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2010.05.03 18:14 입력 2010.05.03 23:06 수정
와다 하루키 |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 칼럼]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지난 3월26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린 안중근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한국병합 100년을 맞은 일본의 상황을 전하며, 시간은 걸리겠지만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주인공으로 한 같은 내용의 TV 드라마를 한국과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역사문제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심포지엄에서 필자는 NHK 방송의 한국병합 100년 특집 프로그램 <일본과 조선반도>가 4월부터 시작된다는 점도 설명했다. 첫회인 ‘한국병합에의 길-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지난달 18일 방영됐다. 난해한 주제에 대한 NHK의 대범한 도전이자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방송이었다.

한국병합 100년의 해를 앞둔 2009년, 일본에서는 한·일 간 역사를 되짚어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가장 큰 움직임은 NHK가 그해 4월부터 특별 시리즈 <일본과 조선 2000년>을 매월 한 편씩 방영한 일이다. 고대부터의 한·일 관계를 검토해 역사를 진지하게 다시 돌아보자는 취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과 통신사 등의 얘기를 다룬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 시리즈는 그해 ‘예술선장(選奬)’에서 방송부문 문부과학대신상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 사후 100년이 되는지라 당연히 안중근을 평가하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월간 ‘세카이(世界)’는 지난해 10월호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게재한 데 이어 올해 2월호에는 사사가와 노리가쓰 메이지대 교수의 논문 <안중근의 저항정신과 평화론>을, 4월호에는 김영호 유한대 총장의 논문 <안중근 동양평화론의 재조명>을 실었다.

NHK의 대범한 한국병합 특집

그러나 학계는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 이토 유키오 교토대 교수, 이성환 계명대 교수의 공동 논문집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 통치>가 ‘이토 히로부미 사후 100년 기념 출판’이라는 문패를 내걸고 지난해 6월 출간됐다. 이토 교수는 이토 히로부미가 처음에는 한국병합을 생각하지 않았고 보호국인 한국의 발전을 지향했다고 강조했다. 이토 교수는 이어 지난해 11월에 평전 <이토 히로부미, 근대 일본을 만든 남자>를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질서 있는 근대화를 원했다. 그러나 다른 문화 간 이해가 충돌해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통치는 한국 수탈·병합의 첫걸음으로 비쳐 한국인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이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암살했다 하더라도 안중근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학계 내에서도 이토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잖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된 NHK의 <한국병합의 길-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이 어떠한 내용으로 짜여졌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 방송에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토 히로부미뿐 아니라 안중근의 사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의 사진은 13차례나 나온다. 눈은 정확하게 이쪽을 향해 있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일본인들이 이 정도로 안중근의 강한 시선을 받은 적은 없다. 이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이자 성공한 점이다. 덧붙여 고종 황제의 사진도 6차례 이상 등장했다. 일본인이 처음으로 고종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게끔 했다고 볼 수 있다.

방송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경복궁 무력 점령이 그 시발점이라고 언급한다. 러일전쟁 때 한국이 국외중립을 선언한 사실을 명확히 짚었다. 일본이 이를 무시해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됐다는 것이다. 이어 포츠머스 강화조약 후 이토 히로부미가 대사 신분으로 서울에 와서 고종을 위협해 각의에 출석, 제2차 한일협약을 강행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와 관련한 미국 공사의 다음과 같은 평가도 소개했다. “각료들에게 폭력이 행사됐다고는 보지 않으나 그들이 자유의지로 행동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언급은 이토 교수의 이토 히로부미 평전에는 없다.

나아가 방송은 고종이 각국에 보내려고 쓴 친서도 공개했다. 당시 고종은 협약 체결은 무력 위협에 의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방송은 또 러시아가 헤이그 평화회의 초대장을 한국에 보냈으나, 회의가 임박하자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의식해 한국 측 대표를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방송에서는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이토 교수 등의 주장도 다뤘다. 이토 교수는 이토 히로부미가 전국 팔도에서 의원 10명씩을 선출해 중의원을 조직하고 한국인이 대신을 맡는 ‘자치 인정’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또 ‘한국의 근대화’를 꾀해 한국을 ‘세계의 문명국’으로 만들고자 했고 이를 위해 은혜를 받은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통치에 협력하길 원했다고 했다.

