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졸업 후 기타리스트를 욕망하던 조용필은 부지런히 ‘벤처스’ 음악을 연습하며 로커의 정체성을 키웠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거쳐 1980년 ‘창밖의 여자’로 대마초 공백기를 털고 스타로 비상하자마자 기어코 꿈꾸던 밴드를 만들었다. 그 이름은 최근 한 오디션 프로가 타이틀로 사용하기도 한 ‘위대한 탄생’이다.
그간 못했던 밴드음악에 대한 한을 풀 듯 그는 이후 잇달아 ‘고추잠자리’ ‘못찾겠다 꾀꼬리’ ‘자존심’ 등 대중음악의 역사에 빛나는 밴드음악의 걸작을 내놓았다. 트로트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 역시 1980년대 들어서 윤수일밴드로 면모를 일신하고 ‘제2의 고향’ ‘아파트’ ‘황홀한 고백’과 같은 밴드음악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김수철의 도약을 이끌어준 것 또한 밴드 ‘작은 거인’이었다.
지나간 1970~80년대에 대중음악을 주도한 스타일은 밴드음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밴드 록이었다. 그 시절은 밴드와 록에 대한 열망이 젊음을 견인하고 지배했다. 3인조 형제그룹 ‘산울림’, 구창모와 배철수의 ‘송골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언더그라운드 록 에너지를 집약한 ‘들국화’ ‘부활’ ‘시나위’를 비롯한 많은 밴드들이 다투어 국내 대중음악에 다채로운 연료를 공급했다.
그렇다고 밴드음악이 역사의 위로만 받는 골동품은 결코 아니다. 지금도 인디라는 이름으로 주류 바깥에서 맹약하는 밴드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록이라고 굳이 언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록을 들었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밴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언론과 마니아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여도, 밴드 가치에 대한 담론이 정착했어도 밴드문화는 여전히 변방에서 신음한다. 과거에 보여주었던 대중적 친화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밴드의 부재는 우리 대중음악의 체질을 허약하게 만든다. 먼저 밴드의 생명과 가치는 개성에 있다. 유행을 따라 잠깐 반짝할 수 있어도 독자적인 스타일을 갖추지 못하면 그 밴드는 소멸한다. 밴드가 득세한다는 것은 그만큼 개성적인 사운드가 만발하고 있다는 얘기다. ‘밴드는 하나가 곧 장르’라는 수사가 여기서 나온다. 이 말은 반대로 밴드가 부진하면 유행하는 장르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현재 대중가요판이 다양한 스타일이 쟁패하는 곳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다수가 기획사의 자본이 주조해낸 댄스와 발라드 상품이다. 아이돌 그룹이라도 차이는 엄존한다는 일각의 강변이 존재하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그렇고 그런 음악이란 비판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렇고 그런 음악에서 벗어나려면 음악가 스스로 꾸려낸 창의적 산물이 장려되어야 한다.
밴드의 표어는 자주(自主)란 것이다. 밴드는 구성원들 스스로가 곡을 써서 연습하고 편곡하는 자생의 플랫폼이다. 음원을 만들어 홍보와 마케팅을 하기 전까지의 예술적 과정을 철저히 밴드가 책임진다.
올해 결성 50주년을 맞은 서구 록밴드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가 그토록 오랫동안 숭앙을 받는 것도 그들의 음악이 레코드 자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멤버들의 자주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밴드 활성화의 바람은 결코 소란한 록 사운드에 대한 집착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다. 이 땅에 자주적 음악 풍토가 확립되어 개성이 넘치는 다양한 음악이 즐비하기를 바라는 기대의 추론이다. K팝과 한류가 그려내는 놀라운 해외진출 성공 그래프 한쪽에 일말의 우려가 똬리를 트는 것은 우리 내수시장이 장르 빈약에 허덕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록이든 재즈든 포크든 밴드가 뛰노는 음악마당을 만드는 데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한다. 이게 안되면 우린 눈은 홀리나 개성은 흐릿한 기획상품만을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