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요한 정신과 전문의가 말하는 '자유로운 삶'

2014.05.29 14:05 입력 2014.05.30 17:51 수정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 ‘자율적인 삶’ : 2014년 5월28일 수요일 오후 7시30분. 경향신문 ‘심리톡톡’ 강연 내용을 추려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수) 오늘 무척 덥네요. 더운 날씨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오늘 할 얘기의 핵심적인 주제는 ‘스스로 살아가라’입니다. 이게 다예요. 더 다른 얘기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인생을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란 것을 모르시는 분 없잖아요. 상담을 업으로 하는데 내담자가 가끔 물끄러미 실망스런 눈빛으로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세요. 결국 내 문제는 내가 풀어야 되는군요. 그분도 처음 오실 때 그 걸 모르고 오시지는 않았을 거예요. 우리도 다 알잖아요.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우리 의식과 다르게 누군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 구원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죠. 계속 날 돌봐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거죠.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자각하는 순간에 변화가 열리기 때문에 그 얘길 꺼내는 순간이 중요합니다. (그 후에) 다른 상담자 찾아가는 분도 있고, 환상이나 기대를 내려놓고 작은 거 하나부터 내가 내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그 때 삶의 전환이 열리는 분도 있고요.

스프링복. 출처 : 위키피디아

스프링복. 출처 : 위키피디아

사진을 보시면 아프리카의 양 종류입니다. 제일 빠른 건 치타인데요. 스프링복은 3m~5m 점프하면서 시속 100km로 달립니다. 이렇게 달려도 시속 60km 사자에게 잡혀 먹힙니다. 이 종의 특성이 처음에는 흩어져서 자기 풀 뜯어먹는데, 흩어지면 좀 위험해지죠. 그러기 때문에 맹수들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무리를 형성합니다. 모여다니는 거죠. 모여다니면 뭐가 단점인가요. 먹이가 부족해지죠. 앞에 있는 애들이 다 먹고 뒤에 있는 애들은 못먹게 되죠. 뒤에 있는 애들이 앞에가서 먹으려고 뛰기 시작합니다. 뒤에 뛰기 시작하면 전체가 뛰기 시작합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점프하면서 광란의 질주 시작합니다. 전체 스프링복이 멈출 줄을 모른대요. 처음에는 앞에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다 뛰니까 앞이라는 게 존재하지를 않잖아요. 계속 뜁니다. 나중에 어떻게 멈추느냐. 비극적인 얘기인데 벼랑에서 멈추지 못하고 떨어져서 죽고 10%가 남습니다. 남은 10%끼리 모여서 무리를 형성하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멍청하지 않나요. 자기가 왜 뛰는지도 모르면서 파멸로 치닫습니다. 우리가 과연 스프링복을 멍청하다고 할 수 있는지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말 알고 뛰어가고 있는지 같이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제가 2007년도에 ‘굿바이게으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게으름 정의가 좀 다릅니다. 일반적 말하는 게으름은 활동량 기준입니다. 바쁘면 부지런하고 활동량이 적으면 게으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거죠. 여기 앉아계신 분들은 예외 없을 것 같은데 다들 바쁘시지 않으세요? 여기 오셨다는 것부터가 가만있지 않고 활동을 많이 하시는 분들일 거라는 뜻인 것 같은데 과연 우리가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면 부지런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1995년부터 정신과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정신과 오셔서 증상을 호소하는 내용, 상태들을 보면서 시대적 변천이 느낍니다. 예전과 리듬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불안하신 게 되게 많습니다. 불안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어떤 증상 가지고 오더라도 공통적으로 불안한 게 항상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안전하지 못하고 위기감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불안하신 분들 특징 중 하나는 상담 오시면 가만 있지 못합니다. 수첩 꺼내서 적거나 티슈를 꺼내서 책상을 막 닦으면서 상담을 합니다. 대걸레 있었다면 닦으면서 상담하셨을 수도 있겠죠. (웃음) 우리 어머니들 보면 하루종일 쓸고 닦고 하시는 분들 계시죠. 그렇게까지 살림 안하셔도 되는데 닦은 데 또 닦고 하시는 분들은 십중팔구 불안이나 분노 차 계신 분들이다. 왜냐하면 가만히 있으면 그 감성들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니까 자꾸 주의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활동을 하는 겁니다. 운동선수, 학생 마찬가지입니다. 시합이나 시험을 앞두고 불안하면 많은 사람들이 활동량, 연습량 늘립니다. 양궁선수라고 한다면 그동안 200발 쐈다고 한다면 불안하니까 300발을 쏘는 거죠. 그럼 스스로가 위안이 됩니다. 더 열심히 하고 있다는 위안이 되는데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연습량이 아니라 실전같은 훈련을 하고 있느냐죠. 양만 더 늘려서 스스로가 뭔가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를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얘기 하는 이유는 스프링복처럼 정신없이 살고 있잖아요. 바쁘게 살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성장하고 나아지고 있는지를 되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안에 대한 가장 흔한 증상은 과잉행동입니다. 행동뿐 아니라 계획도 포함됩니다. 자꾸 계획을 더 많이 세워요. 저는 “부지런한 게으름뱅이도 있다”, “바쁜 게으름뱅이도 있다”고 말했는데요. 활동량이 기준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방향성과 능동성이라는 거죠. 내가 설사 부지런하게 살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가 휴식이 선택이라고 한다면, 능동적 선택이라고 한다면 게으른 게 아닌 거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정신과 진료실에서 증상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여러 가지 변화가 있다고 했는데 최근 들어서 많이 본 증상은 (정식 진단명은 아니지만) 소진증후군이다. ‘번 아웃 신드롬’. 소진증후군은 우울증하고 다릅니다. 열심히 살던 사람이 갑자기 어느 순간에 배터리가 나가는 것처럼 소진상태, 탈진상태가 돼 버리는 거예요. 급격하게 무기력한 상태로 빠져드는 거죠. 갑작스럽게요. 자동차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실은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등에 불이 켜지잖아요. 기름이 바닥나기 전에 주유를 하게 돼서 멈춰서는 일은 없는데 우리는 그런 신호들을 무시하고 잘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막 쓰다가 어느 순간에 탈진상태나 소진이 돼버린다는 거죠. 돌연사 얘기 들어보셨죠. 주변에 너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분들있을 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돌연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전에 여러 가지 신체적·심리적 경고 증상이 다 있었던 거예요. 머리가 아프거나, 이유없이 피곤하거나 소화가 안되거나 가슴 답답하거나 그런 증상이 있었는데 어떻게 했겠어요? 다 무시한 거죠. ‘이 정도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있어’. ‘나만 그런가’. 그러면서 ‘계속 열심히 살아야 한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경고등 켜졌는데도 달린 거죠. 임계점 넘은 순간 돌연사하는 경우도 있는 거죠. 정신과에서도 잘 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옵니다. 특별히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공황발작을 일으키기도 하죠. 이런 공간에서도 갑자기 공황장애가 생기고요. 이런 분들 상담해보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는데 다 경고 증상이 있었다는 거죠. 다 무시하는 거예요.내가 내 마음의 신호들을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을 하고 내가 쉬면 안되고 멈춰서면 안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그렇게 힘든 상황까지 자시자신을 내몰게 되는 거죠.

