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전 9시30분. 네덜란드 소도시 스헤르토헨보스 주택가의 스테렌보쉬 초등학교 8학년 교실은 수업시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왁자지껄했다.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복도에 놓인 컴퓨터를 들여다보거나 교실에서 의자와 책상에 걸터앉아 뭔가 얘기하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오기 전 교장선생님에게 전해들은 수업시간표에 따르면 분명 수학 수업이 한참 진행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이 어떤 시간인지 묻자 루카스(12)가 잠시 친구들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지금은 수업시간이지만 저는 8학년이라 제가 할 일을 골라서 할 수 있어요.”
의아한 표정을 본 루카스가 A4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 학교 학생들이 이번 주에 할 일을 담은 개인별 활동기록지다. 언어·읽기·수학·영어 같은 과목의 이번주 진도뿐 아니라 개인별로 달성할 과제가 적혀 있다. 주요 과목 이외에 루카스가 이번주에 공부할 것은 컴퓨터 게임으로 하는 수학 공부, 이집트의 역사와 관련된 프로젝트 수행 등이다. 게임은 공부의 중요한 한 축이다. 루카스는 “저는 영어 게임을 좋아해서 영어도 잘 하게 됐어요”라고 덧붙였다. 루카스는 이날 컴퓨터 활동을 다 끝내고 이튿날부터는 수학 보충학습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놨다. 이번 주 활동으로 수학 교재 4페이지를 공부해야 한다. 활동기록지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만들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체크한다. 선생님은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네덜란드 초등학교는 8학년제다. 4살 생일 다음날 입학해 12살에 졸업하는 시스템이다. 바로 옆 3학년 교실에서는 네덜란드어 읽기 수업이 한창이었다. 분명 수업시간인데, 모든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있지 않았다. 복도에서 두 아이가 컴퓨터로 수학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자 양팔저울의 한쪽에 소와 양, 코끼리 같은 동물을 올려놓고 반대쪽에 추를 올려놓아 무게를 재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아이는 시계를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게임을 했다. 알아서 하는 수학 보충수업이다. 수업시간이지만 복도에 놓인 컴퓨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 탐방에 동행한 교육 컨설턴트 리머 크라머는 “스테렌보쉬는 네덜란드의 아주 평범한 초등학교 중 하나”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 ‘150년 전의 학교’를 넘어서
“여기 현대의 전화기가 있습니다. 보이시나요? 그리고 이건 150년 전의 전화기입니다. 지금과 많이 다르죠? 이것은 오늘날의 교통수단이고, 이것은 150년 전의 교통수단입니다.” 미국의 유명 래퍼 겸 사회활동가 프린스 이에이(Prince Ea)가 유튜브에 올린 ‘나는 학교를 고발한다’라는 동영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최신형 스마트폰과 다이얼이 달린 거대한 자석식 전화기, 날렵한 스포츠카와 말이 끄는 마차를 차례로 보여준 그가 페이지를 넘기자 평범한 교실 사진이 등장한다. “이건 오늘날의 교실입니다. 그리고… 이건 150년 전에 우리가 공부했던 교실 모습이에요. 한 세기가 넘는 동안 학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지금 우리 학교 교육이 학생들의 미래를 준비하고 말할 수 있나요?”
교실 앞에 선 선생님, 교탁을 보고 일렬로 앉은 학생들. 반 전체를 넘어 전국의 학생들이 똑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는 수업. 근대 이후 ‘공교육’이 탄생하면서 익숙해진 학교의 풍경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산업구조가 혁명적으로 바뀌면서 모든 국민들을 ‘보편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생겨나자, 국가는 가족이나 종교기관에 맡겨졌던 교육의 기능을 가져와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유럽 각국에 의무교육제도와 공립학교가 생겨났다. 사립학교들도 국가의 관리감독 하에 들어갔다. 그 결과 전체적인 교육 수준은 크게 올라갔지만, 모든 사람들은 국가가 정한 똑같은 지식을 배우게 됐다.