그러나 방송은 한국인과 안중근의 대항논리를 올바르게 적시했다. 방송은 이토 히로부미의 차관안에 반발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안중근은 평양 지부에서 활동했다고 전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불쾌감을 드러낸 사실도 확인했다. 민족주의가 고양되고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학교가 설립되고, 언론도 바쁘게 움직인다. 이토 히로부미는 언론의 칼끝이 점점 자신에게 향하자 “이토의 백 마디보다 신문의 한 마디”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방송은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과 한국인의 지향점은 본질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토 교수는 방송에서 “역시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이토 히로부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고 했다. 이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한 정책은 한국인의 반발심만 샀다. 이토 교수는 “메이지유신 때 추진한 일은 같은 민족과 한 것이었으나, 이를 다른 민족과 하게 되면 반발이 커진다는 사실을 이토 히로부미는 몰랐다. 한국인은 입으로는 일본을 따른다고 말해도 속으로는 일본이 한국을 수탈,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구상은 그렇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는 혼란만 부추기는, 지나친 이토 히로부미 옹호론이다.

한·일관계 절대적 모순의 상징

그러나 안중근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이토 교수의 이런 주장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안중근은 단지동맹을 결성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결단한다. 방송은 “일본의 병합을 저지해 독립을 지키려고 한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자신은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개인적 원한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가 목적이었고 모든 국가가 자주독립할 수 있는 게 평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송이 마지막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거론하고 “할아버지가 원한 것은 강자와 약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조화로운 세계”라는 안중근 손자의 말을 인용한 건 적절했다. 방송을 보고 나자 일본인은 더 이상 안중근을 비판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근대 일본을 만든 정치가이지, 비열한 무뢰한은 아니다. 일본을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게 한 것은 그의 공적이다. 그러나 그는 이웃국가를 확보, 지배하려 한 죄인이다. 그는 한국을 일본의 감독하에 놓고 일본식으로 근대화시켜 일본에 봉사하게 하는 것이 한국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런 노선을 걸을수록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일본 종속에 대한 거부감은 커져만 갔다. 이토 히로부미의 논리를 아는 것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다. 병합과 그후 이어진 식민지시대의 절대적인 모순 관계에서 맺어진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은 그 절대적 모순을 상징하는 존재다. 이번 NHK 방송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설명에 오류와 부정확성이 있었지만 그 절대적 모순의 존재를 보여준 데는 성공했다고 본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제작이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정리 | 고영득 기자 ydko@kyunghyang.com>