마치 마부가 있고 쓰러지 말이 있는데 채찍질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말이 쓰러지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쓰러진 말을 일어나라고 채찍질하면서 일어나라고 하는 게 말이 안되잖아요. 조금 회복하도록 돌보는 게 마부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채찍질을 합니다. 잔인하게 느껴지는데요. 내가 나를 대할 때 마부와 말의 관계처럼, 내가 나를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뭔가 마음에 안 들고 내 마음에,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자신을 비난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20~30대 때 힘들면 산에 갔습니다. 산에 가는 이유가 자신에 대한 처벌 같은 이유였어요. 극기훈련하러 갔죠. 지리산에 많이 갔는데 가서 먹는 것도 잘 안먹고요. 지리산 천왕봉 정상까지 얼마나 빨리 갔다오느냐가 관건이었죠. 종주시간을 단축 하는 게 극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날 갔다가 탈진하고 쓰러졌습니다. 그날 울면서 내려왔어요. ‘뭐 하는 짓인가’. 내가 나를 왜 못살게 구는지 울면서 내려왔는데요. 대학 때네요. 그런데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지치고 쓰러지고 무기력하면 어떻게 하면 나를 보살피고 케어해주는 게 아니라 때리는 거예요. 왜 그거밖에 못하느냐고 말이에요. 그 끝은 계속 자기자신을 황폐화시키는 것밖에 안되는 거죠.

최면 받아보셨어요? 최면을 걸고요. “깊은 최면 상태에 남으시는 겁니다. 최면 깨어나면 춤을 춥니다. 혹은 깨어나서 창문을 엽니다”. 그분은 암시 걸린 걸 모릅니다. 깨어나면 실제 일어나서 춤을 추고요 일어나서 창문을 열러 갑니다. 물어보죠. “왜 춤을 추세요?” “왜 창문 여세요?” 그러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으세요? “더워서요” “환기가 필요한데요” 얼마나 그럴싸한 대답입니까. 맞죠. 말 되잖아요. 자기 자신이 판단을 해서 행동한 거잖아요. 그럼 그건 사실인가요. 더워서 문을 열었을까요 왜 열었죠? 암시 때문에 연 겁니다. 다른 이유가 없어요. 암시가 걸렸기 때문에 연 거죠. 그게 자율적 행동일까요? 암시란 타율적 행동이죠. 본인은 몰라요. 자기가 그렇게 대답을 해놓고 그 이유 때문에 했다고 믿고 있는 거죠. 너무 그럴싸 하니까요. 우리가 판단이나 결정을 하고 있잖아요. 스스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게 과연 내 생각, 내 판단일까요. 생각을 해보자는 거죠. 생각을 하다보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다고 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이죠.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내가 명문대 못 나왔건 연봉 작아서건 외모, 집안이 좋지 않건 사교적이지 못하고 유머감각 없고 등등 여러 이유 때문에 인정 사랑할 수 없다는 기준이나 조건이 있는데요. 그 조건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거죠.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생각인가요.