1794년 프로이센에서 세계 최초의 공교육 제도가 만들어진 지 200년이 훌쩍 넘었다. 학교는 이대로 좋을까. 클릭 한 번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보다 창의력과 문제해결능력이 강조된다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일을 잘 할 수도 있다는 미래에도 교과서를 보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는 학교라는 공간은 계속 유용할까. 모두에게 똑같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각자의 잠재력을 깨워주고 실생활에 필요한 기술과 문제해결력을 키워주는 게 옳은 방향이 아닐까.
지식 습득보다 창의력을 강조한 ‘대안학교’들은 늘 있었지만, 최근에는 근대의 틀에 갇힌 학교를 공교육 제도 안에서 바꿔보려고 시도하는 나라들도 많다. 지난 6월 초, ‘미래를 준비한다’는 학교들을 보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70㎞ 정도 떨어진 인구 15만명의 작은 도시 스헤르토헨보스를 찾았다. 스헤르토헨보스라는 이름은 ‘공작의 숲’이라는 뜻이다. 지역주민들에게는 ‘덴보스’라는 애칭이 더 친숙하다.
스테렌보쉬 초등학교의 8학년 시간표를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오전 8시면 학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등교하기 시작한다. 교장선생님인 아리장 반 산튼이 매일 아침 등교시간이면 교문 앞에 나가 아이들을 맞이한다. 부모들과 교장이 자연스럽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교문 안으로 들어온 부모들이 익숙한 듯 반 산튼 교장에게 눈인사를 했다.
■ 8학년의 주제는 ‘이집트’
빠른 네덜란드어로 웃고 떠들며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들 중에 책가방을 든 아이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소지품을 넣은 작은 가방만 메거나 운동복이 들었을 법한 스포츠백을 들었다. 아예 운동복 차림으로 학교에 오는 아이도, 스케이트보드만 달랑 들고 들어오는 아이도 있었다. 대개들 숙제가 없기 때문이다. 스테렌보쉬는 4학년부터는 숙제를 내 주고 있지만, 교과서를 아예 집에 가져가지 말라고 지도하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일과는 8시30분부터 9시까지는 쓰기, 9시부터 10시까지는 수학. 선생님이 수업을 하는 게 보통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이 개별적으로 자기 할 일을 하거나, 아예 수업시간을 통째로 개별활동 시간으로 내주는 일도 잦다. 그 후에 15분 동안 집에서 싸온 간식을 먹는 짧은 휴식시간이 있고 15분 동안은 잠시 바깥에서 논다. 6학년부터는 이 시간에 학교 바깥까지 나가서 놀 수도 있다.
오전 10시30분부터 11시45분까지는 자율학습 시간이다. 이 때 아이들은 부족한 과목을 알아서 더 찾아 공부하기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거나 모둠별 프로젝트를 한다. 2~3명씩 팀을 꾸리고 정해진 주제를 스스로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어 발표하는 것이다. 8학년 아이들에게 주어진 주제는 ‘이집트’다. 대주제 안에서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 유적 등을 자유롭게 골라 공부하고 발표한다. 이집트에 관한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니라 발표를 하면서 언어능력을 기르고, 연도를 계산하면서 계산 능력을 배운다. 친구들과 협업하는 기술, 의사소통 능력도 자연스레 기를 수 있어 학교가 선호하는 방법이다.
11시45분부터 12시까지는 어려운 단어와 숙어를 공부한다. 30분 동안 점심 휴식을 하고 나면 오후 3시까지 체육시간과 ‘시민교육’이 이어진다. 일주일에 두 시간씩 있는 시민교육 시간에는 자유와 평등, 타인과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 같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친다.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시민교육 시간을 더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에는 정부가 정해놓은 교과서가 없다. 중앙정부가 정한 교육과정과 성취기준,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정해진 과목은 있지만 그 목표를 어떻게 성취해갈지는 학교와 교사들이 알아서 결정한다. 8년 동안의 법정 의무 수업시간인 7520시간만 채우면 나머지는 완전 자율이다. 그렇게 하면 교육의 품질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묻자 리머는 “흘러간 것을 가르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정부가 교과서를 정하지 않는 건 우리 사회의 발전이 너무 빠르기 때문입니다. 교과서를 쓰고 승인을 받는 동안, 거기에 실린 지식은 이미 구시대의 것이 돼버리잖아요. 새로운 것을 빨리 업데이트해서 가르치려면 현장에서 가르칠 것을 결정해야죠.”
