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남침 대비 태세 보여주려 적십자회담 시작”

2011.10.25 20:56
설원태 편집위원

오스터만 우드로윌슨 국제센터 소장, 구술사 발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남북한 간에 1970년대 초반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려 접촉이 시작됐고, 여기서 이산가족 문제를 다룬 것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당시 남북한의 접촉 배경은 무엇이며,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상대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최근 한국국제교류재단(KF) 초청으로 방한한 크리스천 오스터만 우드로윌슨 국제센터 역사·공공정책 프로그램소장(사진)은 지난 24일 “1970년부터 1974년 사이 남북한 접촉의 이면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중국·옛소련·유엔의 복합적인 관계를 조명하는 구술사(口述史)를 발간했다”며 <한반도 데탕트의 성쇠: 1970-1974>라는 제목의 영문서적을 공개했다.

오스터만 소장은 “오랜 기간 남북한 접촉에 깊이 관여한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초창기 남북적십자회담 남측 대표였으며 오랜 기간 이에 관여했던 김달술씨 등 남북한 접촉 실무자들의 생생한 구술과 선준영, 신종대, 류길재, 홍석률 등 한국외교관 및 북한전문가 등의 대담을 담고 있다”고 책을 소개했다. 오스터만은 “남북한 관계 구술사 작업은 작년 7월부터 워싱턴에서 진행됐다”면서 “이 책은 김일성 주석이 루마니아의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 등과 한반도를 주제로 나눈 대화록 등 22건의 한반도 관련 중요 문건의 영문번역도 수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한, 남침 대비 태세 보여주려 적십자회담 시작”

오스터만의 설명과 <한반도 데탕트의 성쇠>에 의하면, 1970년대 초반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화해정책을 추진해 수교에 이르렀으며, 이 과정에서 양국은 남북한에도 대화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당시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월감을 갖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남한의 대북강경파들을 의식해 정치문제도 경제문제도 아니면서, 미국도 북한도 거절할 수 없는 인도주의적인 의제인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논의하자고 북한에 제의해 접촉의 물꼬를 텄다. 이 제안은 박 대통령의 1970년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처음 나왔다. 박 대통령은 당시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을 제쳐두고 북한과 일방적으로 관계개선을 추진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면서 남북대화에 임했다.

오스터만은 당시 남북을 오가면서 적십자회담을 개최한 것과 관련해 “남측은 과거보다 북한의 남침에 훨씬 많이 대비돼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북측이 군사분계선을 오가면서 남측의 남침 방어준비 태세를 직접 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책에 수록된 문건들에 의하면, 1970년대 들어 남한의 경제력 및 군사력이 성장하자 김일성 주석은 무력통일이 어렵게 됐다고 판단해 평화공세를 강화했다. 이를 통해 남한의 대북 경계심을 약화시키는 한편 남한 내 진보세력의 강화로 대북정책을 놓고 ‘남남갈등’을 고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특히 루마니아 공산당중앙위원회 문서고에 보관된 문건의 영문번역에 의하면, 김일성 주석은 1971년 6월10일 평양을 방문한 차우셰스쿠 등 루마니아 측 인사들과의 대화에서 “박정희는 남한이 경제·군사력 면에서 북한보다 강하다고 믿는 것 같다”면서 “남한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점차 높아지는 만큼 독재적인 박정희 정권은 언젠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워싱턴에 위치한 우드로윌슨 센터는 윌슨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미국 의회가 1968년 세운 기념관으로 비정파적 입장에서 미국 및 국제문제에 관한 현실적인 정책연구 등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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