제 이야기인데요. 어느날 아이가 아팠어요. 아내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말자 했고 저는 학교에 보내자고 했어요. 아내가 이해가 안 됐어요. 아내는 “아픈데 집중도 안 되고 나은 상태에 가면 되는 거 아니냐”라고 말했죠. 저는 할말이 없는 거예요. 저는 “약하게 키우면 안되지”하며 역정을 냈습니다. 결국 아내가 아이를 학교에 안 보냈어요. 저는 집에서 나오는데 화가 나는 거예요. 아이를 학교에 보내라고 했는데 안 보냈으니까요. 오전 내내 상담이 안 들려요. 너무 분통이 나고 화가 나서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의사인데, 가도 된다고 했는데 왜 안보내는 것이냐 하고요. 점심을 먹고 포만감이 느껴져서 너그러워졌어요. 자율성도 높아지고요. (실제로 배가 부르는 상태에서 자기조절 능력이 높아집니다. 너무 다이어트 하지 마세요. 웃음.) 암튼 밥 먹고 나니까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제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학교는 가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내 생각인가. 생각할수록 내 생각이 아닌 거예요. 저희 아버지한테 온 것입니다. 아버지가 말단 공무원이셨는데 맹장 수술로 2박3일 빼고 30년 정년동안 하루 빠지지 않고 출근시간 한 시간 전까지 출근하셨던 분이었요. 승진은 가장 늦으셨죠. 저는 부지런한 게 다가 아니구나 일찍이 알고 있었어요. (웃음) 아버지가 1년에 한 두 번 대취하는 날도 있었는데 승진 탈락되셨던 날이었어요. 대취해서 오셔서 ‘너희들은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고 말하시는 걸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요. 그 생각은 제 생각이 아니 거예요. 아버지 생각이 아무런 비판없이 세뇌되고 주입돼서 제 생각인 줄 알고 살았던 거죠. 그게 제 생각인 줄 알고 살았어요. 아내 말이 맞아요. 제가 바꾸면 되겠죠. 하나의 사례만 이야기한 것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내가 이래야 한다’는 조건과 기준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죠. 생각해보면 좋겠구요.

■ 자율성은 3가지 차원

1. 가치적 자율성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고, 나의 판단이 나의 것인가를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서 재정립한다면 자율성 획득한 것입니다. 아무런 비판없이 획득한 것이라면 자기 것이 아니고요. 자기 철학없이 자율적 삶을 찾을 수 없죠. 상담을 계속 하다보면 같은 시간을 하더라도 빨리 변화하는 사람이 있고 굉장히 더디게 변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도 안타까울 정도로 변화가 잘 안 일어나는 사람이 있어요. 중요한 요소가 자기 생각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빨리 변해요. 자기 생각에 대해 비판적인 사고가 안 되면 잘 안 바뀌어요. 자기 가치관, 신념들에 대해서 꼭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과거의 경험으로 일반화된 생각이라고 보시고 비판적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빨리 변할 수 있습니다.

2. 정서적 자율성

인간적인 가장 약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누군가의 보살핌 받도록, 보살핌이 없이는 생존자체가 안 되도록 태어납니다. 돌봐줄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게끔 태어납니다. 아이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필사적인 애착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합니다. 구슬프게 우는 것도 그렇고 빤히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요. 아이가 애착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는 것은 보살핌과 돌봄을 받기 위해서죠. 우리는 상당기간 보살핌을 받고나서 어른이 됩니다. 그러면서 보살핌이 습관이 됩니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것이 정서적 자율성이죠. 일방적인 관계를 찾는 게 아니라 어른과 어른으로서 상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정서적 자율성을 획득한 것이죠.

3. 행위적 자율성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겁니다. 행위적 자율성의 비극이 세월호 사고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사회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요. 세월호 사고는 부끄러움과 책임을 잃어버린 우리사회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는가

