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투표 현장 스케치
19대 대통령 선거일인 9일 전국 각지의 시민들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투표소를 찾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지역인 경북 성주 주민들, 강원 산불 이재민들도 투표에 참여했다.
이날 오후 1시쯤 서울 종로구 재동초등학교 투표소에서는 정복을 입은 20대 항공 승무원부터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80대 남성까지 다양한 시민들이 한 표를 행사했다. 종로구 계동에 사는 신안례씨(85)는 “지팡이 짚고 집에서 투표소까지 죽기 살기로 왔다. 나같이 나이 든 사람들이 잘못 투표하면 또 탄핵에 버금가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가 주변의 투표 열기도 뜨거웠다. 서울 서대문구 이화금란고등학교에 마련된 신촌동 제1투표소에서 생애 처음으로 대선 투표에 참여한 대학생 나승희씨(22)는 “대선 후에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근 카페에서 일하는 대학생 김지원씨(24)는 앞치마를 두른 채 투표소를 찾았다. 김씨는 “저와 뜻이 맞는 후보자에게 소신 투표했다. 주변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첫 투표권을 갖게 된 세월호 생존학생들도 한 표를 행사했다. 3년 전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다른 생존자가 내려준 소방호스를 잡고 가까스로 탈출한 단원고 생존학생인 ㄱ씨(20·대학생)는 경기 안산에서 투표를 마쳤다. ㄱ씨는 “새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원 강릉지역 산불 이재민들도 소중한 권리를 행사했다. 강릉시 성산면 제1투표소에서는 산불로 집을 잃은 관음2리 이재민·김순태씨(81) 부부가 투표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아 투표를 마쳤다. 이들 부부는 “정신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투표는 해야 할 것 같아 나왔다”며 “산불 피해 주민들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잘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드 배치 지역인 경북 성주에서도 투표 행렬이 이어졌다. 성주군 초전중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는 사드 배치 반대를 뜻하는 파란 리본을 달고 투표소를 찾은 사람도 보였다.
광주지역 최고령 유권자인 박명순 할머니(114)는 오전 10시15분쯤 광주 문흥1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며느리와 함께 한 표를 행사했다. 허리와 다리 건강이 좋지 않지만, 왼손에 지팡이를 든 채 며느리의 부축을 받아 투표를 무사히 마쳤다. 박 할머니는 “후손들이 잘살 수 있는 나라가 되길 바라며 투표했다”고 말했다.
한편 궂은 날씨 때문에 국토 최남단의 마라도 주민들은 투표를 하지 못했다. 이날 오전 8시를 기해 제주 남쪽 먼바다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지면서 제주도 본섬의 모슬포항과 마라도를 연결하는 여객선이 운항하지 않았다. 마라도 주민들은 여객선을 타고 약 10㎞ 떨어진 모슬포항으로 이동해 대정여고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할 예정이었지만 발이 묶였다. 마라도 선거인 수는 108명이지만 실제 거주자는 50여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난 4~5일 사전투표를 했고, 9일 투표를 하려던 20여명은 기상 조건이 개선되지 않아 결국 투표를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