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흑인 시각서 서구 문명 위선을 질타하다

2011.07.29 21:08 입력 2011.07.29 21:52 수정

▲ 에메 세제르 선집…에메 세제르 | 그린비

에메 세제르(1913~2008)를 말할 때 프란츠 파농(1925~1961)을 빼놓을 수 없다. 세제르는 한국에서 파농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흑인해방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 출신인 그는 파농의 동향 선배였다. 이 섬에서 ‘백인’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인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 쇨세르 중등학교에서 파농을 가르쳤다. 파농은 스승인 세제르에게 급진 사상인 네그리튀드(Negritude·검둥이라는 뜻의 negre와 상태·성질이란 뜻의 ‘itude’의 합성어로 아프리카 흑인문명의 유산·정신을 일깨우고 흑인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의 세례를 받았다.

[책과 삶]흑인 시각서 서구 문명 위선을 질타하다

세제르는 파농에서부터 가야트리 스피박에 이르는 현대 탈식민주의 담론의 사상적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에메 세제르 선집>은 왜 그가 탈식민주의 사상과 운동의 거장인지를 보여주는 책들이다. 이중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1955)은 탈식민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책 중 하나다. 흑인과 아프리카 문명의 시각에서 서구 문명을 격렬히 비판한 고발문이자, 계급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대안으로 역설한 선언문이다.

세제르는 60쪽 남짓한 책에서 서구 문명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아프리카를 지배한 유럽은 이성이나 양식이라는 잣대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는 대상으로 규정한다. 두번의 세계대전과 참화로 유럽 내에서조차 유럽이 다른 문명, 인종에 대한 우월감의 근거로 내세웠던 이성과 합리성, 인본주의에 대한 극도의 회의가 제기되던 때다. 세제르는 종전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은 인종차별과 테러, 아프리카 강제노동의 현실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히틀러’를 목도한다.

세제르의 주된 비판 대상은 기독교다. 그는 “기독교는 문명이고, 이교도는 야만이라는 부정한 방정식을 성립시킨 기독교. 그 때문에 타락한 식민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인도인들, 황인종들 그리고 흑인들에게로 돌아왔다”고 했다. 잉카 문명도, 멕시코 문명의 그 누구도 ‘우월한 질서’의 담지자를 천명한 적이 없다는 점을 거론하며, 서구 문명의 위선도 지적한다. 아울러 프랑스 사상가들과 인종주의 문제도 비판한다. 한 예로, ‘이상주의적인’ 철학자로 불리던 에르네스트 르낭은 어떤가. “우등한 인종에 의한 열등한 혹은 타락한 인종의 재탄생은 인본주의적 질서의 섭리”라며 인종주의를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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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강한 반론을 세자르의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식민주의자들은 내게 통계학을, 몇 마일에 이르는 신작로를, 운하를 그리고 철로를 들이민다. 식민주의자들은 수천t에 이르는 면화나 코코아 수출로, 수만 에이커의 농장을 수놓은 올리브나무나 포도덩굴로 나를 현혹한다.” 이런 ‘아프리카 근대화론’에 대해 세제르는 “식민주의는 복음화, 박애주의 사업, 무지와 질병과 폭군을 물리치고자 하는 욕망, 신의 영광을 위한 기획 그리고 법치 확장을 위한 시도와 무관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장들과 산업에 대해 너무 기대하지 말라. 그 엄청난 공장들이 우리네 산림의 심장을 향해, 우리네 밀림의 심장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뱉어 내는 검은 재가 보이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네그리튀드의 견지에서 제국주의 파괴 이전 아프리카 전통사회를 형제애에 기초한 협동체 사회로 자리매김한다.

이 책을 쓸 때 공산당원이었던 세제르는 제국과 식민지의 문제를 인종 결정론으로 환원하지 않았다. 그는 “식민주의자와 식민지인 사이에 놓인 것은 강제노동과 협박, 압력, 경찰, 세금, 절도, 강간, 공물, 야유, 불신, 교만, 지위, 탐욕, 골빈 엘리트들, 타락한 대중들”이라며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식민지인을 생산도구로 파악한 그는 ‘식민주의=사물화’로 규정하고, “지구상의 모든 행악을 온몸으로 견디어 낸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의 주체로 상정했다.

하지만 네그리튀드는 세제르에게 숙명같은 것이었다. 그는 1956년 공산당을 탈당하면서 “제가 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가 흑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흑인들이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번 선집은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과 <어떤 태풍> <귀향수첩> 3권으로 묶여 나왔다. <어떤 태풍>은 셰익스피어의 ‘태풍’을 탈식민주의 맥락으로 개작한 희곡이며, 세제르의 처녀작 <귀향수첩>은 아프리카 흑인의 고통을 형상화한 서사시다. 이석호 옮김·각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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