‘학년’ 개념도 명확치 않다. 정확히 말하면 학년별로 반을 편성하지 않고 여러 개 학년을 묶어 한 반을 편성하는 일이 꽤 보편적이다. 스테렌보쉬는 1~2학년을 섞어서 2개 반을 편성했다. 4~5학년, 5~6학년, 7~8학년이 묶인 반도 있다. 고학년 학급을 묶어 편성한 이유는 한 학년으로 한 반을 만들기에 인원이 조금 부족해서였지만, 1~2학년을 섞은 데에는 목적이 따로 있다. 아이들끼리 섞여 지내며 서로 돕고 돌보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혁신학교인 ‘예나플랜’ 모델을 따르는 일부 학교는 3개 학년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한 단위로 묶어 가르친다. 아이들은 마치 비슷한 연령대가 자연스럽게 어울려 노는 형제자매나 동네 친구처럼 모르는 내용을 서로서로 배우고 가르친다. “수준별로 수업하기 때문에 학년이 다른 아이들이 한 반에 있어도 큰 문제는 없어요. 여러 수준의 아이들을 각각 가르칠 수 있는 것도 교사가 갖춰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하고요.” 반 산튼 교장이 말했다. 대신 두 개 학년을 한꺼번에 가르치는 교사는 행사 준비 같은 학교 잡무에서는 빼 준다.
■ 연필에 들어있는 건?
“그럼 우리 4명씩 모여 볼까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바로 옆 교실로 우르르 뛰어갔다. 스테렌보쉬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덴보스의 또다른 학교, 노더리흐트 초등학교의 5~6학년 교실은 떠들썩했다. 이 아이들은 오늘 전류가 흐르는 원리를 알아본다. 같은 수업시간이지만 아이들이 하고 있는 작업은 여기도 각자 달랐다. 남자아이 몇은 복도에서 공 모양의 로봇을 아이패드로 조종했다. 손가락으로 아이패드 화면에 선을 그리자 로봇이 선을 따라 데굴데굴 구르면서 움직였다. 색깔 패드를 조정하자 불빛 색은 파란색과 초록색, 빨간색으로 계속 바뀌었다. 교실 안에서는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말판 위를 걸어다니는 로봇을 조종하며 ‘부루마블’ 비슷한 게임을 했다. 모두 아이들이 직접 프로그래밍한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건전지에 전류가 흐르는 블록이나 물체를 연결시켜 프로펠러를 돌리거나 전구를 켜는 실험을 했다. 리나(8)의 조는 소금물과 연필을 받았다. 연필에 든 흑연에 전기가 통하는 것을 이용해, 연필을 소금물에 담가 전구를 켜면 성공하는 실험이다. 앞선 시간에 전류가 통하는 물질에 대해 배우기는 했지만 막상 실험에 나선 아이들은 곧바로 전구를 켜지 못했다. 난관에 부딪친 리나와 친구들에게 선생님이 다가와 “연필 안에 뭐가 들었니?”라고 물었다.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면 먼저 연필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볼까?”
리나가 자기 자리에서 아이패드를 들고 와 ‘연필에 들어있는 것’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유도하는 역할만 해요. 지식을 바로 알려주기보다는 먼저 직접 찾아보도록 호기심을 유발해줘요.” 담임선생님 로첼레가 설명했다. “아이들이 끝까지 답을 찾지 못하면 물론 정답을 알려주지만, 직접 찾아보려는 노력을 한 아이들의 기억에 그 지식이 훨씬 오래 남겠죠. 솔직히 그냥 알려주는 게 더 쉽기는 해요. 아이들은 정말 모든 걸 물어보거든요. 가끔은 제가 모르는 걸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럴 땐 그냥 같이 인터넷에서 찾아봐요.”
노더리흐트 아이들은 만 7세인 4학년이 되면 모두 아이패드를 하나씩 지급받는다. 학교 예산으로 구매한 것이다. 교실 벽에는 스마트TV가 걸려있다. 네덜란드는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2000년대 중반부터 정책적으로 칠판을 없애고 전자칠판을 활용하도록 하는 등 스마트기기를 더 많이 쓰라고 독려해왔다. 지금은 지나친 투자로 재정이 어려워져 더 운영되지 않고 있지만, 한때 ‘초등 미래교육’의 모델로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스티브잡스 학교’가 시작된 곳도 네덜란드다. 이 학교는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문을 열어 아이들이 원하는 시간에 등하교할 수 있게 했고, 아이패드 앱을 통해 교사의 개별지도를 받았다.
