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읽음

‘일베 현상’ 원인은… 강퍅한 삶에 불안·분노·배신감을 ‘놀이’ 형태왜곡 표현

2013.06.04 22:17 입력 2013.06.04 23:38 수정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이용자는 대다수가 10~30대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을 겪은 60대 이상이나 민주화운동 시기를 겪은 40~50대 등 기성세대와는 역사적 경험치가 다른 세대들이다. 일베 이용자의 다수는 진보진영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5·16 군사쿠데타 등 역사적 평가가 굳어진 사건에 대한 왜곡된 반발 또는 칭송을 쏟아내고 있다. 진보진영은 이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최근에는 일베가 ‘자기 편’인 줄 알았던 보수진영도 이들의 과격한 생각에 고개를 젓고 있다. 기존 사고의 틀에서 정면으로 벗어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일베 현상’으로까지 명명되는 이들의 행동은 무엇이 원인일까.

■ 일베 회원 대부분은 민주정부 10년 동안 청년기를 보냈다

우선 일베 이용자들이 살아온 삶의 배경이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평화연구자인 임재성 박사는 “일베 자체의 극우현상이 아니라 그 바탕에 있는 ‘불안 정서’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삶에서의 좌절과 이로 인한 반발이 근본적으로 기성세대와 다른 사고를 낳고 있고, 이것이 일베 현상의 제1 원인이라는 것이다.

일베 회원들은 대부분 1997~2007년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학창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당시는 1987년 민주화를 이룬 이후 한국 사회가 다시금 ‘먹고살기 전선’으로 옮겨갈 때다. 이 무한경쟁 시대에서 소수의 기득권층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불안정한 삶이 지속됐다.

이런 와중에 1997년 처음으로 민주정부가 탄생했다. 민주화운동 시기를 경험한 아버지 세대는 그래도 ‘사람 살 만한 세상이 왔다’고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의 아픔으로 불리는 젊은층의 강퍅한 삶에는 분노가 잠재됐다. 보이지 않는 자본 혹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권력층과 민주정부가 표방했던 진보적 가치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 일베라는 분석이다. 정재원 국민대 교수는 “일베 이용자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이전세대가 누렸던 가부장주의적 기득권이나 지역적 기득권을 뺏겼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을 예전에는 진보 쪽이라고 했던 일베 회원도 자신이 일베 회원이 된 원인을 이런 ‘배신감’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 민주화세력, 민주정부에 대한 배신감이 왜곡된 ‘놀이’형태로 쏟아졌다

이 같은 분노는 금기를 깨는 것으로 직결되는 모습을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지역감정, 역사적 사실에 반항했다. 여성과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도 공격대상이 됐다. 상대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자신들에게 사회가 보호하고 있는 여성과 이주노동자는 모두 적으로 보는 듯한 모습이다.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고 보는 민주화 세력과 민주정부에 대한 배신감은 일베를 통해 왜곡된 ‘놀이’ 형태로 쏟아져 나왔다. 칼럼니스트 박권일씨는 “민주화 세력이었던 기성세대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 자체를 ‘기득권의 담론’으로 보는 것”이라며 “이를 금기로 보고, 금기 깨기 놀이를 하면서 노는 것이 일베”라고 했다. 젊은층들이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을 금기 깨기로 표출해내는 광장으로 일베를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해석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일베의 반발과 놀이의 분위기가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들을 빨아들이고 있다고 본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일베 이용자들의 ‘좌절·상실감’으로 인한 거침없는 일탈이 10대 청소년들에게는 기성권위에 대한 ‘쿨한’ 도전으로 보여지면서 모방의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인터넷 문화의 발달은 일베 현상의 기반이 됐다. 1990년대 후반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터넷 사용과 게임문화는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가족이나 친구보다는 인터넷과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방대한 세계가 그들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터넷이 갖는 소통의 힘과는 역설적으로 세상과의 ‘소통 부재’가 이들을 가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평론가 김민하씨는 “인터넷 문화를 즐기는 계층들에게 일베의 콘텐츠가 계속 주효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 기성세대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와 관습, 구태 등도 일베 현상의 또 다른 원인

일베 이용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글들은 기성세대와 그 세대가 믿는 진실들을 뒤집는 것에 맞춰져 있다. 친일파 잔재, 5·16 군사쿠데타 등 진보와 보수 사이의 해묵은 논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진보진영이 믿는 역사적 사실에 대항하는 글들이 각종 패러디물로 표현되거나 폄훼되는 경우가 이런 예다. 일베는 진보진영이 과오가 많다고 평가하는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영웅으로 묘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고 일베는 전통적인 보수진영이 믿는 사실에 동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보수진영은 처음에는 이들을 감쌌다가 지금은 고개를 가로젓기도 한다. 지역감정 역시 같은 틀의 사고에서 나온다. 진보진영의 본산지로 대변되는 호남 지역을 ‘홍어’라고 폄훼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비하하는 게시물들은 기성세대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지역감정이 극단화되는 모습이다.

■ 시민교육과 역사교육 부재가 돌출

칼럼니스트 박권일씨는 “일베는 시민교육과 역사교육의 부재가 돌출한 현상”이라고 지목한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기성세대가 믿는 역사와 관습에 항의하는 것에는 역사교육의 부재가 큰 이유라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고교 필수과목이었던 역사가 선택과목이 됐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근·현대사나 사회과학 교육이 없는 점은 이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점으로 돌아왔다. 박씨는 “역사교육과 대학교육이 없어진 틈을 일베가 채운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대학 신입생이라면 5·18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학생운동의 맥이 끊기면서 최근 대학생들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인터넷 문화의 발달로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은 많아졌지만 역사교육 등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정치·사회적 판단에는 서투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