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D&D 김성주 회장 “난 1센트를 아껴온 자수성가”

2009.07.02 04:28 입력 2009.07.02 09:30 수정
글 유인경·사진 김영민기자

24시간을 뛰는 세계 패션업계 스타

“정치는 절대 안할 생각이다”

성주 D&D 김성주 회장 “난 1센트를 아껴온 자수성가”

직원은 “회장님이 화장실에 갔으니 곧 오실 것”이라고 했지만 김성주 회장(성주D&D)은 10여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화장실에 있는 동안에도 외국에서 전화가 걸려와 업무 지시를 내리느라 늦었단다. 줄무늬 재킷에 검정 면바지, 납작한 구두는 3년 전 인터뷰 때도 입었고 1주일 전에도 본 차림이었다. 한국능률협회가 수여하는 ‘2009년 한국의 경영자상’ 수상자, 대한민국 창조경영인 선정위원회가 뽑은 ‘가치경영 창조경영자’, 그리고 지난 5월 기부를 많이 해 세계적인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 이타주의자 48인’에 이름을 올린 김성주 회장은 패션회사 대표이면서도 옷이나 액세서리에 신경쓸 시간이 없다. 5년 전 독일 본사로부터 인수해 현재 성주그룹의 대표 브랜드가 된 MCM은 국내 연매출액만 2200억원. 핸드백 등 가방 판매만으로는 세계적 명품 루이비통과 구치를 앞섰다. 지난해 11월에 미국 뉴욕의 최고 중심가인 플라자호텔에 직영 매장을 열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는 MCM의 성공 사례를 연구해 올해부터 교재로 채택한다고 한다. 이토록 눈부신 성공을 거둔 그이지만 외환위기 때는 부도를 눈앞에 두기도 했고, 한국의 기업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왕따 취급을 받기도 했다. 좌절과 오해를 딛고 더욱 아름다운 성공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 김성주 회장을 청담동 MCM하우스에서 만났다.

-전 세계가 경제위기다. 특히 구치,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들은 주가도 폭락하고 매출도 급격히 줄었다. 그런데 MCM은 국내외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외형적 매출만이 아니라 브룩 실즈, 하이디 클럼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도 애용하는 제품으로 알려졌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우리에겐 엄청난 기회다. 사실 아시아의 중소기업이 제한된 자금으로 한 해에 수천억원의 광고비를 쓰는 대자본의 명품 브랜드와 경쟁하는 것은 큰 바다에 돌 몇 개 던지는 기분이지만 항상 희망을 잃지 않았다. 수십개의 브랜드를 거느린 공룡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경제위기에 큰 타격을 받고 휘청대는 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일단 미국과 유럽의 부동산가격이 내려 엄두도 못냈던 뉴욕 삭스5번가에 매장을 낼 수 있었다. 또 실력있는 이들이 많이 구직 시장에 나와 스타디자이너 등 인재를 영입하기도 쉬웠고, 홍보나 광고도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어 브랜드를 제대로 알릴 호기다. 또 과거 소비자들은 무조건 유럽의 명품 브랜드나 값비싼 제품을 선호했지만 이젠 합리적 명품을 선호한다. 같은 가죽 핸드백이라도 디자인이 마음에 들고 가격이 적당하며 제품이 탁월한 것을 선택한다. 예전에 눈을 안 돌리던 브랜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인터넷을 통해 각종 제품을 비교 분석한 후 가장 합리적인 제품을 산다. 특히 21세기 들어 지식노동자로 대거 등장한 젊은 여성들이 남편이나 애인의 돈으로 명품을 척척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제품을 사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유럽 명품에 비해 가격은 싸지만 품질은 절대 뒤지지 않고 젊은 감각과 클래식을 가미한 우리 제품이 성장하게 됐다. 특히 미국 시장에 진출한 지 두 달 만에 도도한 뉴욕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의 불문율을 깨고 1층의 메인 쇼윈도를 장식하며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미국 소비자들의 호응 덕분이었다. 그래서 더 짜릿한 희열을 만끽하고 있다.”

