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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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원래 우열이 없었습니다. 창업군주만이 홀로 ‘조’로 호칭됐습니다.”

1619년, 효종이 대행대왕(승하한 지 얼마 안돼 묘호가 없는 왕)의 묘호를 ‘인조’로 결정하자 홍문관 응교 심대부가 사납게 반발한다. “창업주만이 조가 되고, 계통을 이은 임금은 모두 종이 된다”는 ‘종법’의 원리를 지적한 <예기> ‘대전’을 떠올린 것이다. 심대부는 한술 더 떠 “세조와 선조가 ‘조’를 칭한 것도 잘못됐다”고 싸잡아 비난하면서, “‘중종’의 예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효종은 조상의 묘호까지 들먹거린 심대부의 상소를 “망령한 의논”이라고 일축했다. 효종은 “공이 있으면 조가 되고, 덕이 있으면 종이 된다”는 <사물기원> 등의 언급, 즉 ‘조공종덕(祖功宗德)’의 원리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종법’이냐, ‘조공종덕’이냐를 두고 그때그때 다른 해석을 내린 것이다. 세조의 경우 어린 조카(단종)를 폐하고 왕위에 오른 만큼 종법질서를 무너뜨렸다. 예종은 부왕이 죽자 “대행대왕께서 단종을 몰아내고 이징옥·이시애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재조(再造), 즉 나라를 다시 세운 공이 있다”며 ‘세조’의 묘호를 끝까지 고집했다. 선조의 묘호는 원래 ‘선종(宣宗)’이었다. 판서 윤근수 등 대신들이 “대행대왕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덕은 있지만 계통(명종)을 이어받았기에 ‘종’이어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와 종의 차이

그러나 광해군은 8년이 지난 1616년, 슬그머니 부왕의 묘호를 선조로 바꿔버린다. 반면 중종은 반정의 공로에도 ‘성종의 계통을 이었다’는 이유로 ‘조’가 아닌, ‘중종’이 됐다. 아들인 인종이 장탄식했지만, 신하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조공종덕’의 원리보다 아버지(성종)를 계승했다는 ‘종법’의 원리가 이긴 것이다. 아무리 ‘조종’의 차이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어도, 임금들은 조(祖)를 더 높이 쳤다(사진은 고종 묘호를 결정하기 위한 삼망단자). 영조·정조는 물론 순조까지도 줄줄이 ‘조’의 대열에 합류했으니 말이다. 영종(영조)과 정종(정조)은 고종 시절, ‘조’의 칭호를 얻었다. 순종이 순조로 바뀐 이유는 ‘서학의 유포와 홍경래의 난을 평정했다’는 것이었다(1857년).

장탄식이 나온다. 선조면 어떻고 선종이면 어떠며, 인종이면 어떻고 인조면 어떠리. 순종이면 어떻고 순조면 어떠리. 그 임금들 때에 백성은 어육이 되었고, 그들의 해골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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