■ ‘어제의 것’을 가르치지 말라
노더리흐트도 스마트기기를 많이 쓴다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아이들은 아이패드를 공책이나 연필, 교과서처럼 늘 책상 위에 꺼내놓고 그걸로 공부를 한다. 전자책을 읽거나 학습용 애플리케이션을 쓰기도 하고, 사진을 찍거나 필기도 한다. 아예 전자책을 교재로 정한 과목도 있다. 동영상을 촬영해 직접 편집하거나 컴퓨터그래픽을 입히고,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데도 유용한 도구다.
왜 이 학교들은 스마트기기를 쓰는 걸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할까. 노더리흐트의 프라우크 도네르 교장에게 물었다. 그는 “아이들이 졸업 후 살아갈 앞으로의 인생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이 학교의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책으로만 아이들을 가르칠 수도 있고, 스마트TV와 아이패드 대신 전자칠판과 교육용 태블릿을 줄 수도 있겠죠. 그런데 학교 밖에서는 전자칠판이나 교육용 태블릿 같은 걸 아무도 쓰지 않잖아요. 사회는 계속 변화하고, 그에 맞춰서 학교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네덜란드에는 “어제 배웠어야 할 것을 오늘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옛날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학교는 학부모에게 전달하는 학교 가이드에 아예 ‘스마트폰 반입이 가능하다’고 명시해 놓았다. 한국 학교에서는 대부분 교실 안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하자 도네르 교장은 “우리도 과몰입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학교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게 하는 대신, 적절하게 통제하며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쪽을 택했다. ‘밖에 나가선 어차피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이전에는 인터넷에서 유해사이트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필터링하려고 해 보긴 했어요. 그런데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유해사이트를 차단해 봐야 집에 가면 다 보잖아요. 차라리 왜 음란 사이트에 들어가면 안 되는지 알려주는 게 낫습니다.” 부적절한 사이트에 접속하는 게 해로운 까닭부터 해킹이나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성까지, 디지털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자연스레 이뤄진다. 교실에서도 스마트폰을 꼭 써야 할 이유가 있을 때만 사용하도록 지도한다. 그래서일까, 모두가 인터넷이 연결된 아이패드를 하나씩 들고 있었지만 학교에 머무는 동안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에 빠져 있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 모든 선생님이 체육교사
오후는 5~6학년 아이들의 자연 시간이다. 오늘은 곤충에 대해 배우는 날이다. 아이들은 먼저 교실에 모여 앉아 곤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곤충이 무엇인지, 포유류와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간단히 설명한 선생님이 “2분간 시간을 줄테니 아는 곤충을 모두 적어보자”고 말하자 모두가 자연스레 책상 속에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각자 기본 메모장이나 필기용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알고 있는 곤충 이름들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개미, 붉은개미, 꿀벌, 말벌, 잠자리… 상상력 범위 안에 있는 곤충 이름이 아이패드에 타이핑됐다. 아이패드는 모두 인터넷에 연결돼 있었지만 교실 안에 있던 20여명 중 딴짓을 하는 아이는 없었다.
진지한 공기 속에서 2분이 지났다. 자연 선생님 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이 어려웠나요? 사실 곤충은 어디에나 있어요. 바위 밑을 들어봐도 나오고, 나무에서도 찾을 수 있죠.” 자기가 쓴 곤충 이름을 읽어보자고 하자 아이들이 경쟁하듯 손을 들었다.
아이들은 질문하고 답하기를 전혀 꺼리지 않았다. 수업과 상관없는 말이 나왔다고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곤충과 절지동물에 대해 설명하던 톰이 나비 표본과 킹크랩 표본을 꺼내들었다.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 게는 다리가 8개고, 네덜란드에 살지는 않아요.” “선생님이 잡았어요?” “아니, 시장에서 샀지.” 한 남자아이가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 의자 위에 올라서다시피 하면서 손을 들고 소리쳤다. “선생님, 저는 상어를 봤어요!” 톰이 “그랬냐, 어디서 봤냐”고 맞장구를 쳤다.
