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의 무대 군산… 멈춰선 근대를 만나다

일제강점기 흔적 남아 있는 그곳… 과거로의 시간 여행

채만식, 이 도시를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1902~1950)의 <탁류>(1939)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을 타고 흘러온 금강이 끝나는 곳에 걸터앉은 항구도시 군산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일제의 억압과 자본주의의 억압이라는 이중의 억압이 조선 민중을 내리누르던 1930년대가 그 시간적 배경이다. 소설에서 여주인공 초봉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조선인 남성들이지만, 그 배후에는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인천, 부산과 함께 당대의 대표적 물류기지였던 군산은 일본의 식민지 수탈의 전초기지였는데, 지금껏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은 이제 근대문화 유산이라는 이름을 얻어 외지인들의 발걸음을 모으는 독특한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탁류’의 무대 군산… 멈춰선 근대를 만나다

해망로에 있는 미즈카페(오른쪽)는 1930년대 일본 무역회사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2층이 다다미방으로 돼 있는 게 특징이다. 미즈카페 뒤로 보이는 흰색 건물은 현재 군산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다. 이미지 크게 보기

해망로에 있는 미즈카페(오른쪽)는 1930년대 일본 무역회사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2층이 다다미방으로 돼 있는 게 특징이다. 미즈카페 뒤로 보이는 흰색 건물은 현재 군산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다.

■ 해망로의 근대건축들

지난 4일 정오 무렵,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들이 모여 있는 군산시 해망로는 여름 햇볕 아래 뜨겁게 달아올랐다. 해안과 나란한 방향으로 쭉 뻗은 이 도로를 따라 옛 군산세관, 옛 조선은행,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옛 미즈상사 건물 등 군산이 자랑하는 근대 시기 건축들이 도열해 있다. 군산시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사업비 100억원을 들여 이 부근 일대를 근대문화벨트화지역으로 조성했다. 2011년 9월30일 개관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도 상징성을 고려해 이곳에 지어졌다.

역사박물관에서 해안을 바라볼 때 왼편에 있는 것이 옛 군산세관이다. 벨기에에서 수입한 적색 벽돌로 지어진 이 아담한 건물은 서울에 있는 옛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 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설계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독일인이 맡았고 1908년 준공됐다. 지금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돼 있다. 건물 내부에는 군산세관에서 적발한 모조상품 등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흰색 외벽의 단층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372호)이다. 일본 제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두고 있었으며, 군산에 있던 것은 이 은행이 조선에 개설한 일곱 번째 지점이다. 채만식이 <탁류> 신문 연재를 마친 1938년에는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 매각돼 일본으로 향하는 쌀 반출 조절 업무와 화물 보관 업무가 이곳에서 이뤄졌다. 현재는 군산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단층으로 된 본관과 2층으로 된 부속건물 2동으로 지어졌는데, 부속건물 중 1동은 현재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옛 일본 제18은행 건물을 끼고 조금만 걸어가면 횡단보도가 나온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탓에 놓치기 쉽지만,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나타나는 육중한 느낌의 건물이 바로 옛 조선은행(국가등록문화재 제374호)이다. ‘ㅅ’자 형태로 좁아지는 푸른색 지붕의 형상이 독특하다.

<탁류>에 주인공 초봉의 첫 남편 태수가 근무하던 곳으로 등장한다. 채만식은 소설에서는 이곳을 “××은행”이라고 적고 있다. 군산시는 한때 버려져 있던 이 건물을 군산근대건축관으로 복원하면서 옛 지붕목조 트러스, 벽돌, 타일, 모조석 일부를 두꺼운 강화유리 안에 그대로 보존해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옛 일본 제18은행 건물과 옛 조선은행 건물이 해방 이후에는 그 전과는 사뭇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는 점이다. 조선은행 건물은 1980년대에는 예식장과 나이트클럽이었다. 일본 제18은행 건물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고품 판매장이었다.

옛 군산세관

옛 군산세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 근대 일본식 가옥의 두 모습 - 신흥동 일본인 가옥과 이영춘 가옥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맞은편 도심 쪽으로 10여분쯤 걸어가다 보면 군데군데 일본식 가옥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촬영지였던 신흥동 일본식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이다. 신흥동 가옥은 일제강점기 군산지역에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일본인 히로쓰 요시사부로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 가옥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히로쓰 가옥이라 불리기도 한다. 해방 후에는 50년 가까이 호남제분주식회사의 관사로 사용됐다. 대문은 좁고 낮지만 내부 규모는 상당하다. 대지는 1239㎡(375평), 건물은 363㎡(110평)이다. 꽃과 나무, 정원석 등이 있는 정원에서는 자연을 압축해 놓는 일본식 정원의 미학을 맛볼 수 있다.

