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서 사람들을 찾는 느린 공간, 커뮤니티 카페 '슬로비'

2011.05.27 19:40 입력 2017.03.09 18:07 수정

사람들이 모여 공간을 이루었다. 커뮤니티 카페 '슬로비'. 사람들로 북적이는 홍대 앞,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5층이다. 촘촘하게 들어선 회갈색 건물들 사이에서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베란다 텃밭의 방울토마토처럼, 카페 슬로비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혼자만으로는 바로 서기 힘든 사람들이 '함께'라는 이름으로 서로 의지하며 자라난다. 자신의 모자람과 서로의 부족함을 환히 꿰뚫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잡을 줄 아는 이들이 모여 있다. 풍족하기를 욕심내지 않고 모두가 하나 되어 굴러감에 행복을 느낀다. 아옹다옹 다투는 일도 잦고, 항상 순조롭지만은 않지만 그 과정 속에서 슬로비의 문화가 싹튼다.

뒤돌아서 사람들을 찾는 느린 공간, 커뮤니티 카페 '슬로비'

카페 슬로비는 2011년 4월 18일 문을 연, 사회적 기업 오가니제이션 요리가 만든 두 번째 외식 현장이다. 이제는 엄연한 홍대 앞 맛집으로 자리 잡은 다문화레스토랑 ‘오요리’에 이어 '요리, 사람, 문화'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가지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카페 슬로비는 사람이 성장하는 공간, 인간적인 연대와 상생이 실현되는 공간을 목표로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부대끼고 소통하는 가운데 슬로비의 문화가 생성된다.

슬로비는 오가니제이션 요리에서 다년간 훈련받은 러시아에서 온 알료나(32세)씨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리니(44세)씨가 각각 전문 바리스타와 다국적 요리사로서 본격적으로 데뷔하는 무대이다. 정신지체 3급 장애인인 나비(31, 가명) 씨도 오트밀쿠키와 쨈쿠키 등을 선보인다. 또 오가니제이션 요리가 교육하고 있는 취약계층 청소년 요리교육과정인 ‘영셰프’들의 인턴십 현장이자 자립의 현장이 될 예정이다. 슬로비를 찾는 손님들 또한 함께 슬로비를 이룬다. 슬로비의 문화에 공감하고 따르는 '팬'들을 중심으로 안전하고 바람직한 식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뒤돌아서 사람들을 찾는 느린 공간, 커뮤니티 카페 '슬로비'

카페? 술집? 밥집? 정체가 뭐야

카페 슬로비에서는 무엇이든 허용된다. 단 밥 냄새가 솔솔 풍기는 푸짐한 밥상이 올라오는 밥집이 되었다가,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는 베이커리가 되었다가, 거나하게 취하고 깔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술집이 되기도 한다. 따뜻한 집 밥이 그리운 자취생들과 도시인들을 위한 '그때그때 밥상'과 '신선 채소밥'이 카페 슬로비의 대표 메뉴이다. 현미밥과 국, 신선한 샐러드와 더불어 맛깔스러운 3찬으로 구성된 밥상은 보기만 해도 풍성하다. 바리스타 알료나 씨가 직접 내리는 커피와 베이킹 담당 나비 씨가 구워내는 쿠키도 언제든 맛볼 수 있다. 밤이 되면 몸에 좋은 우리 술 막걸리와 두부숙회, 채소모듬튀김세트 등 침이 꼴깍 넘어가는 안주류를 선보인다.

"카페 슬로비는 외식업의 고정관념을 깬 별난 공간이에요. 밥집이 되기도 하고, 카페도 되고, 술집이 될 수도 있어요. 우리는 그 실험을 꼭 성공시키고 싶어요. 한 길만 정답이 아니라 여럿이 모두 정답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요." 카페 슬로비 한영미 대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서로 다름이 허용되어야 다양한 본연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강점을 살릴 기회가 더 많아진다.

슬로비의 건강한 식문화

‘그때그때밥상’은 이천 율면 유기농마을인 ‘콩세알나눔마을’의 권순호 농부가 재배한 잎채류와 지리산 밑자락에서 상추장사로 성공한 20대 젊은 CEO 김가영 대표의 또 다른 농산물 유통회사인 ‘생생농업유통’에서 충남 예산의 싱싱한 채소류를 직접 받아 요리한다. 그뿐 아니라 사회적기업 ‘콩새미’의 약선된장으로 시골할머니 손맛이 느껴지는 된장국을 끓인다. 그 밖에도 경남 거창의 유정란, 강화콩세알의 유기농 콩으로 만든 콩세알두부, 순창 전통민속고추장영농조합의 동지섣달 전통찹쌀고추장을 사용한다. "얼굴 아는 농부가 수확하는 재료로 건강하고 정직한 밥상을 차리자는 의도에요." 한 씨는 말했다. 사실 유통경로가 안정적이지 않은 영세기업의 특성상 100% 유기농 식재료를 이용하기는 어렵다. 때에 따라 허겁지겁 주변 농협에 뛰어가 모자란 식재료를 충당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현재의 불편한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다. 다양한 식재료 조달 창구를 마련해 차차 안정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뒤돌아서 사람들을 찾는 느린 공간, 커뮤니티 카페 '슬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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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 슬로비는 재료를 이해하고 정직하고 건강한 식문화를 확산시키기를 꿈꾼다. 매월 첫째 주 월요일은 카페 슬로비의 정기 휴일이다. 가게 문을 닫고 경기도 이천으로 농사를 지으러 간다. 그곳에서 슬로비는 하루 동안 권순호 농부를 도와 농사를 짓고 함께 밥을 지어 먹는다. 간단한 농사 체험에 그치지 않고 농촌의 사람을 만나 정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천의 농부들도 정기적으로 도시의 슬로비를 방문한다. 허공에 뜬 '도농연계'가 아니라 정기적인 '만남'을 기획함으로써 새로운 문화가 시작될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매달 첫째 주 월요일 농사짓기는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모두 참여할 수 있다.

