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피고 지길 세 번… 가을이 왔네

2010.09.28 21:39
글·사진 이로사 기자

배롱나무가 감싸 안은 전남 담양 명옥헌

여기는 그러니까, 양반의 별장 되겠다. 요즘으로 치면 고위공무원이나 정치인 누구의 별장 정도 될 텐데, 담 안에 갇힌 그 별장들이 300년 후 ‘평민’에게 이렇게 좋은 휴식처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연을 해치지 않은 채 풍류를 알았다. 17세기 오씨 집안 양반이 숲 속 좋은 자리에 정자를 지어놓고, 그 앞에 연못을 팠다. 주변에 배롱나무와 적송을 심었다. 그리고 때마다 들러 글을 지었다. 비밀의 화원 같은 이곳에서라면 반푼이도 삼류 시인은 하겠다 싶다.

백일홍 피고 지길 세 번… 가을이 왔네

전남 담양 명옥헌에 간 건 배롱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곳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정자와 연못, 적송과 어우러져 비경을 이룬다고 알려져 있다. 백일홍은 끝물이었다. 연못에 피 같은 그림자를 드리운 벌건 광경을 기대했는데, 다소 생기가 없었다. 근처 주민의 말로는 아직 한 번 정도 더 핀단다. 백일홍은 크게 세 번을 피었다 진다고 한다. 열흘만 절정의 자태를 보여주는 ‘화무십일홍’의 정조는 없는 셈이다. 7월부터 10월 초까지 석달 열흘 동안 줄곧 피었다 지기를 반복한다. 명옥헌엔 주로 꽃이 만개하는 8~9월에 객이 많다. 그러나 꽃은 꽃대로, 나뭇결은 결대로 사계절 신묘하니 여느 때고 주저말고 찾아도 좋다.

명옥헌은 인조반정의 주역이었던 오희도(1583~1623)가 살던 집터다. 그의 넷째아들 오이정(1619~1655)이 아버지를 기리며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담양은 정자문화의 진수라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명옥헌은 소쇄원이나 면앙정, 송강정, 독수정, 취가정, 식영정, 환벽당 등에 비해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호젓하게 걷고 쉬기 좋은 곳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배롱나무 이야기부터 짚고 가자.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배롱나무는 짐작대로 백일홍나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백일홍, 백일홍, 배기롱, 배기롱, 배롱, 배롱…하는 단순한 진화다. 이 신비로운 나무는 다른 이름도 많다. 먼저 쌀밥나무.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랐다는 신언종씨의 이야기가 이렇다. “즈 옛날부터 이 백일홍이 세 번을 피었다 지면 쌀밥 먹을 때 됐다…고들 했죠잉.” 가을이 왔다는 신호다. 가장 재미있는 건 ‘간지럼나무’라는 이름이다. 줄기를 긁으면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흔들려서 지어졌다고 한다. 그 밖에 자줏빛 ‘자’자에 장미 ‘미’자를 써서 자미나무라고 부르기도 하고, 붉기가 피같다 해서 피나무라고도 한다.

줄기가 매끈하고 얇은데다 붉은빛을 띠어 여인의 벗은 몸을 연상시킨다거나, 꽃이 너무 붉어 피같아서 집 안뜰에는 심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대로 청렴과 무욕을 상징하기도 한다. 매일 새로 돋아나는 꽃이나 껍질을 모두 벗은 줄기 때문이다. 선비, 스님들이 뜰에 심고 보았다. 강인한 생명력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과 닮았다며 그의 묘역에 이식되기도 했다.

명옥헌 주변엔 20여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다. 정자에 가만히 앉아 몇 시간이고 바라볼 일이다. 이 정자는 자연 속에 녹아들어있다. 명옥헌의 정식명칭은 ‘명옥헌원림’인데, ‘원림’은 정원과 비슷한 말이지만 인공적인 의미가 배제돼 있다. 즉 숲 자체를 그대로 두고, 적절한 곳에 집이나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명옥헌의 설명글을 보면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借景)으로 도입한 정사(亭舍) 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 정원양식’이라고 되어있다. 차경은 말 그대로 자연경치를 경관 구성 재료의 일부로 빌려왔다는 뜻이다.

연못가엔 80년대 황지우 시인이 살면서 집필실로 썼다는 창넓은 토담집이 허물어져 있다. 곁에 번지수 달린 농가도 한 채 있다. 해질녘, 온 가족이 고추를 수확해 오고 있었다. 이들에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나, ‘화엄 연못’(황지우 시 ‘물 빠진 연못’)을 제 것처럼 내다보고 사니 객의 눈엔 부러울 따름이다. 길을 걷다 만난 주민 김모씨는 “어려서부터 허구한 날 보고 사니, 우리는 그 꽃이 언제 피고지는지도 모르구 댕기지” 했다.