-MCM은 원래 독일 브랜드다. 자존심 강한 독일의 명품 브랜드 MCM이 한국에 브랜드와 경영권을 맡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우린 그저 MCM의 한국총판을 맡은 수입업자였다. 하지만 내것처럼 열정을 갖고 상품을 판매했고 본사에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1990년대 초반에 프라다가 나일론 소재의 백을 내놓아 가방혁명을 일으켰다. 곧이어 우아함과 여성스러움의 대명사인 구치가 양가죽 백을 어깨에 멘 여성이 스쿠터를 타고 있는 광고를 만들었다. 난 사회과학과 경제학 전공이라 패션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한다. 1990년대부터 전문직 여성들이 급증하면서 장식용이 아니라 일을 하는 보조수단으로서의 핸드백이 필요해졌다. 거울과 손지갑만이 아니라 서류와 휴대폰, 노트북까지 넣을 수 있는 크면서도 가벼운 백이 필요하다고 판단, 가죽가방만 팔던 본사에 실용적인 소재의 자카드 백팩을 제안했다. 처음엔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그 제품만 100만개나 팔리는 큰 성공을 거뒀다. 지금도 30대 초·중반의 여성들은 대학 시절에 MCM 백팩을 들고다녔던 추억을 이야기한다. 이런 아이디어와 능력을 인정했고, 또 한국에서 만든 제품력을 믿어줘서 MCM이 명실상부한 한국산이 됐다.”

“사업은 게임, 북한돕기 명분이 있어 난 지치지 않아”

“세계 곳곳에 우리 매장을 넓혀 가는 것은 우리 국토를 넓혀 가는 것과 같다. 칭기즈칸이 아닌 칭기즈김이 되기로 했다”며 세계 시장 개척의 열정을 보이는 김성주 회장. 김영민기자

“세계 곳곳에 우리 매장을 넓혀 가는 것은 우리 국토를 넓혀 가는 것과 같다. 칭기즈칸이 아닌 칭기즈김이 되기로 했다”며 세계 시장 개척의 열정을 보이는 김성주 회장. 김영민기자

-전공도 신학, 사회과학이고 집안인 대성그룹도 패션과는 거리가 먼데 왜 패션업을 시작했나.

“1980년대 중반에 미국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기획팀에서 일할 때 베네통그룹의 루치아노 베네통 회장을 만나 ‘쇼크’를 받았다. 이탈리아가 본사인 베네통은 전 세계에 4000여개 매장을 갖고 있지만 공장이 없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머리’다. 본사에서 콘셉트와 모티브를 결정한 후 전 세계에 흩어진 디자이너를 활용해 디자인을 선별하고 조절한 후 각 나라에서 제품을 만들도록 해 판매한다. 세계를 겨냥한 소프트웨어 개발에 주력한다면 패션산업이 글로벌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산업으로 떠오를 것으로 판단했다. 이제 우리가 글로벌 패션허브로서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하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10여년 전엔 부도위기도 겪었고 친오빠와의 재산다툼도 공개됐는데 어떻게 극복했나.

“성주인터내셔널을 설립해 구치, 이브생로랑 등 너무 사업을 키우다가 외환위기를 맞았다. 당시 자금사정이 어려워 아버님 생전에 운영하던 대성그룹으로부터 지급보증을 받아 30억원을 빌렸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가 경영권을 물려 받으며 MCM 경영권을 요구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적인 운영으로 구치 본사가 한국의 구치를 당시 270억원에 사주었고, 지급보증 받은 일 역시 투명하게 정리되어 다 해결됐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그때 얻었다.”

-2000년에는 한국에서 여성이 기업하기 너무 어렵다면서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거대한 남성중심 사회에서 아직도 왕따인가.

