현대건설은 직원 96명의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명문대 출신이 지원한 데 대해 당시 정주영 사장이 놀라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면접에서 “건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후문이다.

이당선자는 입사 1년차 때 태국의 파타니와 말레이시아 국경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 공사 당시 폭도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금고를 지킨 일화로 회사 내에서 좋은 평판을 얻게 된다.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2년 만에 대리가 되고 29세에 이사가 된다. 사장에 오른 것은 35세. 입사 12년 만이었다.

이명박, 가난·시련 떨친 ‘성공신화’ CEO형 리더십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할 때의 일화도 유명하다. 이당선자는 서빙고의 중장비 수리공장 옆에 있던 골재 생산업체가 청와대의 주문을 이유로 분진방지 시설을 납품해주지 않자 한밤중에 불도저를 끌고가 트럭이 드나드는 이 회사 진입로를 깊숙이 파버렸다. 청와대와 경찰의 원상복구 압력에도 하루를 버텨 결국 방진시설 설치 약속을 받아냈다. 이때부터 정주영 사장은 현장에 무슨 일이 생기면 으레 “이명박이한테 전화걸어”라고 하게 됐다고 한다.

이당선자는 70년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김윤옥씨를 만나 혼인했다. 중매는 이당선자의 동지상고 은사와 경북고 동창인 김씨 오빠가 섰다. 동창회에서 ‘잘 나가는 제자’와 ‘참한 여동생’을 서로 자랑하다 인연이 이어졌다고 한다. 부인 김윤옥씨는 “부모님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정 큰오빠가 주위의 도움 없이 혼자서 현대건설 이사까지 된 사람이라며 부모님을 적극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당선자가) 결혼식 날에도 토요일이라 오전 근무를 하고 나올 정도였다”고도 했다.

이당선자는 현대건설 입사 23년 만인 88년 회장이 된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이란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셈이다. 고향 친구 김창대씨는 “현대건설 사장에 취임한 후 명박이와 단둘이 저녁을 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명박이는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고속 승진의 비결에 대해 이당선자는 “공휴일도 없이 하루에 18시간 넘게 일했으니 남들보다 두배는 일한 셈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24년 만에 사장이 된 것이고 남들보다 빠르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또 “나는 기업주의 목표보다 훨씬 높은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정주영 회장 앞에서 내놓은 사업의 목표는 늘 정회장의 기대치를 한두 걸음 앞섰다”고 했다.

‘CEO 이명박’은 그늘도 남겼다. 현대건설 회장 시절이던 90년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현대건설의 1000억원 탈세 의혹이 제기됐다. 또 96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서도 이름이 거론됐다. 88년에는 현대건설 노조 설립을 방해한 혐의로 약식기소됐다. 경쟁과 효율, 실적 위주의 ‘CEO형 리더십’이 갖는 강점이 국가지도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될지 회의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이명박, 가난·시련 떨친 ‘성공신화’ CEO형 리더십

# 여의도로 간 기업인
92년 이당선자는 현대 생활을 마무리하고 정치인의 길을 택했다. 앞서 정치에 뛰어든 정주영 회장의 동참 제안은 거절했다. 대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대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우리 당 전국구에 전문경영인이 한 사람도 없다. 이회장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14대 의원으로 여의도에 진출한 그는 “고르바초프라는 한 인물로 인해 세계에 생긴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도 뭔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말로 출사표를 던졌다. 이당선자는 당시 개혁성향 의원으로 분류됐다. 행정경제위원회 소속으로 국정감사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해 관료들로부터 “여당 의원인지 야당 의원인지 잘 모르겠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재벌의 소유집중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대기업 소유집중 완화 특별위원회’ 설치를 제안하고, 정부의 북한 수해에 대한 미온적 태도도 추궁했다. 그는 95년 지방선거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쟁을 벌였다. “경선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주장해 경선을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패했다.

재산 문제는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92년 8월에는 사무실을 허가 용도와 다르게 사용해 약식기소됐다. 93년에는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강남구 논현동의 200여평 주택을 99평으로 신고하는 등 부실신고로 당의 비공개 경고를 받았다. 그해 9월 재산공개에서는 6개월 전의 62억원에 비해 4배 이상 늘어난 274억원을 신고했다.

