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 전사(前史)>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의 집권 과정을 자신들의 관점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신군부의 정권탈취 시발점이 된 12·12 쿠데타를 미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노태우·황영시·백운택·박준병·박희도·최세창·장기오·유학성·차규헌 등 당시 쿠데타 주역들의 생생한 증언을 대거 실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 신군부 주역들은 <5공 전사>에 실린 증언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판단을 입을 모아 칭송하고 우국충정에 감사한다. 또 군의 신뢰 회복과 국가 혼란 진정을 위한 ‘구국의 결단’을 도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증언은 12·12 진행 과정에서 신군부가 무엇을 정당화하려 했는지,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강조하려 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자료다. 자신들의 관점과 입맛에 맞게 정리된 증언은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거짓으로 구성돼 있다.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5공 전사>의 진실과 거짓은 이후 신군부가 역사의 심판대에 섰을 때 그들 스스로의 목줄을 죄는 올가미가 됐다.
1979년 12월5일 허삼수 합수본부 조정통제국장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라. 병력은 약 50여명이 좋겠다.”
▶ 12·12 사건 일주일 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최석립 중령(경호실 33헌병대장)을 불렀다. 이후 최 중령은 정예요원 60명으로 집중 훈련에 들어갔다. 병력은 12·12 당일 육군참모총장 공관 인근 위병소를 장악했다.
노태우 9사단장
“정승화 총장을 수사해야겠다는 합수본부장 전두환 장군의 결심이 이미 11월 초에 확고히 섰으며 다만 적절한 시기만 기다려 온 것”“정 총장이 그러한 (자진사퇴) 제의에 응하면 ‘총장 대신 합참의장이라도 하십시오’ 하려고 했다.”
▶ <5공 전사> 인터뷰에서 노태우 9사단장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11월 초부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을 계획했다고 했다. 전 합수본부장과 하나회 군인들은 군 인사에 개입할 의도를 갖고 12·12 사건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1994년 대법원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등은 군 지휘권을 장악하려 정 총장의 체포, 그 후 대통령에 대한 강압·병력동원 등 반란행위에 대해 개별·순차적으로 모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정 총장의 체포를 알고 난 뒤 이를 용인·지지하면서 집단을 이뤄 병력을 동원하거나 이에 가담한 이상 공모하여 반란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1979년 12월12일 유학성 군수차관보
“각하 지금 합수본부장이 조치하고 있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반드시 재가를 해 주셔야 합니다. 빨리 조치 안 하시면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이런 일기에 군이 자칫 잘못하면 혼란이 가중되고 전쟁을 자초하게 됩니다.”
▶ 1979년 12월12일 전 합수본부장을 비롯한 군 장성들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수사 재가를 요구하고 있을 때, 이미 합수본부 수사관들은 정 총장 체포를 진행한 뒤였다.
1979년 12월12일 정도영 보안사령부 보안처장
“총장 연행 사건은 사령부에서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고 각하의 재결을 얻은 것이며, 따라서 모든 조치는 사령부에서 할 텐데 육본 상황만 수시로 보고해달라.”
▶ 비상이 걸린 육본 상황실에 도착한 변규수 육본 보안부대장이 보안사령부에 전화를 걸자, 정도영 보안처장은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한 뒤 육본 동향 파악을 지시했다.
1994년 대법원 “대통령이 1979년 12월13일 05:10경 정 총장의 체포를 재가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 총장이 체포되고,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고인들이 동원한 병력에 의해 육군본부와 국방부가 점령되고 피고인들의 반란을 저지·진압하려고 한 장성들이 제압된 후에 이뤄진 것으로서, 이는 사후 승낙에 불과하며, 사후 승낙에 불과한 위 재가로 인해 이미 성립한 피고인들의 기왕의 반란행위에 해당하는 정 총장의 체포행위나 병력동원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합수본부장
“명승아. 병력이 너무 많이 와 있지 않느냐? 인근 주민이라든가 다른 분들이 공포심을 갖을 염려가 있으니 불필요한 병력은 철수시키는 것이 좋겠다.”
▶ 노태우 9사단장의 지시를 받은 고명승 청와대 상황실장은 총리공관을 지키던 구정길 특별경호대장과 대원들을 무장해제·감금한 뒤 101경비단, 55경비대 등 경찰 병력을 동원해 총리공관을 접수했다. <5공 전사>가 설명하는 이들 병력의 배치 목적은 ‘대통령 경호’가 아니라 ‘전두환 합수본부장 일행의 신변 보호’였다.
1979년 12월12일 황영시 1군단장
“이승만 대통령이 헌법도 국가와 국민의 안정을 보위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 안정이 흔들리는 판에 헌법절차 따지고 들 때가 아니라고 한 일이 있는데 지금 계통 밟아서 대통령 재가를 얻을 때가 못 됩니다.”
▶ 총리공관으로 몰려간 황영시·유학성·차규헌·백운택·박희도 등 군인들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육참총장 수사 재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절차를 문제 삼으며 서명을 미뤘다.
1994년 대법원 “대통령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사건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아 이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위 정동호 등이 국무총리 공관을 점거·포위한 가운데 위 피고인 등 수도권의 군 지휘관 등이 늦은 저녁시간에 갑자기 집단으로 대통령을 방문하여 1시간이 넘도록 머물면서 정승화 총장의 체포에 대한 재가를 거듭 요구하였음을 알 수 있는 바, 이러한 행위는 대통령에 대한 강압이라고 보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이와 반대되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1979년 12월12일 백운택 71훈련단장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서 일을 바로 하려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상대방에서 병력과 전차를 동원하다니 잘못하면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냐?”
▶ <5공 전사>는 12·12 주역들의 병력동원을 철저히 ‘정당방위’론에 입각해 서술하고 있다. 합수본부가 병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대의가 허사로 돌아가고, 군이 분열되며, 자칫 국가도 붕괴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1979년 12월12일 박희도 1공수특전여단장
“나는 각하 명령에 의해 병력을 출동하여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러 갑니다.”
▶ 박희도 1공수특전여단장은 수경사령부와 특전사령부의 병력 출동 금지 지시에 불복하고 전 합수본부장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출동시켰다. 특전사령관의 지시를 전달한 이순길 부사령관에게 박 단장은 ‘각하 명령’이라는 거짓말로 행군을 강행했다.
1994년 대법원 “군형법상 반란죄는 다수의 군인이 작당해 병기를 휴대하고 국권에 반항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국권에는 군의 통수권 및 지휘권도 포함된다고 할 것인바, 피고인들이 대통령에게 정 총장의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적법한 체포절차도 밟지 아니하고 정 총장을 체포한 행위는 정 총장 개인에 대한 불법체포행위라는 의미를 넘어 대통령의 군통수권 및 육군참모총장의 군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라고 할 것이며, 원심이 적법히 인정한 바와 같이 피고인들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위와 같은 행위를 한 이상 이는 반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