(동영상 시청) 트루먼쇼의 한 장면입니다. 트루먼이 자신의 삶이 다 쇼라는 것을 알고 탈출을 시도하죠. 트루먼쇼 연출자가 나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트루먼은 태어날 때부터 입양돼 수많은 몰래카메라로 촬영돼 자신의 삶이 실시간으로 중계됐죠. 인생을 살면서 위기가 오기 마련인데요. 보편적으로 겪어야 할 위기가 사춘기와 중년의 위기입니다. 공통적인 위기라서 누구나 피해갈 순 없어요. 이러한 위기의 공통점은 ‘내가 내 인생을 살고 있지 못한다’는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입니다. 청소년기에서는 자아를 세우고자 하는 자율성 욕구가 생기면서 부모와 갈등을 야기합니다. 청소년은 미숙해서 반항을 위한 반항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반항은 피할 수 없는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중년의 위기도 본질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삶을 살지 못했다’ 집에 가도 내 자리가 없고요. 그런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요즘은 청소년기에서 사춘기가 유예돼서 대학생돼서 나타는 사람도 많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임신하듯이 요즘은 부모님의 중년의 위기 겪고 있는데 대학생인 아이도 늦은 사춘기를 겪어서 갈등이 해결이 안돼요. 서로가 예민해지고 정서가 불안정한 상태라서 충돌을 멈출 수 없는 거죠. 부딪히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내가 잘 살고 있는가, 그런 질문 자체가 중요하죠. 중년의 위기를 잘 못 넘기는 분들은 우울증, 중독의 문제에 잘 빠집니다. 외도에 빠지기도 하죠. 반면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분들도 많습니다. 청바지를 다시 꺼내입고 밴드에 가입하고 바이크를 타고 책을 쓰고, 춤을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주말농장도 하고요. 귀농, 창업, 영성프로그램 참여에 심리학, 인문학 공부도 하고 변화들이 나타납니다. 사람마다 유형별로 중년의 위기가 나타납니다. 자기 세계를 만들어나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격 유형마다 다른 형태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중년의 위기를 벗어납니다. 자기 세계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인생은 힘듭니다. 인간의 욕구 중 자율성의 욕구가 굉장히 중요한 욕구입니다. 밥을 먹는 욕구와 같습니다. 그런데 억압되고 결핍되면 사람이 견딜 수 없다는 거죠.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힘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힘을 동기라고 하죠.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됩니다. 인지, 감정, 욕구. 우리들이 사실 이 3가지의 조화·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감정과 욕구가 마비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신념이나 생각으로 감정과 욕구를 누릅니다. 억압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느껴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내 감정과 욕구를 잘 느낄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겠죠. 원하는 것은 내가 즐겁고 유쾌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으론 느낄 수 없어요.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 우울증’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공했는데 우울해요. 잘 안 맞는 조어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공 우울증을 겪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했는데도 우울해요. 내가 교수도 되고 책도 쓰고 돈도 벌었는데, 목표를 달성했는데 그 순간부터 우울해진 것이죠. 그것이 사실은 본인이 원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을 감정과 욕구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죠. 자기 동기를 찾으려면 감정과 욕구를 잘 느껴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잘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 가지 욕구 :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와 심리적 욕구가 있습니다. 생리적 욕구는 먹고 자고 마시고 색스하고 그런 욕구죠. 심리적인 욕구는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타고난 ‘본성적 심리적 욕구’와 사회적인 관계나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심리적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율성의 욕구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습니다.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가 판단하고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차단되면 마음이나 정신이나 관계가 멍들게 되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보면 ‘자율성의 욕구’와 ‘관계성의 욕구’가 충돌하면서 발생합니다. 상대방의 자율성을 존중 못해줘서 갈등이 생깁니다. 삶의 질이라는 것은 자율성있게 사는 것이고 인간관계는 상대방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죠. 그런다면 인관관계 잘 풀립니다. 내 삶은 자율성있게 살지 못하고 상대방에게는 내가 바라는 대로 하게끔 하고 싶어하죠. 유능함에 대한 욕구는 남보다 잘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재원이나 자원을 잘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관계성의 욕구는 누군과와 연결, 소속되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 3가지는 자기 만족적인 욕구입니다. 사회적인 욕구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해서 내가 더 많은 누리고 가지고 싶은 욕구입니다. 소유, 지위, 인정 욕구 등은 사회적 욕구, 이런 욕구가 강하면 (사회적 욕구는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끝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사회적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다른말로 하면 ‘욕망’이라고 합니다. 타고난 욕구는 기본적인 욕구라고 한다면, 사회적 욕구는 욕망이라고 합니다. 욕망과 욕구를 구분하는 게 좋습니다. 욕망에서 벗어나 욕구를 잘 보면서 사는 게 좋은 거죠.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욕구인지 욕망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담하다보면 인관관계 양상을 볼 수 있는데요. ‘나는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피해자면, 가해자도 있겠죠. 그래서 내 인생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가해자를 떠올립니다. 부모나 형제, 학창시절 친구나 때로는 신적 존재도 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안 놓으려고 합니다. 괴로우면서도 왜 그럴까요? 그것은 환자 역할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환자 역할하면 뭐가 좋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돌봐주고 책임 안 져도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주 아프잖아요. 웃음) 저도 ‘아프자’ ‘아프자’ ‘아프자’ 하다가 입원한 적도 있어요. 피해자 역할 하게 되면 책임 안 져도 되니까요. 나를 망친 사람이 있기 때문에요. 내가 피해자 역할에서 벗어나면 피해받는 게 적은 것이 되니까 싫어해요. 내가 피해자로 남아야 상대의 가해가 입증이 되니까요.