이당선자는 96년 총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물리치고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당선됐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가 누구인지 논의될 때 그 중 한 사람으로 포함되고 싶다”며 대권 도전의 뜻을 분명히 했다. 같은 해 7월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미국 LA 간의 해상운송비보다 높다”고 지적하며 500㎞ 길이의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했다. 지금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의 출발점인 셈이다.

그러나 이후엔 가시밭길이었다. 선거비용 초과지출 혐의로 법정에 서야 했고, 법정 싸움 도중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결국 선거법 위반과 범인도피 혐의로 700만원의 벌금형이 확정되자 서울시장 도전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2000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당선자는 BBK 대표이사였던 김경준과 함께 LKe뱅크를 설립했다. 이번 대선 기간 내내 그를 끈질기게 괴롭힌 BBK 사건의 시발점이다. 이당선자가 ▲BBK 실소유주인지 ▲김경준씨가 주도한 주가조작에 연루됐는지 여부는 최대 대선 쟁점이 됐다. 대선을 사흘 앞두고 터져나온 ‘BBK 설립 발언’ 동영상은 ‘이명박 특검법’ 통과의 단초가 됐다. 그는 당선자 신분으로 특검 수사를 받게 될 처지다.

이당선자는 2002년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선되며 대권 도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경제활성화를 통해 살기 좋은 서울을 만들라는 준엄한 명령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b>청계천 새물맞이 행사</b>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부부가 서울시장 재직 시절인 2005년 10월1일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서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나란히 서서 박수 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부부가 서울시장 재직 시절인 2005년 10월1일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서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나란히 서서 박수 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다시 뚫은 청계천 물길
취임 즉시 청계천 복원에 착수했다.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를 철거하고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 물길을 열었다. 이후 청계천은 이당선자의 리더십과 실천력을 증명하는 ‘핵심 소재’가 되고 있다. 2004년 7월부터 시작된 대중교통체계 개편 과정도 이당선자 특유의 ‘돌파력’을 보여준다. 버스전용차로 도입 초기 시민들의 극심한 반대와 언론의 교통대란 지적에 담당 공무원들조차 흔들릴 때 그는 “시간이 지나보면 내 말이 맞다는 게 증명될 것”이라며 밀어붙였다.

그는 서울대공원의 근무인원을 관람객이 많은 주말과 휴일에 더 늘리고, 미술관 등의 관람시간도 직장인 퇴근시간 이후로 연장했다. 이 과정에서 “평일 관람시간을 늘리고, 주말 개장을 하라”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저녁에 박물관 좀 구경합시다. 주말에 가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돌려서 신호를 보냈고, 공무원들이 알아서 그 뜻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이당선자의 형 이상득 국회 부의장이 “부의장이 출마하면 밀어주겠다”는 한 지인의 말에 “물론 나도 일찍부터 기업을 경영했고, 국회의원을 더 오래 했다. 그러나 위기상황에서 담대하게 결단하고 과감하게 추진하는 힘은 동생을 따라갈 수가 없다”며 이당선자 지지를 부탁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2006년 6월 30일 서울시장을 퇴임하던 날 이당선자는 “일하는 게 바로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의 뒤편에선 개인적 구설수도 끊이지 않았다. 서울시 주최 행사에 아들과 사위를 불러 히딩크 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과 기념촬영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른바 ‘서울 봉헌’ 발언으로 ‘기독교 편향’이란 비판에 오르기도 했다.

이당선자는 시장 퇴임 후 곧바로 ‘안국포럼’이란 캠프를 차리고 대선 준비에 들어갔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지난해 10월을 기점으로 그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이당선자는 이후 ‘경제 대통령’이라는 화두를 앞세워 대선 레이스 내내 1위를 지켰다. 검증 공세가 거세질 때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변양균·신정아 스캔들, 삼성 비자금 폭로가 터지는 등 ‘운’도 따랐다. 이제 ‘대한민국 CEO’로 선택받은 그는 국민들에게 겸허하고 성실한 태도로 답해야 한다. 능력과 추진력은 물론, 도덕적 지도력 측면에서도.

〈박영환기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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