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분야가 나름대로 구분의 잣대를 가지고 있겠지만 음악종사자들은 사람을 구분할 때 크게 ‘음악과 가까운 사람’과 ‘음악과 먼 사람’으로 나눈다. 음악과 먼 사람은 일단 경계한다.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무엇보다 음악을 전혀 듣지 않거나 음악에 대한 상식을 갖지 못한 사람과의 대화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알고 있는 어른을 만나면 환하게 웃으며 마음을 연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대 지지자들을 구름떼처럼 몰고 다니는 것은 젊은 세대 입장에서 개혁 가치에 대한 공감 외에 그가 지극히 ‘음악적인’ 대통령이라는 데 있다. 그는 대통령 당선 후 록음악 전문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 도중 미국 흑인사회에 압도적 영향을 미친 음악가 스티비 원더를 언급하면서 결코 암기하기가 쉽지 않은 그의 다섯 명반 제목을 줄줄이 댔다.
지난 1월 한 기금모금행사에서는 심지어 1970년대 솔 가수 알 그린의 ‘렛츠 스테이 투게더’를 한 소절 살짝 불러 유튜브를 뜨겁게 달궜다. 그의 선거모금 행사는 유명 록 밴드들이 잇달아 출연, 록음악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이러니 젊은층이 그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다. 빌보드지는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음악적인’ 대통령 다섯을 뽑으면서 오바마를 맨 앞에 다뤘다.
며칠 남지 않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미 화력이 증명되고 있지만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에서도 ‘2030’은 선거의 키워드로 부상할 것이다. 어느 당이든 이제는 젊은 사람들과 동행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의미 있는 전환점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낮 간지러운 제스처로 비쳐진다. 지역구 후보든 비례대표든 젊은 사람이 나선다고, 또 몇몇 청년을 내걸어 그들의 의견을 정강에 반영한다고 해서 2030세대와 소통이 이뤄지는 걸까.
2030세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대중문화의 세례 속에 성장한 ‘컬처 제네레이션’이다. ‘문화대통령’서태지 20주년이 던지는 의미망이 여기에 있다. 서태지의 랩 댄스와 록 그리고 도발적인 노랫말에 열광했던 키드들이 어느덧 3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됐다. 각 분야에서 실무를 주도하면서 이들은 해당분야의 전문지식에다 대중문화적 사고를 섞어 감성과 이성이 결합한 접근법을 구사한다. 정치인이든 기업의 경영자든 서태지의 노래 ‘하여가’ ‘교실이데아’ ‘필승’을 모르면 그들과의 소통을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청년과 옆에 나란히 앉았다고 그들과 이야기의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아픔과 문화적 시선으로 들어가려는 최소한의 자세와 노력이 있어야 원하는 ‘통’을 얻을 수 있다. 오래전부터의 상상이지만 총선과 대선을 막론하고 각 정당 후보 간의 토론 때에 사회자가 대중문화적인, 음악적인 질의를 하는 유쾌한 장면을 보고 싶다.
질문은 얼마든지 있다. ‘조용필 노래 열 곡을 댈 수 있는지요?’ ‘김광석 하면 어떤 노래가 떠오르나요?’ ‘최근 영미 음악계를 석권한 아델이란 가수 들어봤습니까?’ ‘일본에서 걸 그룹 카라가 최고 인기를 누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힙합 듀오 다이내믹 듀오의 노래를 들어본 적 있는지요?’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을 모르는 과학자요,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을 모르는 예술가라고 했던가. 정치가 살벌하고 건조할수록 정치인은 차가운 이성의 대지 위에 감성의 꽃을 피워야 한다. 섞어낼 줄 알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자기 안에 어떠한 음악도 갖지 않고 감미로운 음의 조화에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인간이야말로 모반과 모략과 약탈에 적합한 인간이다’라고. 이런 사람이 권력을 쥐어 우리를 지휘하게 해서는 안된다. 음악적인 국회의원, 음악적인 대통령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