양육자 : 피 양육자 / 가해자 : 피해자 / 통제자 : 피통제자

이런 관계의 패턴을 끊어내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야 자율성을 얻는다고 하죠. 무의식 속에서 가지고 있는 욕구와 기대 때문에 잘 안 보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보입니다. 이런 관계는 공통적으로 구원자를 찾고 있어요. 내 문제를 해결해줄, 내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줄 구원자를 찾고 있어요.

■자율성을 위한 네 가지 과제

ⓐ자기 결정력

첫 번째는 자기가 결정하는 거예요. 당연히 중요한 얘기죠. 자기 생각,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관과 기준이 있으면 선택하기 쉬워지죠. 기준이 없으면 선택 어렵습니다. 가치 피라미드가 있다면 선택 어렵지 않아요. 이것도 저것도 다 중요해 그러면 계속해서 선택하기 어렵죠. 마치 값도 제일 싸면서 재료도 제일 좋은 맛도 제일 좋은 식당을 가려는 마음이 되기 쉽겠죠. 요즘은 20~30대랑 상담하다보면 이런 경우가 있어요. “제가 이 사람하고 결혼해야겠습니까 말아야겠씁니까” “이혼해야겠습니까 말아야겠습니까” “휴학하고 반수해야겠습니까” 본인의 제일 중요한 결정을 저한테 물어봅니다. 저 처음봤는데여. (웃음) 당황스럽죠.

선택도 능력인데요. 이 능력은 고정돼 있는 게 아니라 쓰면 쓸수록 잘하게 됩니다. 선택을 안 해서 그렇지 하다보면 잘하게 됩니다. 마음이 조금씩은 기울어져 있어요. 51대 49. 이걸 하자니 49에 미련이 있는 거죠. 가만 생각해보면 후회없는 선택이 있을까요. 모든 선택은 후회하게 돼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선택이라고 볼 수 없어요. 모든 선택과 결정에는 후회와 미련이 따릅니다. 너무 당연해요. 후회없는 선택은 꽃이지지 않는 걸 바라는 것처럼. A를 고르냐 B를 고르냐 그 순간에 잘한 선택과 못한 선택이 판별되는 게 아니고 선택한 A를 좋은 결과가 이어질 수 있도록 더 노력할 때 그 과정에서 좋은 선택이냐 아니냐가 이어지는 것이죠. 그 선택의 순간에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카메라 산다고 할 때 선택의 목적 좋은 추억 담는다는 목적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하면 할 수도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고 어렵더라도 선택을 했으면 좋겠고 설사 잘못 선택했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그 안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학습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요.

ⓑ 자기 동기화

중요한 얘기 하나 할게요. 자기 안의 ‘열정’을 만나고 싶잖아요. “내안의 열정을 어떻게 만날 수 있나요”라고 저에게 물어요. 근데 실망스런 답변부터 드리면 만나기 어렵습니다. 많은 대학생, 20대 보면 신종질환이에요. 열정노이로제 갖고 있습니다. 열정 대상을 찾고 싶은데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거예요. 물어봅니다. 가슴뛰는 일을 어떻게 만나냐고요. 근데 이건 이 말과 똑같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해라”. 우리 대부분의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일까요. 밍숭맹숭하지 않나요. 첫눈에 반해서 기를 쓰고 집안반대에 연애하고 그러나요. 처음엔 좀 그래 뭐 이정도면 괜찮지 그러다보면 또 헤어져서 다른 사람 만나기도 귀찮고 그냥 그러다가 결혼하고요. 제 주변에선 그러는 것 같던데요. 열정을 만나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러면 만날 수 없느냐? 아니에요. 만날 수 있어요. 첫눈에 반하지 않는 사랑은 가슴뛰는 사랑이 아닌 건가요. 그건 아니죠. 처음엔 밍숭맹숭 했지만 나중엔 가랑비 젖듯이 젖어들어서 어느 순간엔 가슴뛰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진행속도가 느리죠. 어느 순간에 이성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내적동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나에게 즐거움을 줘야 하죠. 내가 뭔가를 하기로 하는데 두렵다면? 내적동기가 있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 행위 자체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그 결과로 뛰어들 수가 있겠죠. 내적동기는 말 그대로 행위 자체로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이게 우리가 얘기하는 열정이죠. 외적 동기는 여기 오신 분들 중에도 외적 동기(회피, 보상, 당위)로 오신 분들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낮은 단계가 회피입니다. 안 잘리기 위해 일하는 거죠. 보상은 인센티브 받으려고 하는 거죠.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요. 공부하면 핸드폰 바꿔주니까 이렇게 해서 공부하는 게 물질적 보상이죠. 정신적 보상은 내가 인정을 받으려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 하는 거죠. 특히 자기 존재감이 낮을수록 내 스스로가 일을 통해서 존재감을 입증해보려는 강박적 행동을 하죠. 그 다음은 당위입니다. 누가 볼 때 안 볼 때 차이 있고 결과 좋을 때 아닐 때 차이가 있습니다. 내적동기와 외적동기가 기계적으로 분리돼 있지는 않습니다. 내적동기가 외적동기로 내려올 수도 있고 외적 동기가 내적동기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열정 못느꼈더라도 나중에 만날 수가 있어요. 대개 탁월한 업적 남긴 이들의 어린시절 보면 우리랑 다르지 않습니다. 5살때부터 작곡하고 아주 어릴 때 마굿간에 가서 알을 품고 있고 그런 걸 다 하는 게 아니에요. 대부분 위인들은 부모나 선생 손에 이끌려서 하는데 처음엔 흥미를 못 느낍니다. 그런데 하다보니까 향상이 되는 거예요. 향상되는 거 자체가 나에게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남자분들 당구 치시나요? 몇점 정도 되면 당구 흥미를 느낍니까? (100점) 그렇죠. 그 전까지는 돈도 뜯기고 재미가 없어요.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100점 정도 되면 당구를 사랑하게 돼요. 당구치고 싶은 거예요. 모든 게 다 그렇다는 거죠. 처음부터 열정을 만날 수는 없어요. 그걸 하다가 향상되는 느낌이 들 때 보다 더 내 안의 열정을 만날 수 있다는 거죠. 향상되는 느낌을 만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좀 하다가 그만두고 다른 거 찾고 그렇게 해선 열정 만날 수 없어요. 실력 향상되는 경험이 꼭 필요한데 시간과 노력에 꼭 비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평적이다가 어느 순간 수직 상승합니다. 그 수평적 정체기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러 계단들을 견뎌야 하죠.

