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시민의 선택

독재와 싸운 ‘실향민의 아들’ 노동·인권변호 앞장…반문 정서 딛고, 두 번의 도전 끝 ‘미완의 숙제’ 풀어

2017.05.10 01:50 입력 2017.05.10 01:53 수정

문재인이 걸어온 길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선거 당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선거 당시.

“끝이 다시 시작이다.”

2012년 12월19일 대선 패배 이후 침잠의 시간을 보내던 문재인 당선인은 1년 만에 대선 평가서 <1219 끝이 시작이다>를 출간하며 신발끈을 고쳐 맸다. 운명에 떠밀리듯 야권통합 후보로 나선 뒤 박근혜 후보에게 패했지만 “두 번의 실패는 없을 것”이라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하지만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지만 친문 패권주의 논란, 분당 등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지난달 초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을 제치고 더불어민주당 19대 대선후보로 결정된 그는 한때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의 양강구도가 형성되면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격차를 벌리며 대세론을 굳혔고, 재수 끝에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문 당선인은 이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란 표현을 국민들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 피란민의 아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경남고 재학 시절 소풍 때(뒷줄 가운데).

경남고 재학 시절 소풍 때(뒷줄 가운데).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고향을 떠난 문 당선인의 부모는 미군 선박을 타고 경남 거제 피란민수용소에 도착했다. 문 당선인은 2년 뒤 피란살이 중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산 영도로 이사한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성당에서 배급해주는 강냉이가루, 전지분유 등을 양동이에 받아 가져가야 했고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업 중 쫓겨나기도 했다.

시험을 쳐서 입학한 경남중학교에서 빈부격차를 피부로 느꼈다. 그는 지난 1월 출간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이 학교 애들은 대체로 잘사는 거예요. 집에 가보면 정말로 놀랄 만한 저택에, 정원에,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죠.”

문 당선인의 학창시절 별명은 ‘문제아’였다. 모범생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가 전하는 학창시절 에피소드에는 ‘술’이 자주 등장한다. 고3 때 봄소풍을 가서 막걸리와 소주를 함께 마신 친구가 취해 선생님 앞에서 구토한 일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마칠 때쯤 고량주와 소주를 사서 학교 뒷산에서 친구들과 마시다 체육 선생님에게 붙잡혀 정학을 받기도 했다.

성적이 좋았지만 주된 관심사는 공부가 아니었다. 문 당선인은 “비교적 빨리 비판의식이랄까 사회 부조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며 “한편으로는 집안의 기대를 받는 장남으로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학교 공부나 입시 공부가 가치 없게 느껴져 늘 갈등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고 학창시절을 회고했다.

■ 반독재 학생운동에 뛰어든 대학시절

경희대 재학 시절 부인 김정숙씨(가운데)와 함께.

경희대 재학 시절 부인 김정숙씨(가운데)와 함께.

문 당선인은 서울대 상대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뒤 재수 끝에 경희대 법대에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고교 때 꿈은 역사학자였지만 부모의 반대로 진로를 틀어야 했다. 1학년 때인 1972년 박정희 정권이 10월유신을 선포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하숙집에서 밤늦게까지 토론하며 세상에 대한 눈을 떠갔다. 3학년 가을 뜻이 맞는 친구들과 유신 반대 시위를 기획하면서 경희대 학생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1975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구속과 동시에 제적을 당했다.

당시 유신 반대 시위 대학생에 대한 형량은 ‘징역 2년’ 정찰제였지만 사건을 담당한 판사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석방됐다. 하지만 곧장 강제징집을 당했다. 훈련소 생활을 마친 뒤 특전사에 배치돼 ‘A급 사병’으로 인정받은 뒤 제대했다.

특전사 복무 시절.

특전사 복무 시절.

특전사 경력은 보수세력이 자신을 ‘불안한 안보관을 가진 후보’라고 공격할 때 방어용 카드로 종종 활용됐다. 그는 집중 유세장에서 “군대도 안 갔다온 사람들, 특전사 출신 저 문재인 앞에서 안보 얘기 꺼내지도 말라”고 자주 말했다.

■ 사시 합격, 노무현과의 운명적 만남

제대 이후 구속 전력 때문에 복학이 되지 않아 취업 준비까지 했지만 갑작스러운 부친의 별세 뒤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49재를 치르고 전남 해남 대흥사 등에서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1979년 초 1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해 10월16~20일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같은 달 26일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다.

1980년 3월 복학 후 5월17일 신군부의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두번째 구속을 맞게 됐다. 구속된 지 20여일 후 여자친구였던 김정숙씨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복학한 해 시험 삼아 치른 사법시험 2차에서 합격했다는 것이다. 사법시험 3차 면접 때 안전기획부 요원은 “지금도 옛날 데모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냐”고 물었다. 그는 “변함없다”고 답했다. “어려울 땐, 무조건 원칙적으로”라는 평소 철학이 이때도 적용됐던 것이다.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함께.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함께.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구속 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동업을 시작했다. 1982년 당시 노 변호사는 부산 부민동 사무실에서 차 한잔을 앞에 놓고 “해보니 마음처럼 깨끗한 변호사가 쉽지 않더라.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차량 제공, 해외 연수 등 서울의 대형로펌에서 받았던 솔깃한 제안은 없었지만 문 당선인은 “따뜻한 마음이 와 닿았다”고 회상했다. 문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과 의기투합해 동업자가 됐고,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지만 찾아오는 사건을 피하지 않았고, 차츰 부산지역 노동인권 변론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됐다. 당시 문 당선인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잘 모르거나 돈이 없어 애태우는 노동자를 돕고자 한다.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고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부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이끌었던 재야 인사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권으로 들어갔다. 문 당선인은 “부산, 경남, 울산, 창원 전체에 인권변호사는 고작 서너 명이었다. 다들 정치로 가고 나 혼자 남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동의대 사건, ‘신씨 일가 간첩단’ 재심청구 사건 등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을 맡았다. 1989년 동의대 사건은 6공화국 단일 시국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었고, 구속 피고인 수만 77명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노무현 정부 시절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문 당선인은 2002년 말 노 전 대통령 제안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을 맡으면서 국정운영에 참여하게 됐다. 총선 출마 압력을 받던 그는 2004년 2월 1년여 만에 청와대를 떠나 ‘자유인’으로 돌아갔다.