신흥동 가옥이 있는 영화동, 신흥동, 월명동 등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밀집지구였다. 일본인들이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면서 조선인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게 됐다. 소설 <탁류>는 이 같은 상황을 “그뿐 아니라 정리된 시구라든지, 근대식 건물로든지, 사회시설이나 위생시설로든지, 제법 문화도시의 모습을 차리고 있는 본정통이나 전주통이나 공원 밑 일대나, 또 넌지시 월명산 아래로 자리를 잡고 있는 주택지대나, 이런 데다가 빗대면 개복동이나 둔뱀이니 하는 곳은 한 세기나 뒤떨어져 보인다”고 묘사하고 있다. 본정통은 오늘날의 해망로, 전주통은 영화동을 가리킨다.

이영춘 가옥(전북 유형문화재 제200호)은 신흥동 가옥과 함께 일반인에게 개방돼 있는 적산 가옥들 중 하나다. 신흥동 가옥과는 달리 도심 외곽에 있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인 이영춘 박사(1903~1980)는 1935년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로, 일제 치하 군산에서 자혜진료소를 운영했다. 그는 군산간호대학 창립자이기도 한데, 이영춘 가옥이 군산간호대 교정 안에 있는 것은 이런 사정에서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 군산 최대 농장주였던 일본인 구마모토 리헤이가 별장으로 쓰기 위해 지었다. 1903년 조선으로 건너온 구마모토는 농장 경영으로 부를 축적해 1930년 무렵에는 여의도의 10배가 넘는 땅을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경성에 있던 이영춘 박사는 구마모토가 1935년에 만든 자혜진료소의 의사로 고용돼 군산으로 왔다. 자혜진료소는 명목상으로는 구마모토가 소작농들의 진료를 위해 만든 병원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곳은 당시 군산에서 빈발했던 소작쟁의를 무마하기 위한 의도로 세워졌다.

구마모토는 조선 농민들에게 생산량의 45%에 달하는 소작료를 받고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은 농민들에게 고리의 이자를 매긴 냉혹한 사업가였다. 구마모토가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집은 이영춘 박사의 소유가 됐다. 신흥동 가옥이 일본의 전통적인 목조 가옥인 데 비해 이영춘 가옥은 일본 전통 양식이 가미된 유럽식 별장에 가깝다. 지붕은 얇게 잘라낸 돌판으로 덮여 있고 건물 외벽에는 통나무가 붙어 있다. 거실 또한 벽난로와 샹들리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돼 일본풍과는 또 다른 이국적인 매력을 풍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신흥동 일본식 가옥

이영춘 가옥

이영춘 가옥

■ 동국사, 그리고 고은

신흥동 가옥에서 걸어서 불과 5분쯤 걸리는 동국사(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는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다. 한국 사찰과는 달리 산속에 들어가 있지 않고 도심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동국사는 1909년 일본 조동종 소속 승려 우치다 붓칸이 세운 절이다. 대웅전 왼쪽에 있는 범종각 앞에는 일본 조동종이 2012년 건립한 참사문(참회와 사죄의 글) 비석이 있다. 참사문은 “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뒤편의 무성한 대숲은 치욕의 역사를 잊게 할 만큼 적요로운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채만식과 함께 군산이 배출한 대표적인 문인 고은은 1952년 이 절에서 출가해 2년을 머물렀다. 그러나 고은의 흔적은 동국사에도, 군산시 전체를 통틀어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도심에서 벗어나 접근성이 떨어지긴 하나 채만식의 경우 따로 문학관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일한 흔적은 군산 시민들의 휴식처인 은파호수공원 근방에 있는 생가다. 그러나 군산시에서 만든 관광안내 소책자 어디에도 고은의 생가는 언급돼 있지 않고, 은파호수공원 안내센터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 물어물어 찾아간 시인의 생가는 무성하게 자란 풀들 사이로 방치돼 있었다. 폐가와 다를 바 없는 이 초라한 집에서 반짝이는 물건이라고는 군산시가 도로명 주소로 바꾸면서 붙인 ‘용둔길 53’이라는 팻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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