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2년(태조 25년) 일어난 만부교 사건은 고려 475년 역사 가운데서도 최대 미스터리로 꼽힌다.
“고려는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유배시키고, 낙타 50필을 만부교 밑에 매달아 굶어죽게 했다.”(<고려사절요>)
태조는 “거란이 발해를 하루아침에 멸망시켰으니 무도함이 심하다”는 이유를 꼽았다. 이 대목에서 상당수 연구자들은 고구려·발해의 계승자로서 고토 회복을 염두에 둔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태조 왕건은 거란을 공존해서는 안될 나라로 여겼다. 태조는 이른바 ‘훈요 10조’를 남기면서 특히 거란을 겨냥한 조목을 2개나 남겼다. “거란은 짐승의 나라이며(4조), 강하고 악한 나라(9조)이니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고 늘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부교 사건의 대가는 컸다. 고려는 3차례에 걸쳐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는다. 멸망한 지(926년) 16년이나 지난 발해를 운운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끊은 것이 과연 정상적인 외교였을까. 고려 당시에도 태조 외교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만부교 사건 후 360여 년이 지난 후 충선왕(재위·1308~1313)이 대학자인 이제현에게 묻는다.
“낙타 50마리 키우는게 백성들에게 무슨 피해가 간다고 굶어죽였을까. 싫으면 돌려보냈으면 될 일을….”(충선왕)
“글쎄요. 거란의 간계를 꺾으려 한 것인지,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이제현)
이제현은 정답은 아니지만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태조대왕의 뜻을 알 수 없지만 임금(충선왕)이 묵묵히 숙고하고 힘써 행하는 것으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역사는 진실과 상관없이 배우는 자의 몫임을 알게 된다.
예를들어 1468년 조선조 성종이 “(값비싼 동물인) 낙타를 중국에서 구입해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자 대사헌 이경동은 이제현의 언급을 인용, “만부교 사건은 ‘사치하지 말라’는 고려 태조의 가르침이니 전하도 명심하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경동은 거란 부분은 쏙 빼고, 사치를 경계한 가르침으로만 만부교 사건을 해석한 것이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우스갯소리가 나돈다. ‘태조가 거란이 보낸 낙타를 왜 굶겨죽였을까’를 묻는 역사문제에 어느 학생이 ‘메르스 때문’이라 답했다는 것이다. 마냥 웃기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메르스의 교훈을 얻을 수만 있다면 누가 어떤 답을 써낸들 무슨 상관인가. 역시 역사는 배우는 자의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