■ 배롱나무 예쁜 곳

부산 양정동 800년 된 천연기념물
충북 영동 반야사 ‘쌍배롱나무’

여인의 나신을 닮았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배롱나무에는 속(俗)의 기운이 옅다. 선비들이 모여 사는 집 뜰에, 스님들의 절터에, 조상을 기리는 묘역에 심고 가꿨다. 배롱나무는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내한성이 약해 중부 이남지역에 많다.

배롱나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부산 양정동이다. 양정동의 동래 정씨 시조인 정문도공의 묘원에 국내 최고령의 배롱나무(수령 800년)가 있다. 부산 화지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무덤은 고려 중기에 조성됐다. 무덤 양쪽에 있는 배롱나무는 묘소를 만들 당시 심어져 지금까지 묘를 지키고 있다. 배롱나무 중 유일한 천연기념물이다. 줄기에서 벌써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워낙 오래된 탓에 원줄기는 말라 죽고, 거기서 뻗어나온 가지가 또다른 원줄기처럼 보인다.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충북 영동의 ‘쌍배롱나무’이다.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의 백화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고찰 반야사 경내에 있다. 극락전 앞 삼층석탑 주변에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다. 수령이 500년에 이르는 도 지정 보호수다.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꽂아둔 지팡이가 둘로 쪼개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

남도의 절에서 배롱나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중에도 전북 남원 교룡산성 선국사와 전남 강진군 백련사 배롱나무의 기품이 높다. 선국사 대웅전 왼쪽 앞에 있는 이 나무의 나이는 500년쯤으로 추정된다. 가지가 나무 앞의 7층석탑을 휘감는 듯 아름답다. 백련사 배롱나무는 탁 트인 곳에 있다. 수령 200년의 이 나무는 만경루 앞마당에서 멀리 구강포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배롱나무 군락지로는 경북 안동 병산서원이 유명하다. 조선 중기 문신 유성룡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풍천면 병산서원은 주변이 온통 배롱나무다. 수령 약 400년인 여섯 그루의 보호수를 비롯해 70여 그루가 모여 있다. 꽃이 피는 8~9월엔 서원 전체가 붉게 물든다.

▲ 여행 길잡이

*호남고속도로에서 창평IC로 빠진다. 60번 지방도를 따라 고서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명옥헌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면 후산마을이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명옥헌원림이 나온다. 주소는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번지(061-380-3150). 입장료, 주차료 모두 무료다. 이용시간도 따로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명옥헌 근처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없다. 담양 여객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면 1만원가량 나온다. 단, 명옥헌에서 다시 나올 때 택시를 잡으려면 어려움이 있다.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 택시 투어도 있다. 기사들의 해설을 들으며 여행할 수 있다. 요금은 1시간당 2만원. 택시해설사회 061-382-1379

*담양의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해도 좋다. 명옥헌을 들르는 코스(제4코스)가 있다. 버스는 둘째·넷째 주 일요일 오전 10시 광주역에서 출발한다. 면앙정~죽녹원~명옥헌원림~소쇄원~한국가사문학관~식영정을 지나 광주역으로 다시 돌아온다. 단, 명옥헌에 머무르는 시간은 40분이다. 규모가 크지 않아 둘러보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이곳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겐 아쉬울 수 있다. 담양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tour.damyang.go.kr, 061-380-3151~4)에서 예약을 해야 한다.

*황지우 시인이 살았던 명옥헌 곁의 집은 11월쯤 철거 예정이라니, 궁금한 이들은 그 전에 찾아보기 바란다.

*명옥헌이 있는 곳은 생태마을로 지정된 ‘후산마을’이다. 옛 정취가 살아있는 고가와 최근 들어선 전원주택이 어우러져 있다. 감나무와 배롱나무가 지천이라 길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기 좋다. 명옥헌으로 들어서는 갈림길의 왼쪽으로 가면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600년 이상의 후산리 은행나무가 있다. 조선 인조가 호남지방을 둘러보다 오희도를 찾았을 때 이 나무에 타고 온 말을 맸다고 해 ‘인조대왕 계마행(繫馬杏)’이라 불린다. 후산리 은행나무 오른쪽에는 오희도 생가터가 있다.

*명옥헌은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있어 근처에 숙박업소가 없다. 숙소는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창평면 삼지내 마을의 한옥 민박들이 괜찮다. 이 마을은 슬로시티로 지정돼 있다. 한옥에서(061-382-3832), 매화나무집(010-7130-3002), 삼지천민박(010-2080-1625). 주소는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삼지내 마을의 창평 전통시장 주변에 먹거리 집들이 모여 있다. 장터 안에 있는 원조창평시장국밥(061-383-4424)이 유명하다. 뻘건 다진 양념이 올려져 나오는 돼지국밥이다. 사극에 나오는 장터 주막처럼 바깥에 놓인 작은 평상에 앉아 먹을 수도 있다. 머리고기·내장·선지 국밥 5000원. 한우암소고기집(061-382-7800)의 고기 맛도 괜찮다. 둘이 먹기 적당한 한우모듬구이(600g)가 2만9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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