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선거개입을 규탄하는 ‘8차 국민촛불대회’가 1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4만여 명(경찰추산 9000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날 촛불집회는 서울 뿐 아니라 부산 서면 쥬디스 태화 앞,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 울산대공원 동문 앞, 군산 롯데마트 앞, 제주시청 앞 등 전국 곳곳에서 동시에 열렸다.
특히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 직후 열린 첫 촛불집회 였던 만큼, 선서를 거부한 채 모든 혐의를 부인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주를 이뤘다. 참가자들은 “이런 식으로 국정조사가 무력화된다면 결국 특검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서는 경찰이 국정원 댓글 수사를 축소하는 정황이 담긴 CC(폐쇄회로) TV 영상이 공개됐다. 서울지방경찰청이 국회 국정조사 특위에 제출한 127시간 분량의 영상을 ‘뉴스타파’가 편집한 것이다.
이 영상에서 서울청 사이버수사팀원들은 “(댓글이) 다 확인됐지만, 우리가 발표하는 것은 이것 외에 발표하면 안된다는 조항이 붙은거지?” “그러면 얘가 방문한 사이트는 밝혀도 되요?” “애매한게 ‘오유’에 이 사람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말하는 순간 국정원이 오유에 관여하고 사찰한 게 되니까…” “그러면 그 조건(발표하면 안된다는 조항)에 맞추는 쪽으로 가야겠네”라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특히 김용판 서울청장이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하기 1시간 30분 전에는 “‘발견했습니다’ 그럼 (우린) 다 죽는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집회 참가자들은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경찰의 수사축소 정황이 명백하게 드러났는데도 원세훈 원장과 김용판 청장, 새누리당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며 분노를 나타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장주영 회장은 “어제 청문회에서 보여준 원세훈과 김용판의 모습은 한심함과 오만함 그 자체였다”면서 “국정조사가 이런 식으로 무력화되면 결국 내곡동 특검처럼 독립적인 특별검사가 수사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열린 8번의 촛불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는 유양원씨(78)는 “어제 청문회를 보다가 TV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면서 “이번에야 말로 국민들 모두 힘을 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권업계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진규씨(39)는 “미국 같은 경우는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진상자 처벌은 물론 대통령이 물러나기까지 했는데, 김용판·원세훈은 거짓말만 일삼고 있다”며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답답하고 화가 나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최준호(34)·이송희씨(32) 커플도 “우린 딱히 야권성향이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하지만 이번 일은 우리의 평범한 상식 기준으로도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우린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길 바란다”면서 “어제 국정조사에서 보인 원세훈·김용판의 태도가 국민들을 더 화나게 하는 건데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등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우학교 학생들은 무대에 올라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옳고 그름과 거짓과 진실은 구별할 줄 안다”면서 “학교에서 공부나 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웠고 불의를 보면 분노하라고 배웠다. 이번 일은 아무리 봐도 불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집회에 참석한 조희송양(16)은 “장래희망이 경찰인데, 요즘 경찰의 모습은 그렇게 멋진 것 같지 않다”며 “김용판 청장이 계속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모습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시국회의가 주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광장 근처에서는 보수단체들도 ‘종북세력 척결’ ‘국정원 수호’를 주장하며 맞불집회를 열었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69개 중대 5500여명의 경력을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