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여자 중학생이다. 요즘엔 학교에서 틴트나 미백 선크림 등 화장을 하지 않으면 찐따 취급을 당한다. 빠르면 (초등학교) 4학년, 느려도 6학년쯤에는 다들 화장을 시작한다”
“현재 여고 1학년이다. 반 친구들이 아침마다 와서 다 화장하는데 다들 눈물 흘리면서 렌즈 끼고 있다. 결막염에 걸려도 렌즈는 꼭 낀다. 왜 그렇게 힘들게 화장을 하고 다녀야 하냐고 물어보면 여자는 예뻐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학생이 겪는 코르셋’이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코르셋’은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화장한 얼굴, 긴 머리, 날씬한 몸매 등 일정한 외모 규준을 비판적으로 이르는 페미니즘 용어다. 10대 여성들이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코르셋’이 심각한 수준에 달했음을 스스로 말하고 나선 것이다. 이 해시태그가 달린 수백건의 트윗에는 수면 부족과 식이 장애, 결막염 등 건강 문제를 겪으면서도 화장과 다이어트를 계속할 수밖에 없을 만큼 심한 코르셋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10대 여성들의 고발과 토로가 담겼다.
SNS에 나온 이야기는 현실의 일부에 불과하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진모양(18)의 학급 여학생 18명 중 15명은 매일같이 화장을 한다. 여학생들은 가벼운 기초 화장 수준이 아니라 아이라이너, 아이섀도우, 뷰러, 마스카라, 블러셔, 입술 화장까지 ‘풀 메이크업’을 하고 학교에 온다. 진양은 지난 29일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화장을 하지 않으면 ‘왜 화장을 하지 않느냐’ ‘아파보인다’ 등의 이야기를 친구들로부터 듣기 때문에 하고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화장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3학년 김윤지양(가명·15)은 “여자 친구들 모두가 화장을 안하면 밖에 나갈 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어떤 친구는 일찍 일어나서 등교 전 40분 동안 화장을 하기도 한다. 학교에 화장을 하면 안된다는 교칙이 있긴 한데 화장을 하는 친구들은 거의 매일같이 ‘풀메’를 하고 온다. 가끔 선생님들이 클렌징 티슈를 나눠주면서 지우게 하면 그때부터는 하루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했다.
김양은 “처음에는 우리가 자기 만족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여자애들에게 ‘너는 왜 화장을 하지 않냐’ ‘화장 안하니까 찐따같다’고 이야기하는 남자애들은 화장도 안하고 꾸미지도 않는데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외모를 꾸미는 것이 일부 청소년들의 일탈 행동으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요즘 중고생들은 화장과 꾸밈이 당연한 일상이 된 또래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맨 얼굴로 등교를 하는 것은 ‘창피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대부분 매일 아침 30분 정도 시간을 들여 화장을 하거나, 화장을 못했을 경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다.
초등학생들에게도 화장은 일상이다. 외모 규준을 강요 받는 여성들의 연령대가 점점 더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초딩 메이크업’을 검색하면 2만9300여개의 관련 영상이 확인된다. 초등학교 3~6학년 여학생들은 영상 속에서 성인 뷰티 유튜버처럼 ‘학교 가기 5분 전 메이크업’을 소개하면서 미백 선크림을 바르고 붉은 색 틴트를 칠한다. 최근 10대 뷰티 업계의 무서운 성장세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뷰티업계에 따르면 화장품 시장은 매년 20%가량 성장해 현재 약 3000억 규모로 커졌다. 녹색소비자연대가 지난해 발표한 ‘어린이·청소년 화장품 사용 행태’ 보고서에 따르면 여자 초등학생 42.7%, 중학생 73.8%, 고등학생 76.1%가 색조화장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이 겪는 코르셋’ 해시태그 운동은 여학생들만 공유하는 이러한 또래 문화를 ‘불편한 제약’ ‘부당한 차별’이라고 여기고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출현한 것이다. 올해 초부터 전개된 ‘탈코르셋’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10·20대 여성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뜨거운 담론으로 자리잡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1020 여성들은 그동안 당연시됐던 여성의 외모 치장을 ‘여성이기에 부당하게 감내해야 했던 성차별적인 노동이자 의무’라고 비판한다.
탈코르셋 운동은 지금껏 사용하던 화장품을 폐기하거나 머리를 짧게 자른 사진을 SNS에 올리는 등 일상에서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뷰티 유투버를 보고 화장을 했다는 김윤지양은 “여자는 예쁘고 얌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며 “아침에 화장을 하지 않고 여유롭게 등교를 준비한다. 바지를 자주 입고 남자애들처럼 다리를 벌리거나 어깨를 펴는 등 편안한 자세를 취하는 방식으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교수는 “지금의 10대와 20대 여성들은 여성을 더 어리고 약한, 예쁘기만 한 존재로 만드려는 ‘여성혐오’의 교실에서 자랐다. 이와 더불어 10대를 타겟 삼는 뷰티 산업, 유튜브 등 매체의 발달로 인해 1020 여성들이 이전 세대 여성들보다 더욱 일상화 된, 강력한 외모 코르셋을 경험한 것이 사실”이라면서 “10대 여성들이 코르셋을 고발하고 탈코르셋 운동의 중심에 선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 기술’인 셈”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