수업은 교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배운 걸 직접 확인하는 야외수업이 꼭 따라붙는다. 오후가 되자 아담한 놀이터가 딸린 학교 정원은 전교생의 절반이 몰려나온 듯 북적였다. 곤충 공부를 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채집통과 곤충 그림이 상세히 그려진 종이를 들고 나무틈과 수풀을 뒤지고 있었다. 뭘 잡았느냐고 묻자 남자아이 하나가 자랑스레 다가와 손에 든 벌레를 보여줬다. “딱정벌레예요! 내 친구는 개구리를 잡았어요.” 수업시간에 배운 곤충의 몸 구조, 다리 개수를 직접 확인하는 시간이다.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던 저학년 아이들이 신기한 듯 벌레를 잡는 아이들을 쳐다봤다.
야외수업이 아니더라도 이 학교에는 하루에 30분씩 꼭 바깥에서 노는 시간이 있다. 말 그대로 온전히 ‘뛰어노는’ 시간이다. 고학년이 되면 놀이 시간은 줄어들지만 대신 주 2회 45분씩 체육시간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초등교사가 체육교사 자격증을 갖춰야 하고, 학교에는 법적으로 체육관을 꼭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선생님들은 바깥에서 노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아이들이 너무 실내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 바깥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늘려볼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들을 지켜보던 도네르 교장이 말했다.
■ 대학 진학률은 20% 미만
네덜란드의 학교가 학습 부담도 시험도 없는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테렌보쉬 학교를 찾았던 6월5일은 마침 7학년 아이들이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굳게 닫힌 교실 안에서 각자 시험지를 붙잡고 끙끙대는 모습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학교는 한 해에 두 번 시험을 치른다. 수학·읽기·쓰기·문법이 시험과목이다. 그러나 시험 결과가 점수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학습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다른 친구들에게 이해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살펴 학업성취도를 평가한다.
평소 수업시간에도 일상적으로 평가를 한다. 다만 ‘성취기준’은 교사가 제시하더라도, 목표는 아이들이 선택한다. 예를 들어 노더리흐트의 5~6학년 아이들은 매주 20문제씩 받아쓰기 시험을 보는데, 한번에 몇 개를 맞추는 걸 목표로 삼을지 선택하는 건 아이들이다. 모두가 100점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평가는 자연스럽게 수준별 수업으로 이어진다. 수업은 대개 ‘짧은 설명’과 ‘긴 설명’으로 나뉘어 있다. 받아쓰기에서 19~20개 정도 맞출 정도로 학습내용을 잘 이해하는 아이들은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을 한다. 그보다 적게 맞출 수 있는 수준의 아이들은 긴 설명을 선택해 듣는다. 처음에는 다같이 수업하고 이후 수준별 수업을 진행한다. 아이들은 각자 포트폴리오에 학습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적는다. 아이가 잘 따라오는 것으로 판단되면 선생님이 목표를 올려보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학년 융합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은 수준별 수업이 자리잡혀 있기 때문이다. 학년제는 나이가 같으면 학습능력이 같다는 전제로 만들어진 제도지만, 실제로는 학년이 같아도 아이들 간 학습능력의 차이가 크다는 걸 누구나 안다. 도네르 교장은 “두 개 정도의 학년을 합쳐서 수업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5학년의 아주 우수한 아이는 6학년 평균 수준이고, 6학년 중에서 조금 부족한 아이는 5학년 평균 수준이다. 아이들마다 다른 목표를 설정해주기만 한다면 함께 가르치는 데 무리가 없다.
네덜란드 초등학생들이 치르는 가장 큰 시험은 8학년 때 치르는 중고등학교 입학시험 시토(CITO)다. 국가 차원에서 치르는 이 시험은 언어와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학생의 능력을 상세히 평가한다. 학생들은 시토 성적과 그동안의 학교생활, 적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어떤 상급학교에 진학할지를 결정한다. 대체로 최상위권은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둔 6년제 대학 예비학교에 진학한다. 중상위권은 5년제 일반 중등학교에, 중위권 이하는 4년제 직업학교를 택하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다.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한다는 통념도 없고, 실제 대학 진학률이 20% 미만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시토 시험도 엄청나게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는다.