“199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는 크게 3가지 현실이 날 슬프게 했다. 첫째는 여성비하적 문화다. 여성들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고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일도 많았다. 두 번째는 접대문화다. 특히 소매유통업은 흰봉투 없이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곳이었다. 백화점에 매장을 내거나 면세점에 공간을 얻을 때도 관례인 흰봉투를 내밀지 않으면 영업실적과 상관없이 구석진 곳으로 내몰거나 아예 매장 철수 요구가 내려졌다. 세 번째는 글로벌 시각이 전혀 없는 우물안 개구리라는 답답함이다. 난 이 3가지를 없애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맥켄지코리아가 분석한 우먼코리아란 한국 국가 경영보고서가 1999년에 발표됐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여성인력의 활용이 가장 필요하다는 내용인데 그걸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것이 여성부 탄생의 계기가 됐고 대기업을 비롯한 기업들에서 여성 채용이 늘어났다. 두 번째, 접대문화를 극복했다. 돈봉투와 룸살롱 접대 없이는 영업이 안 되는 게 현실이지만 불이익을 겪으면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접대와 향응을 하려면 돈이 들고 비자금을 마련하느라 기업들이 부패한다. 그런데 엘리트들이 기업에 입사해 향응과 접대로 청춘을 보내고 기업도 양심을 팔아서 돈을 벌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얼마나 큰 국가적 낭비인가. 건강에 나쁜 술 향응 대신에 자전거 하이킹, 뮤지컬 관람을 유도했고 외국인들에게는 고궁과 박물관 관람을 통해 한국문화도 알렸다. 93년과 96년에 두 차례 세무조사를 받았으나 한 건의 탈세 사실도 적발되지 않을 만큼 투명했고, 매출순위는 1000번째 정도인데 세금은 600번째로 낼 만큼 세금을 많이 냈다. 물론 접대문화에 충실하는 등 한국식 관행대로 했으면 회사 규모가 지금보다 10배쯤 커졌겠지만 투명하기에 위기에도 살아남았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감각이다. 우리는 글로벌 시각이 너무 부족하다. 글로벌 감각이란 영어를 잘하거나 해외에 많이 진출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세계화가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이었다면 글로벌은 밖에서 안, 즉 우리를 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잘 모르고 남들에게 잘 소개할 줄 모르는 것이 약점이다. 사업을 하건, 취업을 하건 그저 학연, 지연에만 얽혀 돌아간다. 난 그걸 조직의 근친상간이라고 부르는데 그걸 과감히 끊어야 사회 곳곳에서 인재들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몇배의 효과를 내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자긍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김 회장은 남성중심의 문화를 지적하면서 여성들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방송에서 한국 여성들도 군대에 보내야 한다거나, 주부들이 키부츠 등의 시설 체험을 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펴 안티 세력들도 만만치 않다. 그 의견에 변함 없나.

“여성들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 여성 파워는 인정하지만 그 신념엔 변함이 없다. 과거엔 가부장적 법과 제도, 통념들이 여성들에게 족쇄가 됐다. 지금은 여성들이 남자 탓만 할 때가 아니다. 남성을 성토하기 전에 자기 반성을 하고 솔선수범할 때다. 여자라고 나약한 척 징징대거나 핑계를 대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그건 열심히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민폐다. 그래서 남자들만 군대에 갈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 1년씩 공평하게 군대를 다녀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만약 내가 20대 젊은 여성이었다면 자원입대했을 터지만 불행히도 난 50대다. 서울 강남의 고급 음식점에 가보면 99%가 주부들이다. 명품만 걸치고, 음식점이나 미용실 순례를 하는 주부들을 키부츠 같은 시설에 가 정신 개조를 해서 자신의 능력도 사회에 발휘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길 바란다. 그런데 우리 직원들은 절대 공식적인 자리에선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 브랜드 이미지까지 안 좋아진다면서….”

