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 ‘현실’이 없다

2012.02.03 21:18 입력 2012.02.04 00:56 수정
임진모 | 대중문화평론가

현재 글로벌 최고의 인기 가수는 영국의 젊은 여성 아델(Adele)이다. 스물한살이던 지난해 내놓은 앨범 <21>의 세 곡이 내리 전미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솔직한 감정을 잘 배치한 아델의 노래는 요란하게 포장된 감각 일변도의 근래 음악 유행과 분리선을 치면서 수요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유명 록밴드 ‘푸 파이터스’의 리더 데이브 그롤은 “아델의 대박은 그 노래가 실제적(real)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힘들고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든, 실연의 아픔을 겪든 낙담한 젊음한테 흐느낌으로 솟아오르는 그의 노래는 어떤 가수의 노래보다도 가슴에 와닿는다.

[임진모칼럼]노래에 ‘현실’이 없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장치 중 하나가 노래라면 대중가요의 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데 있다. 음악가가 창문을 열고 바라본 바깥세상이 일그러져 있다면 때로 사회비판적인 노래도 등장한다. 이른바 저항가요다. 음악의 구세주로 통하는 밥 딜런, 닉슨 정부에 덤벼든 존 레넌, 자메이카의 명예로운 시인 밥 말리 등이 세기의 음악인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실제 삶에 기초한 리얼리즘 노선을 취했기 때문이다.

노래에 그려진 것으로만 본다면 한국의 사회 분위기는 명랑과 쾌활의 행복세상이다. 거기에 학점 노예에다 취업불안에 허우적대는 젊음과 비정규직의 고통, 최악의 경기침체에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의 신음은 없다. 설령 그런 메시지를 대놓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는 어울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 노래는 ‘좋은 세상, 재미나게 놀자’는 식의 감각잔치와 춤판으로 치닫고 있다. 노래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아이돌 댄스와 후크송은 한류를 얻는 대신 실제적 감동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한국의 대중가요는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라는 일각의 비판을 받는 것이다. 지난해 흘러간 명곡을 대거 끌어들여 기성세대를 포획한 ‘나는 가수다’의 반격을 당한 것도 우리 음악계의 과잉 10대와 감각 지향 때문이다.

1977년 인플레이션과 살인적인 청년실업률과 함께 경제시스템이 무너져 끝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사태를 맞은 영국에는 성난 젊은이들 주도의 살벌한 펑크 음악이 등장했다. 대표 펑크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자니 로튼은 “실업자들에게 사랑 노래는 필요가 없다!”며 주지육림에 빠져 있는 기성 음악계를 난타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마찬가지로 IMF체제로 들어간 한국에서도 인디 록밴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가만있어/ 우리는 달려야 해 거짓에 싸워야 해 말달리자/ 모든 것은 막혀 있어 우리에겐 힘이 없지 닥쳐’(크라잉넛 ‘말달리자’)나 ‘절절 끓는 젊은 피가 거꾸로 솟을 적에/ 푸르게 날이 선 칼끝에는 검광이 빛난다/ 그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세상을 뒤집어엎을 날을’(노브레인 ‘청년폭도맹진가’) 같은 핏발 선 노래들이 그립다. 심지어 요즘은 인디 음악마저 재미 풍조에 빠져 상업적 성공을 갈구한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럼 노래마저 축 처져 있어야 하냐고. 힘든 사람들에게 노래라도 즐거움을 선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문제는 그런 명랑가요만 있고 다른 노래는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 결코 저항가요 판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저항가요 이전에 당장의 현실을 그린 노래들, 가슴 아픈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언어들, 아델 노래 같은 ‘레알’ 송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현실 반영의 메시지송도 지분을 가져야 대중가요에 실망해 돌아선 사람들도 다시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대중가요는 그 내용이 현실을 외면한 채 딴 나라에서 뛰놀고 있다.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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