■ 학교의 미래, ‘정답’은 없다
네덜란드의 학교 모델은 근대 학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세계의 여러 실험 중 하나일 뿐이다. 공교육 제도 안에서 학교의 옛 모습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이미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핀란드는 2020년부터 개별 교과목이 아닌 ‘주제별 수업’을 도입한다. 예를 들어 수학과 지리, 역사 수업을 개별적으로 하는 대신 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며 관련 지식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하는 방법이다. 카페에서 실습을 하며 영어와 경제학, 의사소통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독일의 공립종합학교 ‘헬레네 랑에’는 두 달 가량 진행되는 프로젝트 형식의 밀도있는 수업, 학교 바깥에서 하는 실전수업 등으로 경직된 학교 시스템의 틀을 깼다.
혁신은 쉬운 일이 아니고 실험에는 실패가 따라오기도 하는 법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2013년 설립된 알트스쿨은 한때 ‘공교육의 미래 모델’이라고 추앙받았다. 마크 저커버그 등 여러 유명인들의 거액 투자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 시스템을 도입한 학교에서는 나이 대신 학생의 흥미와 특성에 맞춰 반을 편성했고, 교과서 없이 학교에 오면 아이패드와 노트북을 사용해 마음에 드는 과목을 듣도록 했다. 시험도 없었다. 대신 학생이 어떤 기술을 얼마나 연마했는지를 교사가 살폈다.
이 학교는 설립 5년만에 9군데 중 5군데가 문을 닫았다. 아이들 학업성취도가 떨어졌다는 부모들의 불만이 폭발하며 학생 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사이 비즈니스인사이더, 월스트리트저널 등과 인터뷰한 학부모들은 “한해 동안 두 아이의 학비를 4만달러나 냈는데도 기초학업성취도를 채우지 못했다. 학교에서 풀타임 보조교사가 필요하다며 월 2500달러를 내라고 해서 곧바로 아이들을 전학시켰다” “우리는 베타테스터가 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기니피그였다”는 불만을 쏟아냈다.
교육 컨설턴트이자 덴보스 초등학교 2곳의 교장을 맡고 있는 리머에게 “아이들의 학습능력이 떨어질 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는 시계추처럼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학생들은 수학과 읽기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여기 학생들은 아마 한국 아이들보다 좀 부족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자유를 너무 준 게 아닌가 생각하고 공부를 좀 더 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각자의 능력을 키워서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에 공헌하게 만드는 게 우리의 교육 목표입니다. 하지만 12세까지는 아이들에게 공부보다 노는 것이 더 중요하고, 놀면서 배우는 것도 많다고 생각해요.”
오후 3시, 아이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다. 등교할 때 보통 아이들을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것처럼 하교할 때도 대부분 부모 중 한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러 온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40%에 가까운 네덜란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부모 모두 풀타임으로 일하는 아이들은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학교가 돌봐준다.
하교길 마중을 나온 학부모들에게 이 학교가 왜 좋은지 물었다. 아들 매즈(7)와 딸 쥘(4)을 이곳에 보내는 크리스는 “이 학교가 혁신적이고 시대에 맞춰간다고 생각해서 선택했다”며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노는 것에도, 디지털 기술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에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자스민(8)의 엄마 엘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우리 애는 체육 수업이랑 아이패드를 가장 좋아할 걸요? 요즘 정말 많은 게 빨리 바뀌고 있잖아요. 집에서만 가르쳐서는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시키기 역부족일 것 같아요.”
숙제 없이 집에 가는 아이들의 표정도 밝았다. “아빠가 아일랜드계여서 영어를 잘한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루나(9)에게 “오늘 수업 중에 뭐가 제일 재미있었냐”고 묻자 루나는 “전기를 가지고 놀았던 게 제일 재미있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분명히 전류가 흐르는 원리를 배웠지만, 공부를 했다기보다는 ‘재미있게 놀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특별취재팀
장회정(토요판팀), 남지원·노도현(정책사회부), 박효재·심진용(국제부), 이석우·정지윤·강윤중·권도현(사진부), 배동미(디지털영상팀) 기자
■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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