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됐다. 2015년 6월16일부터 2016년 7월19일까지 1년여 동안 거칠 것 없이 질주해 온 트럼프에게 이제 남은 관문은 단 하나. 7월28일쯤 민주당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될 힐러리 클린턴과의 마지막 승부만이 남았다.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11월8일까지 남은 기간은 약 100일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미국은 물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대이변을 연출할지, 아니면 막말과 기행으로 뒤덮인 ‘막장 드라마’만 보여주다 사그라들지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다.
출마선언 당시만 해도 지지율이 5%로 되지 않던 트럼프가 대선후보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첫 경선 아이오와부터 시작된 트럼프의 질주에 공화당의 최대주주이자 정치 명문인 부시 가문의 젭 부시도 일찌감치 나가떨어졌고 공화당 주류의 지지를 받았던 마르코 루비오도 손을 쓰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테드 크루즈도 결국 경선을 포기하며 두 손을 들었다. 유례를 찾기 힘든 중재 전당대회까지 열어 트럼프의 대선후보 지명을 막아보려던 공화당 지도부도 트럼프가 “사실상 당의 대선주자”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6월 출정식 때부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까지 1년여간 세계를 뒤흔든 트럼프의 대선 도전 여정을 되짚어 봤다.
■2015년6월16일 트럼프타워
지난해 6월16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68층짜리 트럼프타워.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쌓아올린 부를 상징하는 곳이다. 트럼프가 이날 밝힌 재산은 87억달러(약 10조500억원)로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2배가 넘었다. 트럼프는 이곳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를 내걸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이 아는 트럼프는 유명 리얼리티 TV프로그램 ‘어프렌티스’의 진행자였다. 트럼프타워의 대선 출마 선언장은 ‘어프렌티스’의 회의실로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TV프로그램이 아닌 현실 정치에서 드라마를 써보이겠다고 호언하자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출마 직후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 공화당 유권자들의 64%는 트럼프가 ‘재미삼아’ 대선에 출마를 선언한 것이라고 여겼다. 지지율은 5%도 되지 않았다.
■기웃거리던 정치판, 이제 전면에
정치적 스펙트럼도 광범위하다. 트럼프는 1987년까지 민주당원이었다. 이후 1999년까지는 공화당원이었다. 1999~2001년에는 개혁당에 가입해 2000년 대선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경선에서 탈락했다. 트럼프는 이후 민주당(2001~2009년)→공화당(2009~2011년)→무소속(2011~2012년)을 거친 끝에 공화당으로 돌아왔다. 공화당계 정책연구기관인 미국기업연구소의 토마스 밀러는 “트럼프의 정치적 입장보다 그의 머리 스타일이 훨씬 더 영구적일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 트럼프와 인연을 맺은 특별고문 마이클 코헨은 2013년 뉴욕포스트에 “트럼프가 2016년 대선 출마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조사에 1백만 달러를 들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출마 선언 1주일 만에 지지율이 두자리수로 올라섰고 7월 초에는 이코노미스트-유고브의 여론조사에서 15% 지지율을 기록해 젭 부시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공화당 주류와 언론의 비아냥에도 트럼프는 미국의 현실에 불만을 품은 ‘좌절한 백인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었다. 8월 첫 공화당 후보 TV토론이후에는 여성 앵커 비하발언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30%를 넘어섰다. 이제 언론들도 심상치 않은 ‘트럼프 현상’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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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화요일로 대세 굳혀
트럼프가 2월 첫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2위를 차지하자 언론들은 ‘절반의 승리’라며 트럼프의 인기에 거품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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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은 틀렸다. 트럼프는 뒤이은 뉴햄프셔, 사우스캐롤라이나, 네바다를 모두 휩쓸었고 3월1일 ‘수퍼화요일’ 경선에서 조지아, 테네시, 버지니아, 앨라배마 등 7개주를 가져가며 대선후보 자리에 성큼 다가섰다. 뒤이은 경선에서 트럼프는 종교, 교육, 소득, 연령에 국한되지 않고 유권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음을 증명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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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주류가 루비오에 지지를 몰아주고 중재 전당대회를 추진하는 등 견제에 나섰지만 트럼프 대세론을 막을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트럼프는 4월 19일 뉴욕주 경선에서 압승을 했다. 유세장 폭력사태, 연이은 막말 파문, 측근의 기자 폭행 등 악재들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이 승리를 통해 공화당 주류에 한 방을 날렸다. 뉴욕 경선 직전에 트럼프 측은 ‘책임있는 대선 후보’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캠프 진용을 다시 짜고 공화당 주류의 기존 방식에 좀더 가까운 선거전략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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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이제 민주당의 유력 주자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수적 여론조사기관 라스무센이 5월2일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민주당의 경쟁자가 될 힐러리 클린턴을 41% 대 39%의 지지율로 누른 것으로 나타났다. 본선경쟁력까지 입증한 트럼프는 이제 거칠 것이 없게 됐다.
