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안희정 ‘전 국민 안식제’
2012년 대선 당시 나왔던 ‘저녁이 있는 삶’ 공약 이후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 높이기는 정치권에서 꾸준히 화두가 돼 왔다. 유권자들도 일자리 확대, 경제성장률 향상 같은 진부한 구호보다는 일찍 퇴근해 집에서 저녁을 먹고 아이를 돌볼 시간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에 귀가 쏠린다. 더불어민주당 안희정 대선 경선후보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10년 일하고 1년 쉬는 사회, 쉼표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안 후보는 ‘전 국민 안식년제’로 삶의 질을 높일 뿐 아니라 일자리 나누기 등 추가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연차휴가도 제대로 못 쓰는 상황에서 시기상조이며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 경제적 파급력 등 ‘일석삼조’
안 후보는 지난 16일 기자회견을 갖고 “일정 생애주기별로 자신의 삶과 노동 훈련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며 10년 일하고 1년의 유급휴가를 갖는 ‘전 국민 안식년제’를 제안했다. 이미 대학교수들과 일부 공공기관·대기업에서 시행하고 있는 안식년 제도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안 후보 측은 안식년 제도로 3가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먼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고용 없는 성장’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으로 생기는 ‘일자리 나누기’ 효과이다. 고용 확대에 따른 내수시장 활성화 등 경제적 파급력이 두 번째 기대 효과이고, 세 번째는 그동안 성장을 바라보며 쉼 없이 달려온 사회를 삶의 질과 가정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2015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66시간을 훨씬 상회한다. 안 후보는 “우리는 너무 지쳐 있다”고 했다.
이 제도는 노사가 2~3년간 임금 동결에 합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평균 연봉이 6000만원인 정규직 1000명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매년 3.5% 인상되던 임금을 2년 동결하면 42억원이 확보된다. 이를 가지고 장기근속자의 안식년을 보장하고 신규 직원 채용, 비정규직 처우 개선 등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안 후보 측은 추가 재원 없이 공공부문에서 행정·기능직 일자리 15만개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먼저 공공부문에 안식년제를 도입한 뒤,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민간으로도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 “일부만 혜택” “공공부터 파급”
참신한 발상이지만 제도의 실효성과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오간다. 우선, 극단적으로 양분돼 있는 한국 노동시장 구조에서는 일부만 혜택을 볼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2014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평균 근속기간은 5.6년에 불과하며 10년 이상 장기근속자들은 대개 공공기관과 대기업 등 안정된 직장에 몰려 있다. 안 후보 측은 이 같은 비판에 대해 “비정규직은 고용보험 가입기간을 기준으로 안식년 급여를 지급해 10년에 1년, 5년에 6개월 등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대부분 노동자들이 연차휴가도 제대로 못 쓰는 상황에서 안식년제는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나온다. 2013년 기준 평균 연차휴가 사용일수는 8.6일, 미사용 일수는 5.6일이다. 김종진 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안식년 의제도 포괄적으로 보면 노동시간 문제의 하위 범주”라며 “공약 취지를 제대로 반영하려면 연차 사용 규정과 노동시간을 유럽이나 국제노동기구 기준으로 확대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했다.
사회적 대타협을 어떤 기구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수행할 것이냐도 숙제다.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노사정위와 관련, 안 후보는 “노사정위가 실질적인 노사 대타협의 기구가 될 수 있도록 대통령 직속의 사회적대타협위원회 형태로 재구성할 것”이라고 했다. 안 후보는 노사문제도 대연정의 한 축으로 보고 있다. 대연정을 통해 국정 운영을 안정화시킨 뒤 노동시간 단축 등 사회·경제적 문제를 풀기 위한 대타협 기구를 가동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기업들의 반대, 같은 사용자·노동자 안에서도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된 구조에 대한 뚜렷한 고민 없이 사회적 대화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막연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안 후보 측은 “주 5일제를 도입할 때처럼 공공부문이 선도하면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식년제를 도입한다 해도 민간에서 이를 적극 준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당장 ‘10년 되기 전에 잘리는 것이 아니냐’ ‘기업이 인력을 얼마나 뽑겠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고용의 80%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대부분의 중소·영세기업들이 장기적인 전망을 보고 안식년제를 도입하기란 쉽지 않다. 안 후보 측은 “특별한 사유 없이 안식년 직전 해고하는 것은 부당해고로, 이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처하겠다”고 했다.
박지순 고려대 교수는 “근로자가 쉬는 동안 경험·기술 등이 뒤처지는 상황에서, 조직 내 중추 역할을 하는 10년 이상 근속자에게 1년 안식년을 시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재충전 기간에 고용보험사업과 연계한 근로자 교육훈련 프로그램 제공 등 세부적인 로드맵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