<와다 하루키 | 도쿄대 명예교수>


 三月二六日、国立大邱博物館で開かれた安重根シンポジュウムに参加した。そのとき、私は、併合一〇〇年を迎えた日本の状況を説明し、伊藤博文と安重根の二人を主人公にした同じテレビドラマを日本と韓国でみるというような日がくるまでには、なおすくなくない歳月がかかるだろう、しかし、いつかはそういう時が来るのを望みたいと話した。その時が来たら、われわれは歴史問題を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たのだと言えるのだろう。
 そのとき、私はNHKの韓国併合一〇〇年の企画が四月からはじまることを承知していて、話の中で紹介もしたのであった。実際、その番組「日本と朝鮮半島」の第一回、「韓国併合への道」がそのものズバリ、「伊藤博文と安重根」という副題をつけて、四月一八日夜九時から放映されたのである。これは、きわめて難しい主題に対するNHKのチームの大胆な挑戦であり、われわれを驚かせるに十分であった。
 韓国併合100年の年を目前にして2009年、日本では日本と韓国の歴史をふりかえり、考え直す動きが起こっていた。最大の動きは、当のNHKがその年4月から特別番組シリーズ「日本と朝鮮2000年」を毎月1回放映したことである。古代から日朝関係を検討し、歴史を真剣に見直そうという番組である。豊臣秀吉の侵略を取り上げた11月の第8回と刷還使と通信使を取り上げた12月の第9回がとくべつ印象的であった。第1回から9回までの番組は2009年度の芸術選奨で放送部門の文部科学大臣賞を受賞した。
 当然ながら安重根の行動、伊藤博文の死から100年だということで、安重根についてある程度とりあげられた。雑誌『世界』は10月号に安重根の「東洋平和論」を掲載し、今年に入って2月号には笹川紀勝明治大学教授の論文「安重根の抵抗の精神と平和論」、4月号に金泳鎬学長の論文「安重根『東洋平和論』の再照明」を掲載した。
しかし、学界はむしろ伊藤博文に目を向け、伊藤之雄京都大学教授・李盛煥啓明大学教授の共同編集で論文集『伊藤博文と韓国統治』が六月にミネルヴァ書房から出版された。「伊藤博文没後百年記念出版」と銘打たれている。伊藤氏は、伊藤博文が最初は韓国併合という考えをもたず、保護国のまま、韓国の発展をうながすことを志向していたと強調した。伊藤氏は、つづけて一一月に評伝『伊藤博文――近代日本を創った男』を講談社から公刊した。この本の結びで伊藤之雄氏は「伊藤は、韓国の秩序ある近代化を望んだ。しかし、異文化間の相互理解は困難で、伊藤の韓国統治は、韓国の収奪・併合への一歩として、多くの韓国人から反発・警戒された」と書き、「安重根が伊藤の理想を十分に理解出来ずに、伊藤の暗殺に至ったのだとしても」、「異文化間の相互理解はかなり困難で」あるので、安重根を責めるべきでないと書いている。このような結論は受け入れられない。学界の中には、伊藤説を批判する動きが当然ながら強く存在する。
 そういう状況の中で製作され、放映された番組「韓国併合への道――伊藤博文と安重根」はどのような内容のものになりえたのか、これはくわしく検討するに値する。
 まず指摘したいのは、この番組のはじめから最後まで、伊藤博文の写真とともに安重根の写真がくりかえし示されることである。安重根の写真は実に13回も出てくる。目をはっきりとこちらに向けて、見る人の心をのぞき込むような表情の写真である。日本人がこれほど安重根に凝視されたことはなかったと言える。このことがこの番組のもっとも大きな特徴であり、成功である。ちなみに、この番組には韓国皇帝高宗の写真も6回以上登場した。日本人がはじめて高宗という人物を認識する機会となったということができる。
日本が朝鮮を保護国にするまでの歴史過程の説明は相当によくできている。日清戦争からはじめて、まず日本が景福宮を武力で制圧したことが最初であったと述べられた。日露戦争では、韓国が局外中立を宣言したことがしっかり指摘された。それを無視して、日韓議定書の締結を強いられたことが述べられた。そして、ポーツマス講和のあと、伊藤博文が大使となってソウルに来て、高宗を威嚇し、自ら閣議に出席し、第二次日韓協約を押しつける過程がくわしく説明された。この件についてのアメリカ公使モーガンの次のような評価も紹介された。「閣僚たちに暴力がふるわれたとは思えないが、彼らが自由意志で行動できたとは思えない」。このような説明は伊藤之雄氏の伊藤博文伝にはないものである。
さらに、NHKの番組は、納得しない高宗が各国に送ろうとした親書がコロンビア大学文書館での撮影により示された。高宗は協約締結は武力の威嚇によると訴えていた。列強の態度としては、ロシアがなおハーグ平和会議への招待状を韓国に出したが、のち会議開会の時点では、日本との友好を考え、韓国代表を出席させなかったことが指摘された。保護条約の合法、不法の論争も紹介され、李泰鎮、海野両教授が登場した。