■꿈이야 생시야…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트럼프
테드 크루즈 후보가 경선을 포기하면서 그는 사실상 대선 후보 자리를 꿰찼다. 심기가 불편해진 사람들은 공화당이 배출한 역대 대통령과 대선 후보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었다. 5월5일 CNN 방송은 2012년 후보 미트 롬니, 2008년 후보 존 매케인, 2000·2004년 후보 조지 W 부시, 1988년 후보 조지 H W 부시 등 최근 30년간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사람 대부분이 전당대회 불참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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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후보 중 한 사람과 ‘공화당 대표선수’라는 격의 차이일까. ‘막말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트럼프도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며 일부 백인들의 반(反) 히스패닉 정서를 자극하던 트럼프가 사실상 대선 후보 지위를 얻게 되자 멕시코 음식인 타코를 먹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난 히스패닉을 사랑한다”고 한 것이다. 트럼프의 ‘타코 먹방’이 가식인지 아닌지는 미국 인구의 17%를 차지하는 ‘캐스팅보터’ 히스패닉 유권자들이 판단할 것 같다.
친(親)서민 발언도 눈에 띄었다. 최저임금 인상을 시사하는가 하면 ‘부자 증세’도 약속했다. 제목만 보면 민주당 대선 주자인 ‘사회민주주의자’ 버니 샌더스의 공약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발언들이었다. 트럼프는 5월8일 NBC방송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시급 7.25달러(약 8500원)로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최저임금이 어느 정도 올랐으면 좋겠다”고 했고, “내가 내세우는 세금공약의 핵심은 중산층·기업인 감세다. 부자들 세금은 다소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무슬림의 미국 입국 자체를 막는 방안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한 사람이다. 그런 그를 난처하게 만든 일이 영국 런던시장에 무슬림이 당선된 것이다. 트럼프는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라며 말을 주워담기 바빴지만 사디크 칸 런던시장 당선자는 한 수 가르치기라도 하듯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트럼프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무슬림 입국 반대 트럼프 “런던시장 당선자 칸은 예외”
트럼프가 대선판을 흐려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본선 경쟁 상대로 유력한 힐러리도 그에 못지 않은 ‘비호감’ 후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16년 미국 대선이 최선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아니라 최악의 대통령을 피하는 투표가 될 거라는 관전평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의 47%는 ‘힐러리가 당선되는 걸 원하지 않아서’ 트럼프를 찍겠다고 했다. 힐러리 지지자의 46%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힐러리를 찍겠다고 한다.
마냥 ‘이상한 사람’ ‘기인’으로만 트럼프를 바라보는 것은 트럼프 신드롬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한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어릿광대라고 하기에 트럼프의 제안은 구체적이다. 파격적 주장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온 백인 노동자들에게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 현상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른바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 역시 포퓰리즘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 현상은 진전일까 퇴행일까. 민주주의의 역설을 넘어선 민주주의를 고민할 때”라고 말한다.
▶[이택광의 왜?]트럼프 현상과 ‘정치적 올바름’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가는 곳마다 트럼프 비판에 열과 성을 다했다. 럿거스대 졸업식에서는 “무식함은 미덕이 아니다”라며 트럼프를 겨냥해 ‘일격’을 날렸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도 “트럼프는 국제 현안에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거나 트집쟁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일이 아니면 트윗으로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오바마, “무식함은 미덕이 아니다” 트럼프에 ‘일격’
▶오바마 “트럼프 때문에 세계정상들 당혹” 트럼프 “난 땡큐”
공화당 후보 트럼프에 대한 반발의 강도도 점점 높아졌다. “트럼프가 지른 불에 미국이 타고 있다”며 미국 유명 작가들이 온라인 서명운동을 시작하는가 하면, 트럼프 유세장 바깥에서 심야 투석전까지 벌어지는 등 갈등과 충돌이 첨예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2016 미국의 선택]“트럼프는 히틀러” 유세 현장서 성난 시민 수백명 투석 시위
트럼프 열풍이 미국만의 특수한 현상도 아닌 것 같다. 오스트리아, 필리핀, 러시아, 터키, 중국, 이스라엘에다 프랑스, 독일까지 세계 곳곳이 파시즘 부활의 전조로 몸살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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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9일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데이를 하루 앞두고 워싱턴에서 열린 롤링선더 집회에서는 “우리는 일본을 보호하는데 일본은 왜 100%의 비용을 내지 않는가. 우리는 19조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등 동맹국들이 방위비를 더 내야 한다”며 말해 청중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트럼프, 폭주족들 행사에서 “일본은 방위비 100% 부담해야”
트럼프의 고향인 뉴욕주 대의원인 아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후보 지명 ‘대관식’의 발표자가 됐다. 아들 트럼프 주니어는 뉴욕주 표결 결과를 보고하며 “아버지 축하합니다”라며 부친의 공화당 후보 지명 사실을 만방에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