히말라야 트레킹 여행 중 국회가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노 전 대통령 대리인단에 참여했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된 뒤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 이후 민정수석, 비서실장 등을 맡으며 노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노무현 정부 출범 첫해 문 당선인은 민정수석으로서 화물연대 파업, 철도파업, 전교조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투쟁 등도 맡았다. 당시 노무현 정부와 노동계는 감정의 골이 깊었다. 노무현 정부는 노동계가 개혁정부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과도한 요구를 한다고 인식했다. 반면 민주노총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며 노무현 정부를 공격했다. 시민사회 진영과도 갈등을 빚었다.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둘러싸고 관계가 멀어진 것이다.

경남 양산 자택에서 부인과 반려견을 쓰다듬고 있다.

경남 양산 자택에서 부인과 반려견을 쓰다듬고 있다.

문 당선인은 지난 8일 마지막 KBS 방송 연설에서 “청와대에 있는 동안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중재했고, 대통령 탄핵 사태까지 접해봤다”며 “이라크 파병, 한·미 FTA와 같은 새로운 의제도 다뤄보고 외국순방을 떠난 대통령을 대신해 국정을 살펴야 했고, 남북정상회담 같은 큰 행사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고 자신의 국정경험을 소개했다.

■ 노무현의 죽음

“2009년 5월23일, 오전 9시30분, 그분을 떠나보냈다.” 노 전 대통령이 대검찰청 청사로 출석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비보가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인 김경수 비서관으로부터였다. “빨리 와주셔야겠습니다. 대통령님이 산책을 나갔다가 산에서 떨어지셨습니다.” 상주가 돼야 했던 문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 서거일을 “내 생애 가장 긴 하루”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정치보복”이라며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소리치자, 문 당선인이 사과하며 예를 갖췄다. 감정을 절제하고 차분히 대응하던 모습이 그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2012년 19대 총선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선거운동하는 모습.

2012년 19대 총선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선거운동하는 모습.

문 당선인은 2011년 노무현 정부를 증언하고 기록하기 위해 내놓은 <문재인의 운명> 마지막을 이렇게 끝맺었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

■ 운명처럼 불려나온 2012년 대선

<문재인의 운명> 출간 이후 범야권에선 문 당선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커졌다. ‘혁신과통합’에서 범야권 통합운동을 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직접 선수로 나서달라”는 요구였다. 통합민주당과 혁신과통합의 합당 뒤 문 당선인은 19대 국회의원 선거(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18대 대통령 선거에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끝에 범야권 단일후보로 나섰다. 하지만 득표율 48.0%로 51.6%를 얻은 박근혜 후보에게 패했다.

문 당선인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당선됐다. 그는 “3번의 죽을 고비(전당대회, 당 혁신, 총선)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후 혁신위원회를 띄우며 당 체질 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새정치연합 안철수 전 대표는 그해 12월 “당에서 변화와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이는 제1야당 분당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안 전 대표는 탈당자들과 함께 호남을 기반으로 한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19대 국회 상임위원회(기재위)에서 질의하는 모습.

19대 국회 상임위원회(기재위)에서 질의하는 모습.

문 당선인은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다”며 정면 돌파 의지를 밝혔다. 지난해 4월 총선 이전 당이 쪼개지고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입당한 ‘10만 온라인 당원’은 ‘문재인 지킴이’ 역할을 했다. 열성 지지자들은 문 당선인의 정치적 자산인 동시에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배타성이라는 코드로 읽힌다.

문 당선인은 지난해 총선을 석 달 앞두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김종인 전 대표를 전격 영입했다. 흔들리는 당을 수습하기 위해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인 김 전 대표를 삼고초려 끝에 영입,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난해 하반기본격화 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문 당선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게 밀렸던 그는 국정농단 사태 이후 지지율이 반등했고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 재수 끝에 얻은 승리

문 당선인은 호남·충청·영남·수도권 등 순회 경선에서 4연승을 거두며 지난달 3일 당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57%의 지지율로 과반을 획득해 결선투표 없이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것이다. 촛불집회 초기 ‘사이다 발언’으로 주목을 받으며 치고 올라온 이재명 시장, 확장성을 무기로 상승세를 탔던 안희정 지사의 도전이 거셌지만 ‘문재인 대세론’을 뛰어넘진 못했다.

대선 본선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대세론에 맞설 중도·보수 단일화(연대) 여부가 최대 변수로 떠올랐지만 5자 구도는 끝까지 이어졌다. 송민순 회고록 논란, 아들 준용씨 특혜 채용 의혹, 노 전 대통령 사돈(아들 노건호씨 장인) 음주사고 은폐 의혹 등이 터져나왔지만 판을 흔들 정도로 표심을 바꿔놓진 못했다.

가장 큰 위기는 각당 경선이 마무리된 지난달 초 안철수 후보의 상승세가 거세지면서 양강구도가 형성됐을 때였다. 당시 중도 표심 잡기를 위해 적폐청산이라는 기조를 전향적으로 바꿀지를 두고 내부에서 논란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안 후보의 단설 유치원 발언 논란, TV토론 등을 거치며 다시 격차가 벌어졌다. 이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며 막판 추격전을 벌였지만 대세론을 뒤집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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