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욕의 정치를 끝낸 리더십, 에보 모랄레스…스벤 하르텐 지음·문선유 옮김 | 예지 | 357쪽 | 2만3000원
흔히 ‘코카잎’하면 바로 마약을 떠올린다. 하지만 식물로서의 코카와 마약 코카인은 다르다. 코카잎은 안데스 지역에서 7000년 이상 약재 등으로 이용된 식물이다. 가정에서 코카를 재배한 역사도 1000년이 넘는다. 코카엔 비타민, 철, 단백질 등의 영양소와 설사를 멎게 하고 혈압을 조절하는 성분이 함유돼 있다. 뿐만 아니라 코카는 혈액의 산소 흡수를 높이기 때문에 안데스 주민과 고산지대 여행자들은 코카잎을 씹거나 차로 우려 마셔 고산병을 예방한다. 코카는 전통 의식, 기도 등에 사용되는 ‘신성한 작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코카는 안데스 산맥을 끼고 있는 볼리비아 농민들에게는 유일한 환금작물이다. 볼리비아 농민들이 코카 재배로 얻은 수익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해마다 평균 11%씩 상승했다. 코카의 활용성과 경제성은 한국의 인삼이나 홍삼에 비유할 수 있다. 코카 역시 샴푸, 비누, 감미료, 치약 등의 파생상품을 낳는다. 코카잎은 바로 볼리비아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코카가 언제부터인가 ‘코카인’을 연상시키기 시작했다. 코카잎이나 코카 가루엔 마약성분이 없으며, 코카를 코카인으로 바꾸려면 복잡한 화학적 생산과정이 필요한데도 코카가 곧 마약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선량한 코카 재배농민들도 마약을 재배하는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됐다.
이는 미국이 벌인 일명 ‘마약과의 전쟁’ 때문이다. 자국 내 마약 문제가 심각해진 미국은 불법 마약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1989년 부시 행정부는 마약 문제의 원인으로 원료 생산지, 즉 볼리비아, 콜롬비아, 페루 등을 지목하고 코카 재배금지, 코카 파생상품 금수조치를 펼쳤다.
볼리비아는 ‘코카’ 생산지일 뿐 ‘코카인’ 생산지가 아닌데도 미국의 적이 됐다. 볼리비아 정치인들은 원조를 받는 대가로 미국의 조치를 성실히 수행했다. 결국 마약과의 전쟁은 볼리비아 등 중남미 국가들의 주권 상실, 농촌경제 파탄이란 결과만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다.
부당한 미국의 조치에 맞서 ‘신성한’ 코카잎 수호를 외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에보 모랄레스 현 볼리비아 대통령이다.
볼리비아에서 현장연구를 진행한 저자 스벤 하르텐은 <탐욕의 정치를 끝낸 리더십, 에보 모랄레스>에서 모랄레스 대통령이 어떻게 민중들의 열망을 한데 모으고,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또 연대를 이끌어 냈는지,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철학을 구현했는지 그 리더십을 분석한다. 모랄레스의 이른바 ‘민중 리더십’은 코카재배자운동을 통해 키워졌음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파탄 난 볼리비아 코카 농장과 경제를 지키고자 코카재배자운동에 뛰어든 모랄레스는 “합법적, 도덕적, 과학적 주장 등 가능한 모든 주장으로 우리는 코카잎을 수호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존엄과 주권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85년 이래 코카재배자들과의 대화를 거부한 볼리비아 정부에 코카 합법화를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우선 코카는 코카인이 아니며, 볼리비아에선 코카를 코카인을 만들 용도로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코카 소비가 가난한 농민의 생계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는 코카를 단순한 작물이 아닌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빼앗긴 볼리비아 주권의 상징으로 내걸었다. 저자는 모랄레스가 코카를 중심으로 볼리비아 민중의 분노와 울분을 효과적으로 결집했다고 본다. 그가 이끄는 코카재배자운동에서 코카는 그 자체가 침탈당한 자원이자 미국과 결탁한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소외된 볼리비아 민중, 빼앗긴 국권을 의미했다. 서민을 외면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정치 무력감’에 시달리던 볼리비아 민중은 ‘소박한 빨간 풀오버 스웨터’를 즐겨 입는 모랄레스에게 열광했다. 민중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모랄레스는 2005년 볼리비아 토착민 출신 최초로 대통령이 됐으며, 지난해엔 3선에 성공했다.
대통령이 된 모랄레스는 ‘한 발은 현실 정치에, 다른 한 발은 길거리 정치에’ 두며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뿌리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2006년 1월 첫 임기를 시작하며 ‘신헌법’을 제정해 볼리비아 내 일부 지역의 코카 생산을 허용하고 코카를 문화적 유산, 재생가능한 천연자원으로 규정했다.
자원 수호는 곧 ‘존엄’과 ‘주권’ 수호라는 모랄레스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에 협력한 볼리비아 정치인들은 ‘탐욕’의 표상이다. 코카에 대한 권리 되찾기는 곧 주권과 국민 존엄의 회복이며, 제국주의적 침해에 탐욕으로 부응한 구닥다리 정치를 몰아내는 것이 된다.
남미 3개국을 순방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8일(현지시간) 볼리비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코카잎, 캐모마일 등으로 우려낸 차를 마셨다. 남미 출신 교황은 코카잎의 상징성, 정치·경제·문화적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코카 차를 마신 그의 결정이 볼리비아 전통과 코카잎이 상징하는 것에 대한 지지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