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가족입니다

역세권 대신 ‘사람권’…피는 달라도 마음은 진하게 통하죠

2018.01.02 22:43 입력 2018.01.04 09:50 수정

주거 공동체 ‘우동사’와 ‘빈집’

인천 검암동에 위치한 마을공동체 ‘우리동네사람들’ 구성원들이 지난달 23일 공동주거 공간에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인천 검암동에 위치한 마을공동체 ‘우리동네사람들’ 구성원들이 지난달 23일 공동주거 공간에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역세권, 학세권(학원 인접), 공세권(공원 인접), 스세권(스타벅스 인접)…. 살기 좋은 집의 조건으로 꼽히는 각종 ‘세권’들이다. 사람들은 미래에 돌아올 투자수익을 기대하며 빚을 내 집을 사고, 가족 구성원들의 삶의 양식도 이윤이라는 공동의 목적에 맞춰 돌아간다. 그러나 인천광역시 검암동에 위치한 ‘우리동네사람들(우동사)’ 구성원들이 집을 선택한 기준은 좀 다르다.

■ 우리는 사람권 - 우동사 구성원들

지난달 23일 만난 우동사 구성원들은 ‘사람’과 ‘관계’를 집의 선택 기준으로 꼽았다. 김진선씨(38·여)는 “같이 뭔가를 해 나갈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우동사에 오게 됐다. 귀촌을 생각하고 제주도로 내려갔던 여신주현씨(40·여)는 “막상 제주도에 내려가니 고립된 느낌이었다”며 “전원생활보다는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우동사를 찾았고, 2년 가까이 여기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정진씨(31)는 “지인의 소개로 공항도 가까워 해외 출장 가기 전 3일을 지내봤는데, 낯설지 않고 편했다.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함께 사는 것의 안정감이 뭔지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서씨는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우동사에 들어와 3년째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이 집을 고르며 고려한 것은 이윤이 아닌 새로운 가족이었다.

우동사는 2011년 귀촌을 준비하던 청년 6명이 모여 만든 주거 공동체다. 방 세 칸짜리 복층 빌라를 구해 6명이 함께 살았다. 2년 후 귀촌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근본적으로 원했던 것은 귀촌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그렇게 함께 어울려 살려는 사람들이 더 모여들면서 식구는 35명으로 늘었다. 이 중에는 독신(비혼·미혼), 비혼커플, 결혼커플, 미혼커플도 있다. 우동사 집도 6채로 늘었다. 시험적으로 공동주거를 경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오공하우스’도 문을 열었다. 공동주거를 하지 않아도 가까운 거리에서 활동을 함께하는 이들도 생겼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이면서 함께 사는 것을 넘어 함께할 수 있는 일도 시작했다. 도농 교류 프로그램 ‘논데이’, 동네 술집 ‘커뮤니티펍 0.4㎞’가 문을 열었다. 100만원씩 출자금을 모아 서울에서 협동조합 카페도 운영 중이다. 집을 마련하고 생활비를 모으는 방식은 그때그때 조금씩 달라졌다. 초기에는 보증금 1800만원과 생활비와 주거비를 합쳐 월 20만원을 냈다. 요즘은 오공하우스에서 단기간 거주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보증금 없이 월세를 좀 더 내는 방식도 도입했다.

우동사가 조금씩 확장되고 단단해지자 주변에서 종종 그 비결을 물어온다. 구성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운영 시스템보다는 ‘관계’에서 답을 찾았다. 여신주현씨는 “함께 살 때는 방을 나누는 것부터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모든 문제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중심적으로 풀어나갔다”고 말했다. 성배경씨(37)는 “관계 안에서 풀어나가는 노력들이 있다. 그게 없다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함께 살기는 힘드니 나의 독립된 영역을 찾아야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밥상모임이나 독서모임 등은 서로 관계를 짓고 이어가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는 상투적으로 흘려보내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좀 더 ‘진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우동사에서는 이를 ‘마음 나누기’라고 부른다. 가족은 가장 밀착된 관계이지만 부모, 남편, 아내, 자식이라는 고정된 역할 속에서 대화는 겉돌기 쉽다. ‘마음 나누기’는 역할이 아니라 ‘나’ ‘너’ ‘우리’라는 관계를 중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서로를 이해해보는 시간이다. 서정진씨는 “아버지와 만나면 ‘뭐 먹고 사노’ ‘월급은 좀 모았나’와 같은 투박한 대화들만 주고받는다”며 “사람들이 추상적인 개념용어들만 늘어놓으면서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못한다. 또 술김에 본심을 쏟아내기도 한다. 우동사에서는 물 한잔 마시면서 주고받는 말로도 서로를 알게 된다”고 말했다.

