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기시의 공통분모는 만주국…그들은 ‘제국주의의 귀태’였다

2012.09.21 20:20 입력 2012.09.24 10:03 수정

▲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강상중·현무암 지음 |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325쪽 | 1만7000원

“1961년 11월11일, 오카모토 중위는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로서 다시금 일본 땅을 밟게 되었다.” 박정희가 1961년 일본을 방문해 만난 인물 중에는 기시 노부스케(1896~1987)가 있다. 그는 박정희에게서 들은 말을 이렇게 전했다. “ ‘우리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에 나선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인데, 그때 일본 메이지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겁니다.” 책이 서술한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에서 일본색을 더해 다시 바꾼 이름이다.

저자인 강상중 도쿄대 교수와 현무암 홋카이도대 교수가 소개한 일화는 당시 한·일 정치인 간의 의례적인 회동 이상의 맥락과 의미가 있다. 두 저자가 주목한 것은 “극단적인 세기에 아시아의 ‘뉴 아틀란티스’처럼 우뚝 솟았다가 신기루처럼 감춰진 제국 ‘만주국’ ”이다.

박정희와 기시의 공통분모는 만주국…그들은 ‘제국주의의 귀태’였다

저자들은 일본 관동군의 괴뢰정부로 1932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15년간 존재했던 만주국이 두 국가의 뿌리라고 할 만한 ‘공통의 모태’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박정희와 기시 두 사람을 안내자로 만주국과 전후 한·일 역사를 살핀다. 강 교수는 “무엇보다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두 인물을 통해 만주국과 전후의 일본 그리고 해방 후 한국의 연속성에 주목했다”고 적었다.

기시는 일본 정치 엘리트 집안의 자손이었고, 박정희는 식민지의 가난한 청년이었다는 점을 빼면 두 사람의 정치 역정은 만주국을 공통분모로 묘하게 닮아 있다.

기시는 만주국 부임 당시 ‘혁신관료’로 불리던 테크노크라트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도조 히데키와 함께 A급 전범으로 체포됐다. 극형에 처해질 운명이었지만, 시나 에쓰사부로 같은 만주국 관료 출신의 석방 탄원 등에 힘입어 무죄로 풀려났다.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을 주도하며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박정희는 “일본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한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은 결심”을 피력하며 만주 군관학교 시험에 합격했다. 패전 뒤 귀국해 남로당 활동을 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만주인맥’ 백선엽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5·16 쿠데타로 집권하는 그는 한국의 고도성장을 주도했다.

와중의 한국전쟁은 두 사람에게 전범과 좌익이라는 낙인을 벗어내는 기회로 다가왔다. 저자들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 및 냉전이 기시를 유폐의 나날에서 해방시켜준 절호의 기회였던 것처럼 박정희에게 냉전과 분단은 ‘친일파 군인’이라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 줄 ‘뜻밖의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기시의 외손자 아베 신조가 2006~2007년 일본 총리를 지냈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뽑혔는데, 자손들이 유력 정치인이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일제 경험이 박정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더 구체적으로는 만주국 경험이 박정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기시는 만주국에서 총무차장으로 일하며 계획적이고 통제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했는데, 그 이름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닮은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다. 기시는 농업국이던 만주에 중화학공업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부심했다. 저자는 기시의 실험이 “한국의 개발독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면서 “군사정권에 의한 국가주도형 중화학공업화와 군수산업의 육성은 만주국에서 기시 등 소장 혁신관료들이 좀처럼 이룩할 수 없었던 꿈을 실현한 것”이라고 평한다. 기시 또한 만주국의 경험으로 ‘신(新)장기경제계획’ 등을 만들어 요시다 정권 이후 일본의 경제 방향을 결정했다.

경제부문뿐만 아니라 만주의 정치제도도 모태를 이룬다. 만주는 겉으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운 입헌공화국이었지만, 속으로는 “제국의 정치적 위력을 심어 넣을 중앙독재주의”에 따르는 국가였다. 박정희는 병영국가적인 국력 배양과 총력 안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는데, 저자들은 만주국의 유산이라고 본다.

박정희가 꾀한 정신적인 동원 즉 정신적 근대화의 연원도 만주국이다. 반공·멸공대회, 학생웅변대회, 재건체조 등의 원형이 만주국의 행사·제도와 닿아 있다. ‘건설’과 ‘재건’, ‘총력안보’, ‘총동원’ 같은 말들도 만주 것을 모방했다. 저자들은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의 논리로서 효율적인 동원과 노동, 근검절약, 집단주의, 욕망의 절제 등을 국민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저자는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관여하고 새마을정신과 유신정신을 연결시킨 이선근 같은 ‘만주인맥’의 과거사도 다룬다. 이선근 또한 만주국의 동원기구였던 협화회 협의원이었다.

저자들의 평가는 이렇다. “만주국의 제국군인과 협화회 협의원이 의기투합함으로써 만주국에서의 ‘비합리적 정신주의’가 한국사회에도 만연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일권도 만주국 헌병 대위 출신이다.

한·일 간 ‘만주인맥’도 끈끈하게 이어졌다. 기시는 “포항종합제철소와 서울지하철 건설, 나아가 한·일 대륙붕 석유공동개발 등 한·일 간에 이루어진 거대 프로젝트의 이권에 개입했다”고 한다. 기시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도 방한해 박정희와 회담을 했다. 그는 1970년 박정희로부터 일등수교훈장을 받았다.

저자들은 박정희와 기시 두 사람을 작가 시바 료타로의 조어를 빌려 ‘제국주의의 귀태(鬼胎)’라고 말한다. 귀태는 융모막 조직이 포도송이 모양으로 이상증식하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용어지만, ‘태어나서는 안될’ ‘불길한’ 같은 부정적 뉘앙스가 들어간 말이다. 저자들은 국가나 통제, 계획화 같은 귀태의 유산이 금융위기 이후 다시 주목받는 현재의 귀추도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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