그 다음이 중요도 동기. 디자이너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유학가야돼죠. 가려면 언어 해야되고, 언어 자신없지만 영어가 중요하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영어를 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향상이 이뤄지고 그다음에 열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의미동기인데 이 일이 가치있다고 느끼게 되면 내 안의 열정을 만날 수 있죠. 아이가 아토피가 걸린 걸 알았을 때 그 전까지는 환경보호 신경 안 썼는데 아이가 아픈 뒤로 느끼게 되고 일회용품 많이 쓰다가 이 가치를 느끼면서 재활용하고 만든 거 누구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점차적으로 그 일 사랑하게 되고, 보다 더 향상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의미와 가치, 필요성 이런 것을 만나게 되면 얼마든지 열정을 가질 수 있죠. 처음에는 흥미롭지 않게 느낀 것도 내적 동기가 생길 수 있어요. 열정은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거죠. 서서히 맞이할, 시간 노력을 들였을 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자기 조절력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다른 얘기는 다 잊어비려도 이 얘기 만큼은 잊지 마세요. 인간은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가장 약한 존재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가장 많은 성장 발전을 하고 살아가죠. 인간이 다른 가장 큰 이유를 저는 뛰어난 학습능력 때문이라고 봅니다.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태어나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거죠. 학습능력에서 핵심은 바로 네 글자입니다. 시행착오. 내가 뭔가를 시도를 했다가 원한 대로 결과가 안나왔어요. 에러가 났어요. 그럼 다시 시도하고 또 에러가 나요. 재시도하죠. 어느 순간에 성공합니다. 아이 키우는 분들, 키우지 않더라도 잘 알 것입니다. 아이 발달 과정은 시행착오를 무수히 반복하죠. 아이가 말을 하기까지 아이가 혼자 일어서기까지 시행착오 거치지 않는 아이 있을까요. 어느 순간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엄마, 젖 좀 주세요” 이렇게 얘기할 수 없어요. 얼마 안 돼서 벌떡 일어설 수 없어요. 멋있게 모빌 낚아챌 수 없어요.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속에서 감각 발달시킵니다. 시행착오 겪으면서 어느 순간 벽을 짚고 일어서고 버벅거리면서 엄마라고 말을 하고 그리고 모빌을 찾게 되는 거죠. 학습의 기본과정은 시도나 재시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우리 안의 내재돼 있는 힘이라는 거죠. 그런데 아이 때는 갖고 있는데 어른이 되면 이 학습능력이 어떻게게 됩니까. 안타깝지만 점점 잃어갑니다. 시도 -> 에러 -> 재시도가 아니라 시도 에러에서 끝나죠. 요즘 유행어, 개그콘서트 보면 나오죠. 시도, 에러, 끝.