나, 너, 우리라는 관계가 공동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다 보니 삶의 패턴도 달라졌다. 경제적 상황이 바뀐 것도 큰 몫을 했다. 공동주거로 집 걱정이 사라졌고 물건도 공동소유하게 되면서 주거비와 생활비가 절약됐다. 공간과 시간을 투자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삶에서 벗어나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선택지가 보였다.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적당히 버는 일’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여신주현씨는 지난해 3월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됐다. “제대로 된 백수생활을 이 동네 와서 처음 시작할 수 있었어요. 주위에 백수생활을 즐겁게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이 나이에 그만둔다고 하니 걱정하는 눈빛들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축하해주고 격려해줬어요.” 여씨는 며칠 전, 오래 기다리던 임신 소식을 들었다. 남편 강창순씨(40)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현재 퇴사를 준비 중이다. 아이가 태어나니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아이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프리랜서로 일하며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취직해야 할 시기에 취직하고, 아이 낳을 때 아이 낳고, 아이 낳으면 더 열심히 일해 돈 벌고…. 이렇게 안 살면 안될 것 같잖아요. 그러한 불안에서 우동사가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으레 휩쓸려 갈 상황인데, 우동사에 살기 때문에 내가 뭘 원하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어요.”

남다정씨(26·여)는 “또래를 보면 부모님과 살다가 결혼으로 독립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동사에 살면서 내가 원하는 환경에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 만인이 공유하는 집 ‘빈집’ 청년들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서는 올해로 10년째 청년들의 주거 공동체 ‘빈집’이 운영되고 있다. “만인에게 열려 있고 만인과 공유하는 집”을 표방한다. ‘빈집’은 집이 소유물이 되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는 비판의식에서 “누구나 주인이면서 손님”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빈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머무는 기간에 따라 장기 투숙객과 단기 투숙객으로 나뉜다. 이들은 돈을 모아 공동주거비를 충당하는데, 보통 생활비를 포함해 월 25만~30만원을 낸다. 공동체 생활을 위한 보증금 등이 필요할 때는 공동체 은행 ‘빈고’에서 돈을 대출받는다. 현재 구름집, 사랑채, 노는집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5채의 집들이 있다.

지난달 26일 찾은 ‘구름집’에는 6명의 청년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청년들이 ‘빈집’을 찾는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공동체에 대한 욕구도 있다. 동녘씨(26·‘빈집’에서 쓰는 별칭)는 “‘빈집’ 공동체가 기존의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는 면이 재미있다고 생각됐다. 기존 사회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내가 혼자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데 우리가 모여 집을 계약한다는 것 자체가 통념에 균열을 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의 삶이 좀 더 나에게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고 말했다. 준씨(21·별칭)는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빈집을 중심으로 마을 자치모임이 많았다. 그러한 활동에 대한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구름집은 매주 회의를 열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과 집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다. 함께 사는 것에 대한 불편과 고르게 분담되지 않는 가사노동 등은 늘 숙제로 남지만 회의를 통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조율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고 있다.

공동체를 경험한 이들은 혈연·혼인 중심의 가족을 만드는 것만이 유일하고 당연한 선택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선씨(25·별칭)는 “생활동반자법에 관심이 많다. 동성 친구와 비성애적 반려자로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기존의 가족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지만 공동체는 내가 선택해 같이 살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동녘씨는 “나중에 결혼을 할 수도 있고 공동체 생활을 계속할 수도 있다. 이후의 삶이 어떻게 열릴지는 모르지만, ‘빈집’에서의 삶이 분명 영감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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