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하게 준비된 ‘우발적 사건’
다른 편보다 200쪽 많은 3편
‘전두환 승리’ 공들여 기술
정승화 체포·육본 점거 상황
‘예기치 못한 사건’ 적으면서
노태우 증언은 “11월 초 결심”
<제5공화국 전사(前史)>(전9권)의 본문 제3편은 유난히 두껍다. 다른 편들이 300~400쪽인 데 비해 1979년 12·12 쿠데타를 다룬 3편은 500쪽이 훌쩍 넘는다. 전두환 정권이 자신들의 ‘비밀 역사서’에 쿠데타의 성공, ‘승리의 날’을 얼마나 공들여 기록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군부는 <5공 전사>에서 12·12를 박정희 독재의 시작인 5·16 쿠데타에 비교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견해” “졸견”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12·12를 정당화하려는 이들의 주장은 오히려 스스로 기록한 <5공 전사>에 의해 곳곳에서 뒤집힌다. 자세한 기록들이 자충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5공 전사> 3편은 12·12를 ‘사건’으로 규정한다. ‘예기치 못한 돌발 사건’ ‘극적이고 찰나적이며 거의 본능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권 장악의 첫 단계로 군권 확보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불법적으로 연행, 조사한다. 정 총장이 10·26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초대로 궁정동 안가 다른 곳에서 중정 간부와 식사했다는 점을 들어 ‘내란방조죄’를 씌운다. 전두환 사령관이 직접 ‘김재규 단독범행’으로 수사 결론을 발표하고 한 달이 지난 때다. <5공 전사>는 정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고, 이후 신군부가 산하 부대를 동원해 육군본부와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를 장악한 것도 ‘우발적’ 충돌로 기술했다.
그러나 <5공 전사>에 자랑스럽게 실려 있는 ‘12·12 주역’들의 증언은 오히려 전 사령관의 계획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됐음을 드러낸다. 제9사단장 노태우 소장의 증언을 보면, 정 총장을 제거하겠다는 전 사령관의 결심은 이미 11월 초에 확고하게 섰다. 11월부터 보좌관인 허화평 대령, 합수본 조정통제국장 허삼수 대령,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33단장 김진영 대령 등과 상의하며 치밀한 작전을 짠 것이다. 경호실 33헌병대는 전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이미 12·12 일주일 전부터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12월 초에는 노태우 소장을 비롯해 제1군단장 황영시 중장, 제20사단장 박준병 소장 등 군 장성 9명에게 ‘12월12일 오후 6시30분, 수경사 30경비단 집결’을 통보했다. 기밀 유지와 함께 “속에는 군복, 겉에는 사복을 입고 오라”는 치밀한 지시도 덧붙였다.
‘대통령 패싱’ 쿠데타 합리화
“탈영병 도주” “각하 지시”
거짓말로 진압군 속이고
“최 대통령이 이해를 못하고”
“본래 의도가 순수·애국적”
‘비승인 군사 행동’ 자화자찬
신군부는 12·12 쿠데타를 ‘합법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기록한 <5공 전사>는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5공 전사>는 신군부의 거짓말까지 충실히 기록해놓은 것이다. 가령 우경윤 대령과 함께 정 총장을 강제연행하러 간 허삼수 대령은 위병소를 지날 때 ‘권정달 대령’이라고 신분을 속인다. 방문 목적은 ‘보고’라고, 동행한 ‘연행조’ 수사관들은 ‘대령들의 경호원’이라고 했다. 강제연행을 거부하는 정 총장에겐 “대통령 각하의 지시를 받고 왔다”고 말하고는, 총격전 끝에 끌고 나온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으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가 없는 반란이었다.
공관 지역을 장악하러 들어간 33헌병대 최석립 대령은 “총기휴대 탈영병이 탈출”해 진로를 차단하러 왔다고 속여 해병대가 지키던 위병소를 무력으로 접수한다. 최 대령은 이후 성환옥 대령이 이끈 또 다른 부대가 공관 지역 안에서 해병대에 포위되자 “공관 상황은 대통령 재가를 받은 합법적 행동”이라는 거짓말로 성 대령 일행을 빼낸다. <5공 전사>는 거짓말이 난무한 당시 상황을 기록하며 “기지를 발휘했다”고 적고 있다.
신군부의 반란을 진압하려는 군을 무력화하는 데도 거짓말들이 동원됐다. 육본이 진돗개를 발령하자 노태우 소장은 함께 있던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과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에게 “ ‘부엉이’가 발령됐으니 빨리 복귀해 부대를 장악하라”고 한다. 이후 반란군 각 부대의 서울 진입이 시작됐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반란군에 맞서 모든 부대의 서울 진입을 막도록 지시했지만 이미 반란군에 동조한 수경사 김진선 중령은 ‘사령관 지시’라고 거짓말을 하며 길을 열었다.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출동을 막는 이들에게 “각하 명령에 의해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러 간다”는 거짓말로 부대를 움직였다.
결국 반란군은 육본과 수경사, 특전사를 차례로 장악했다. 진압을 준비하던 장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체포했다. 정 특전사령관 체포 과정에서 반란군에 홀로 맞선 김오랑 소령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5공 전사>는 반란진압군의 움직임을 “당시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파악의 결여와 그와 같은 행위가 국가와 군에 초래할 위해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나타난 이성을 잃은 처사”라고 기록한다.
최 대통령의 정 총장 연행 재가는 12월13일 오전 5시10분에야 이뤄졌다. 이미 정 총장이 서빙고분실로 끌려가고 반란군이 군을 장악한 이후다. <5공 전사>는 이 같은 ‘사후 승인’의 불법성을 알고는 정당화를 위해 애쓴다. ‘12·12 사건의 당위성’이라는 장까지 따로 만들어 “최 대통령은 전의 관례를 이해치 못하고 국방장관을 통해 재가를 요청하는 행정상의 요식행위 절차를 요구함으로써 대통령의 재가가 늦어져 사건이 복잡하게 되는 면도 있었다”며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 오해와 시행착오에서 일어난 것이요, 합수본부의 본래 의도가 순수하고 애국적이며 합법적인 이상, 12·12 사건의 당위성에는 조금도 손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라고 합리화한다.
<5공 전사>에는 쿠데타에 나섰던 신군부의 자화자찬도 많다. 반란을 총지휘한 전 사령관에 대해 “바쁘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일을 처리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줬다”, 쿠데타 참여 군인들은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 강직한 면을 가지면서도 군을 사랑하는 데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신중한 장교였다”는 것이다.
12·12 이후 전 사령관은 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마침내 ‘5공화국’ 출범 절차를 밟는다. <5공 전사>는 “정부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에게 정식 재가를 얻어 합법적인 수사 절차를 밟으려 했던 것을 우리는 안다”며 “5·16 혁명처럼 정권 장악을 위한 군사동원의 사전 모의가 전혀 없었다”고 ‘정권 장악 의도’를 부인한다. ‘5공 출범’에 대해선 “12·12 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역들이 자연히 사회안전과 혁신의 중심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치부한다. 반란군의 한 장교는 12·12 당시 진압군의 발포를 막으며 “쏜다면 역사적인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대로 12·12 쿠데타 주역들에게 돌아갔다. 1997년 대법원은 이들이 공모해 반란행위를 저질렀다고 유죄를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