이런 경우가 무수히 많죠. 한참 지나서 위기감 느끼고 거창한 계획 세웁니다. 한참 되면 말았다가 또 세우고요. 스프링복처럼 반복적인 패턴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조절력입니다. 자율이라는 것은 내멋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잖아요 누군가 내 삶에 통제당하기 싫기 때문에 자기 규율을 가지고 사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조절력이라는 게 분명히 필요한 거거든요. 자기 조절력의 핵심은 내 계획대로 하는 게 아니고요. 자기조절의 핵심은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안 된 이유를 살피고 다시 시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획대로 하는 것을 의지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재시도 능력을 향상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끝이 아니고 내가 학습능력을 발휘할 시간이 온 거죠. 그런 부분 보완해서 할 수 있죠. 처음부터 계획을 세울 때는 실패를 예측하고, 실패했을 때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질지 생각해야 해요. 미리 생각을 하시고 나아가는 게 필요합니다. 중단없는 전진이나 후퇴 없는 전진은 존재하지 않아요. 모든 변화의 과정은 후퇴, 정체 등 이런 위기들, 에러들이 분명히 자연스런 과정에 포함돼 있고 그 속에서 보다 더 자기조절력을 획득해 나갈 수 있습니다. 뭔가를 하고자 할 때 계획대로 해야겠다 하지 말고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중요하죠. 항상 강조하는 포인트입니다. 내가 뭔가 뜻대로 안됐지만 포기 안하고 보완해서 재시도하면서 뭔가를 성취한 경험 한번 가지게 되면 예전의 삶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학습능력 비약합니다. 정신과 치료도 마찬가지예요. 도망쳤다가 인간관계 갈등 참고 참고 어느 순간 단절되죠. 상대방과 얘기를 하고 당신이 이렇게 해서 속상했다 그래서 갈등을 풀어보는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 인간관계 능력 비약적 발전합니다.

ⓓ 자율성 환경

자율성이라는 것은 나 혼자 자율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되는 게 아니고요 세월호 선원들 보시면 알겠지만 타율적인 환경에선 아무리 자율적 사람들도 타율화가 되겠지요. 자율적 환경 중요합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자율적 존재라고 믿음을 가질 때 자율적인 환경이 형성되죠. 많은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은 자율적인 존재로 믿지 않습니다. 시켜야만 하고 안 지켜보면 공부 안할 거다 생각하죠. 경영자들도 사람을 자율적인 존재로 믿는 사람들은 회사 분위기가 자율적입니다. ‘시켜야지 말 듣는다’는 마인드를 가진 경영자의 회사에 가면 통제가 많고 타율적 조직문화가 형성이 돼 있죠. 똑같죠. 우리가 자율적 존재라고 믿으면, 보다 더 자율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야 자율성이 보장되는 환경이 만들어지죠.

■질의응답

Q : ‘깊이 연결돼 있을수록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말 뜻은 무엇인가요?

인간관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핵심은 하나는 ‘저 사람이 나를 알면 실망할 것이다’ 이런 두려움이고요. 다른 하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저 사람이 나를 휘두를 것이다, 지배할 것이다, 통제할 것이다’ 이런 두려움입니다. 이게 인간관계에서의 두려움이죠. 정말 우리가 부모, 연인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소유하려 하고 집착하는 관계가 있죠. 그래서 사랑하면 자율성 침해받기 쉽다고 생각하잖아요. 사실은 인간은 애착관계 이후에는 탐색관계로 넘어갑니다. 애착이 잘돼 있는 아이는 믿음이 있는 거죠. 내가 위험에 빠지면 엄마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대문에 궁금한 것이 생기면 욕구대로 갑니다. 애착관계가 잘 형성 안 된 아이는 잘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나더라도 뒤를 돌아봅니다. 엄마가 맘에 들어하는지 눈치를 보게 되죠. 우리가 어려서부터 결국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살게끔 돼 있어요. 먹고 살려면 타인의 욕망에 부합해야 하기 때문에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욕구가 내 욕구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처럼. 건강한 애착이 형성된 아이는 자기 욕구대로 탐색하죠. 깊이 연결될수록 안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탐색을 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되돌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죠. 안전하다는 느낌이죠. 무언가 도전하는데 망설이는 것도 걱정하는 것도 ‘준비 준비’만 하는 사람들은 잘 들여다보면 애착손상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여기서 잘 안 되면 끝장이다,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단절감 때문에 무언가를 시도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이라는 자체의 역기능을 봐서 그렇지 건강한 사랑은 자율성을 해치지 않고 차이를 존중하고 숨쉴 수 있는 거리가 있죠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누군가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죠. 건강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깊이 연결될수록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Q : 제 아이가 2살, 4살입니다. 저희가 부모로서 공중도덕이라든지 가치관을 훈육하고 싶은데, 4살 아이가 고집을 부리고 떼쓰기를 해서 ‘감정고침’이라는 책도 보고 하는데 대화가 안돼 고민이 있어요.

말끼를 알아들을 나이는 아니죠. 예를 들어서 아이들이 양치질 하기 싫어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하죠. 왜 스스로 하게 되느냐는 것이죠. 아이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는 순간에는 더 이상 부모가 시켜서가 아니라 습관이 되는 것이고 자율성 습득이 되는 것이죠. 1회적인 교육으로 되는 것은 아니죠. 왜 필요한지 반복적으로 설명해줘야 합니다. “이를 닦아”라고 했는데 바로 닦지 않는 아이들의 그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게 필요합니다. 아빠가 이를 바로 닦으러 가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안다고, 이해해 주는 게 필요하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왜 필요한지 반복적으로 설명해줘야 하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최대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 닦을래, 어느 것부터 할래 등 아이에게 선택의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하죠. 자율성의 선택을 기획을 주는 게 필요합니다.