또 가게 안쪽에는 부엌이 딸린 워크룸에서는 7월부터 슬로비의 식문화 교실 '세계의 식탁'이 열릴 예정이다. '세계의 식탁'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가정 요리를 소개하는 강의이다. 대단하고 화려한 그럴싸한 요리보다는 생활 속에서 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요리를 선보인다. 러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스페인, 콩고 등 세계 8개국 이상의 생활요리들을 주제별, 시즌별로 만나 볼 수 있다. 앞으로 이 워크룸에서 소개될 음식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껏 기대해 볼만하다. 이외에도 다양한 이벤트 등을 기획해 슬로비의 식문화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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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슬로비들

하지만 살인적인 임대료와 권리금을 감당하면서 도시에서 느긋하고 훌륭하게 사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카페 슬로비는 5층 꼭대기 층에 자리 잡았다. 덕분에 발 아래로 홍대 거리가 속속들이 보인다. 번잡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다가도 눈을 돌리면 어느덧 손가락 세 마디만큼 훌쩍 자란, 텃밭의 오이, 상추, 겨자채들이 눈에 들어온다. 옥상으로 올라온 덕분에 도시농업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모자란 자본으로 속을 태우기 보다는 색다른 발상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가게 안에는 제각기 모양이 다른 가구들이 원래 맞춤이었던 양 정돈되어 있다. 황학동 중고가구점 5군데에서 따로따로 온 의자와 테이블들이다. 비싸고 세련된 새 가구가 보기에는 좋겠지만, 필요이상의 돈을 지불하고 환경을 해치면서까지 공간을 으리으리하게 꾸미고 싶지는 않았다. 보통 가구에 드는 비용의 1/3밖에 들지 않았다. 대신 사람에 투자했다. 슬로비의 머그컵과 커피 잔 하나하나에는 슬로비의 철학이 담겨 있다. 슬로비는 이주여성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에코팜므'에 따로 식기를 주문 의뢰했다. 시중에서 대량으로 싼값에 식기를 구매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요리를 담아내는 식기를 아무 것이나 쓰고 싶지는 않았다. 또 이주여성들의 작품이 손님들의 눈에 띌 기회를 얻고 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길 원했다.

뒤돌아서 사람들을 찾는 느린 공간, 커뮤니티 카페 '슬로비'

뒤돌아서 사람들을 찾는 느린 공간, 커뮤니티 카페 '슬로비'

이런 슬로비의 정신은 가게 곳곳에서 드러난다. 57평의 크지 않은 공간을 쪼개 다른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카페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에코샵에는 다른 사회적 기업의 제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천연비누 전문 회사 '셈크레프트', 슬로비의 식기를 만든 이주여성 예술활동 지원 기업 '에코팜므'의 제품 외에도 ‘에코준’의 옥수수 전분 컵, '대지를 위한 바느질'의 친환경 소재 생활용품, '에코걸'의 면생리대, '터치포굿'의 재활용 디자인 상품들이 입점해 있다. 가게 한 편을 식물에게 양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홀 중앙, 목 좋은 곳에 위치한 텃밭에는 오이, 상추, 치커리 등이 자라나고 있다. 베란다에도 좁은 공간 틈새 틈새를 예쁜 명찰이 붙은 채소들이 촘촘한 나무 화단들이 메우고 있다. 모종부터 심어 제법 자란 겨자채는 벌써 손님상에 올라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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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슬로비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멀리서 봐도 단연 눈에 띄는 간판 때문이다. 더벅머리 아이가 반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슬로비의 로고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카페슬로비의 로고는 디자이너 임경섭 씨가 디자인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초원을 달리다가도 중간에 잠시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너무 서둘러서 혹시 내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함께 달리던 동료가 뒤처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슬로비의 로고에는, 도시 속에서 정신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다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함께하는 이들을 돌아보도록 한 번쯤 쉬어가자는 권유가 담겨있다. '슬로비(Slobbie)'는 천천히 일하지만 자기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slower but better working people)을 일컫는 신조어다. Slobbie의 본 의미 외에도 카페 슬로비는 급하지 않게 천천히 존재한다는 'Slow be', 천천히 내리는 비로 우리 인생도 스르르 젖어간다는 '슬로 비'를 추구한다. 조바심내고 서두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슬로비는 요리와 사람, 문화가 공존, 공생, 그리고 성장하는 공간이에요. 이곳이 다양한 이야기와 다양한 문화가 소통하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163-9 5층.

이상은/인터넷 경향신문 대학생 기자 (웹場 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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