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해방 70년…“나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됐나” 재일조선인이 끄집어 낸 현대사의 한 줄기

2016.04.01 19:53 입력 2016.04.01 19:54 수정
장은교 기자

조선과 일본에 살다-재일시인 김시종 자전

김시종 지음·윤여일 옮김 | 돌베개 | 316쪽 | 1만5000원

태어나보니 일본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고는 하는데, 지금 이 땅은 일본의 것이다. 일본어로 말하고 쓰는 것이 당연했으며 조선어는 서툴고 불편했다. 나라의 주인은 천황폐하였고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영예롭다고 배우며 자랐다. 일본이 아닌 조선을 살아본 적이 없는 소년, 그런 소년이 열일곱에 갑자기 해방을 맞았다.

[책과 삶]해방 70년…“나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됐나” 재일조선인이 끄집어 낸 현대사의 한 줄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재일시인 김시종 자전>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해방 후 제주 4·3사건을 겪은 뒤 일본으로 탈출, 시인과 교사로 살아온 김시종씨(87)의 이야기다. 저자는 ‘8·15’와 ‘4·3’이라는 한국사의 굵직한 두 사건을 중심으로 인생을 회고한다.

한 인물의 업적을 그린 영웅기도,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작심 고발도 아니다. 그저 한 개인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묵묵히 살아낸 이야기다. 그가 보고 듣고 겪어야 했던 일들을 담담히 따라가다보면 우리 현대사의 한 줄기가 마음속에 새겨진다.

저자는 소년의 눈으로 보았던 일제강점기를 들려준다. 그는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랐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기억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을 목격한 어른들은 독립투사와 친일파로 나뉘었을지 모르지만, 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소년에겐 달랐다. 저자는 “식민지는 내게 일본의 우아한 노래로 다가왔다”고 회고했다. 결코 가혹한 물리적 수탈이 아니라 쉽게 친숙해지는 소학교의 창가나 동요 같았다고 했다. 일본인 교사들은 때로 엄하게 때로 부드럽게 아이들을 교육했다. 소년은 잘 쓰지도 않는 조선어 수업 대신 친절한 일본인 선생님이 칠판에 여러 색의 분필로 그림을 그리며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군사학교에 진학해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던 ‘황국소년’에게 해방은 느닷없이 찾아왔고, 오히려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어른들이 배신자처럼 보였다.

해방이 독립은 아니었다.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친일파가 친미파로 간판을 바꿔달고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며 소년은 철이 들기 시작했다. 1948년 일어난 4·3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민중봉기에 가담했고 자신을 숨겨주려다 이웃과 친척들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1949년 그는 “마지막 부탁이다. 설령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말라”며 아버지가 마련해준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저자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공립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일본어로 시를 쓰는 재일조선인으로 살았다. 1998년 고향을 떠난 지 49년 만에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해방으로부터 7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나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라는 자문은 지속된다”고 썼다. “1945년 8월15일을 기해 내 일본어는 어둠 속에 갇힌 말이 되어야 했지만 그 어둠의 말을 겉으로 꺼내가며 일본에서 지내고 있으니 이것은 자신과의 지독한 숨바꼭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했어야 할 그의 삶이 그 어떤 역사서보다 생생하게 한국의 지난 90여년을 기록하고 있다. 2015년 일본 산문문학상 오사라기 지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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