Q : 부부간에 대화할 때 서로의 가치관이나 철학을 존중하더라도 충돌이 있을 때 서로 자기 신념이라든지 설득을 시켜려다 말싸움만 있어서요. 어떻게 상대의 자율성 존중해야 하는지요. 흰색과 검은색 섞어서 회색을 만드는 게 꼭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중요도가 필요합니다. 시시비비 가리는 게 중요한지, 서로 연결되어 가는 게 중요한 것인지 말입니다. 자녀와 부모 관계도 그렇고요. 우리가 자꾸 시시비비를 가릴려고 하는 거잖아요. 감정적으로 틀어져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해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죠. 시시비비 가리는 것보다 서로 연결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차이를 인정해주는 게 중요하죠.

Q : 제가 올해 초 국가개발국에 파견나는 것에 지원했습니다. 아프리카 스와질랜드로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에이즈감염이 높은 나라라고, 절대 가면 안된다, 가면 죽는다고 저에게 볼 때마다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집에 가기 싫을 정도로요. 제가 에이즈감염 관련 블로그 글을 메시지 보내주고 안심하라고, 쉽게 감염되는 게 아니다고 메시지를 보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가긴 갈 것인데, 어떻게 하면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요.

하나의 사례를 말해볼게요. 85학번인가, 86학번인가 안동 출신의 여자분이 당시 유럽 배낭여행 가고 싶다고 하니까 보수적인 집안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이 여자 분이 굉장히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하다가 10페이지짜리 편지를 아버지에게 썼습니다. 안전에 대한 문제, 또 우려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자세히 글로 쓰고 꼭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가 허락을 했고, 그 뒤에 그 분은 습관이 생겼다고 해요. 내 부탁을 상대방이 거절하면 한 번 끝내는 게 아니라 여러번 시도하는 거죠.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정성입니다. 부모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보고요. 말이 어렵다면 글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Q : 제 가족 중에 정신과 치료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어서 대화 시도하면 자기 문제점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점이 ‘집에 돈이 없어서’ 등등 원인을 밖에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해결해줄 수는 없는데요. 그런 사람과는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게 풀어줘야 도움이 될까요.

그 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외부에 원인 두고 위안 삼으려고 하는 거죠. 자기가 잡은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인 줄 알지만 그것을 버리라고 할 수 없죠. (그렇게 살아가도록 그냥 둬도 되나요?)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고 변화의 순간이 올 수 있죠. 다른 동아줄 주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놓으려고 하는 것도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위로만 해주면 되나요?) 사실은 조언하는 것은 쉽지만 들어주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조언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 편에 서서 들어주는 것이 더 힘드실 거예요. ‘지켜만 준다는 것이 방치 같이 느껴지지만’ 같이 있어주는 것이 중요하죠. 감정적 연결이 중요합니다. 내 편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신뢰적인 관계가 형성돼야 합니다. 그 타이밍에서는 이야기 해도 되죠. 항상 연결이 중요하죠.

Q : 제가 육아하는데 친정 어머니의 도움을 받게 되고 여러 관계를 돌아보게 되는데요. 저와 엄마의 관계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주는 것을 아는데도, 먼저 나를 세워야 하는데 그 순간도 아이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면 지칩니다. 내 변화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요.

결국 인식한다고 변화되는 건 아니고요. 정신치료를 하더라도 말 그대로 분석이나 통찰의 과정이 필요하고 훈련의 과정도 중요하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습관화가 돼 있어서, 안다고 해서 변화가 바로 있는 것은 아니고요. 변화의 과정은 훈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훈련의 과정은 원하는 것으로 바로 가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반복하면서 후회도 하고 점차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훈련이 되려면 그런 환경이 돼야 하고요. 그런 관계 속에서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게 쉽지 않지만 감정적 동요, 특정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하면 관찰이나 기록도 해두면 좋고요. 삶의 큰 변화만 생각하고 거창한 계획으로만 시도하려고 하는데 의지력 훈련은 작은 실천들을 강조합니다. 1~2주 정도 훈련을 하는 거죠. 간단한 것들을 훈련합니다. 2주간 집에 들어와서 발코니 신발을 정리하는 것을 먼저 한다든지 다이어트 중인데 1.5리터의 물을 2주간 마신다든지. 경청이 안 된다고 하면서 하루 한 통만 전화에 신경써서 한다든지요. 작은 실천을, 1~2주만 꼬박꼬박하고 노력해보세요. 생활의 작은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들이 결국엔 자기 인생의 자기조절력을 키울 수 있는 거죠. 작은 거 하나 하나 조금씩 노력을 하는 것이 삶의 자기 조절 능력이 필요하죠. 감정조절 문제도 스스로 이런 식으로 자기 조절을 가지게 되면 가능해집니다. ‘좋은 엄마’라고,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작은 부분에서 노력하면 연쇄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가 말하는 '자유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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