この番組では、統監になった伊藤の政策と行動について、伊藤之雄氏や森山茂徳氏を登場させて語らせ、その主張を事態の説明にも一部取り込んでいる。最近のあたらしい研究によると、伊藤は併合を推進したと言われてきたが、実際に行われた併合と違う、穏健な統治のあり方を視野に入れていたと述べていて、末松子爵家所蔵文書から、韓国八道より各一〇人の議員を選出し、衆議院を組織する、大臣は韓国人とするというような自治を認める構想を伊藤が抱いていたと紹介した。伊藤氏の研究では、併合したあと、ある程度自治を認めるという構想だと説明されているのが、不正確に取り込まれたものである。
伊藤之雄氏は、伊藤統監は、「韓国の近代化」をはかり、韓国を「世界の文明国」にしようと考えた、そのために恩恵をうける韓国人が自発的に自分の統治に協力することをのぞんだと説明した。伊藤の政策意図を説明しようとすることはよいのだが、このような説明では伊藤統監弁護論になってしまう。
しかし、この番組は韓国人側の、安重根側の対抗論理はまっすぐに正確に提示した。伊藤の借款案に対して、国債報償運動がおこったことを説明し、その全国的拡大が示され、その平壌支部で安重根が活動したとされた。伊藤は不快感を示したことが確認された。ナショナリズムの高揚、愛国啓蒙運動の展開の中で、学校の設立、言論の活発化が進む。伊藤は当初は容認するが、言論の矛先が伊藤に向くと、困惑し、「伊藤の百言より、新聞の一言」だと苛立つ。つまり、伊藤の路線と韓国人の志向とが本質的に矛盾をもっていることが示されているのである。ハーグ密使事件にいたり、伊藤は「局面一変の好時機」だとして、高宗退位、第三次日韓協約、軍隊解散に進んでいく。こんどはそれに対して義兵運動が決定的に高まることになる。安重根は義兵に参加するのである。こののちも伊藤は軍隊の出動は求めても、韓国は敵国ではないと、慎重な姿勢をもとめたことが指摘され、皇太子李ウンの日本留学、日本式教育の方針も示されるが、見ている者には、ますます伊藤の方針の行き詰まりが明らかになる。純宗の巡幸の過程での流言や伊藤暗殺のうごきなどがそのことを示している。
ここで、伊藤之雄氏がまた登場して、「やはり韓国人のナショナリズムは伊藤が思っていたよりはるかに強かった」と解説するが、これはまったく説得的でない。伊藤が進めてきた政策そのものが韓国人を反発させるのである。伊藤之雄氏は「伊藤が明治維新でやってきたことは同じ民族の中でやってきたことだったが、それが違う民族でやると、{反発が}ずっと大きかった。それが伊藤の誤算であった。{韓国人は、日本に従うと}口ではうまく言っても、{腹の中では}韓国から収奪し、支配すると{考えていた}。伊藤の構想はそうではなかったのに、それがすなおに理解されない」とコメントした。これは混乱した発言であり、行きすぎた伊藤弁護論である。日本で、この番組をみて、反発した批判的知識人はこのあたりにもっとも強く反応しているのである。
しかし、ここでクラスキノに潜伏していた安重根が行動をおこすのを理解するのに、伊藤之雄氏のこの発言はさまたげにはならない。安重根は断指同盟をつくり、伊藤殺害を決断する。それは「日本の併合を押しとどめ、独立を守ろうとした」行動であったと説明されており、シン・ウンヨン韓国外国語大学講師の説明も明快であった。
安重根が裁判で、自分は義兵の参謀中将として独立戦争をたたかっている、私怨のためではなく、韓国の独立と東洋の平和が目的であった、すべての国が自主独立し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が平和であると述べたことが伝えられている。最後の東洋平和論の引用も的確であった。安重根の孫である米国在住の老人が、祖父が願ったのは強者も弱者もともに生きられる世界、調和のある世界だと解説しているのも、ふさわしかった。そこで、見終わると、日本人は安重根の批判に堪えられないような気分になるのである。
伊藤博文は近代日本をつくった政治家であり、卑劣な無頼漢ではない。日本を富国強兵の道に進ませたのは彼の功績である。だが、その上に、隣国の確保、支配をめざしたところは罪であったのである。韓国を日本の保護監督のもとに置き、日本式に近代化させて、日本の利益に奉仕させることが韓国のためでもあると考え、保護国化の一撃を加えたあとは、できるかぎり合意を調達して、目的を達成しようとしたようだが、伊藤がその道を進めば進むほど、韓国人の民族意識が高まり、日本への従属を拒否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伊藤の論理を知ることはそれを正当化するためではなく、併合とそれにつづく植民地時代においてまさに絶対的な矛盾の関係で結びつく日朝関係をより深く理解するためである。伊藤と安重根はその絶対的矛盾を人格的に象徴している存在であった。このたびのNHKの番組は伊藤の論理の説明に誤りも不正確さもあったが、この絶対的な矛盾の存在を示すことには成功したと思う。むしろ伊藤博文と安重根を主人公にしたドラマをつくり出すことは不可能ではないと私は感じることがで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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