-김 회장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재벌 딸이라 유산을 많이 받았다, 정치적 야망이 크다, 명품을 좋아한다 등이 대표적인 오해들이다. 대성그룹 회장이 아버지(고 김수근 회장)였지만 아들만 존중하는 가풍에다 외국인과 결혼해 유산을 못 받았다. 미국 유학시절, 뉴욕 뒷골목에서 1센트를 아끼려고 걸어다녔고 국내에 돌아와서도 밑바닥부터 시작해 자수성가했다. 또 정치는 절대 안 할 생각이다. 여러 정부에 걸쳐 숱한 제의를 받은 게 사실이지만 자문위원 정도의 역할이 내게 적당하다. 내가 기업을 하는 것이 더 애국하는 길이다. 난 너무 솔직해 정치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또 패션회사 사장이지만 명품을 잘 사지 않는다. 차도 중형 국산차를 타고 다니고, 중저가인 막스앤스펜서의 구두를 몇년째 신고 있다.”

-전 재산을 북한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고 북한아이돕기 등 북한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왜 그토록 북한을 도우려 하나.

“왜냐고 묻는 것이 이상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태어난 지역이 다를 뿐인데 남한과 북한의 현실은 너무 다르다. 고작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우리 민족이 배고픔과 각종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이 너무 가슴아프고 죄스럽다. 그래서 난 기독교인으로서,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서 북한을 돕는 데 생애를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사업은 게임이다. 그런데 그 게임을 더 치열하고 신명나게 하려면 명분과 목표가 필요하다. 북한을 돕는다는 순수한 가치와 명분이 있기에 난 사업을 하면서 쉽게 유혹에 빠지지도 않고 쉽게 절망하지도 않는다. 내가 아니라 우리 민족을 위해서라는 사명감 덕분에 난 하루에 3~4시간만 자면서도 지치지 않는다. 현재 35개국에 매장이 있고 6개국에 지사가 있어 24시간 내내 나를 찾는 전화가 오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여성 기업인으로 국제세미나 등에 참석하느라 바쁘다. 때론 한밤중에 잠옷차림으로 전화를 받고 비행기 안에서 업무를 본다. 내가 있는 곳이 ‘본사’란 생각으로 일한다. 이런 의욕과 열정은 모두 고통에 시달리는 북한을 돕는다는 아름다운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고 난 후에 전 재산을 북한주민돕기에 쓴다고 했는데 지금 재산이 얼마이고 언제 내놓느냐고 묻는 이들도 많다. 난 아직 건강히 살아 있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 대한민국을 알리고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해서다. ”

김성주는 누구인가

대성그룹 막내딸… AWSJ ‘세계 여성 기업인 50명’ 뽑혀

성주 D&D 김성주 회장 “난 1센트를 아껴온 자수성가”

국내 굴지의 에너지기업인 대성그룹의 막내딸로 195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도미, 앰허스트대학과 영국 런던 정경대학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아버지에게서 3억원을 빌려 1990년 성주인터내셔널을 설립해 그동안 밀수품으로 들여오던 구치, 이브생로랑 등과 같은 명품 브랜드에 라이선스료를 주고 물품을 공식 수입하는 패션 유통업을 하다 2005년 독일 MCM사를 인수했다. 연매출 650억원이던 브랜드를 4년 만에 연매출 2200억원의 명품 브랜드로 키워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다양한 활동으로 스위스 다보스포럼이 선정한 차세대 지도자 100인으로 지명됐고 2004년 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AWSJ)은 주목할 만한 세계 여성 기업인 50명에 선정했다. 세계은행 홍보대사를 맡는 등 해외에서 더 지명도가 높다.

176㎝의 큰 키에 화려한 이목구비, 큰 제스처와 유창한 영어 실력 등 어느 자리에서나 주목받지만 연 수입의 30%를 사회에 기부하는 등 가치있게 돈 잘 쓰는 기업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룹 수익 중 10%를 좋은 목적에 쓴다는 원칙을 세워 봉사활동에도 앞장선다.

직원들은 “업무량이 많아 힘들긴 하지만 ‘가진 자의 봉사와 환원’을 실천하는 김 회장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기업인”이라고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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