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를 마친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남기는 응원의 편지는 지난 30년간 이어진 현대 백악관의 전통 중 하나다. 선거 기간 중에는 정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다가도, 선거가 끝나면 ‘같은 미국인’으로서 서로 화합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전통을 공고히 한 인물로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별세한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을 꼽는다. 1992년 대선에서 자신의 재선을 저지했던 경쟁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진심 어린 응원의 편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부시 전 대통령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 중에 하나”라고 평가하면서, 역대 대통령이 남긴 편지의 내용과 그에 얽힌 뒷이야기를 소개했다.
■로날드 레이건(공화·40대) → 조지 H W 부시(공화·41대)
1989년 12월, 조지 H W 부시 공화당 대선 후보가 로날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후임으로 선출됐다. 부시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8년간 부통령을 지냈다. 퇴임을 앞둔 레이건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부시에게 짤막한 편지를 남기로 한다.
백악관 로고가 새겨진 종이를 사용한 다른 대통령과 달리, 레이건은 “칠면조들이 너를 쓰러뜨리게 가만두지 말라”는 문구가 적힌 아기자기한 편지지를 사용했다. 편지지 하단에는 쓰러져있는 코끼리 위로 칠면조들이 앉아있는 그림이 그려져있다. 공화당의 상징인 ‘코끼리’ 그림을 이용해 “비판자들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건넨 것이다.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민주·42대)
레이건의 편지가 같은 당 소속 동지에게 보내는 유쾌한 환영 인사였다면, 부시의 편지는 정적(政敵)에게 건네는 따뜻한 화해의 손길에 가까웠다. 후임자에게 남기는 응원과 지지의 편지가 오늘날 형태로 굳어진 것도 부시 대통령 이후의 일이다.
1992년 대선은 민주당 후보인 클린턴과 공화당 후보인 부시의 ‘디스전’으로 뜨거웠다.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으로 선공을 펴자, 부시는 “우리 집 개 밀리가 ‘두 멍청이(민주당 클린턴 대통령 후보와 앨 고어 부통령 후보)’보다 외교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맞섰다. 재정적자 해소를 공약으로 내세운 클린턴도 외교 분야에서는 경륜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유권자는 클린턴의 손을 들어줬고, 부시 대통령의 재선도 물건너갔다. 그러나 그는 레이건이 시작한 전통을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 그는 퇴임을 앞두고 백악관 집무실을 치우기로 한 날, 깨끗이 치워진 책상 위에서 클린턴에게 보낼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집무실에 혼자 앉아있자니 조금 외로워보이긴 했다. 특별히 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내가 그를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사실은 알려주고 싶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일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1993년 1월 부시에게 받은 편지 전문을 공개했다. 그는 부시 전 대통령을 “미국, 우리의 헌법과 제도,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미래를 믿는 명예롭고, 우아하며, 품위 있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한때 서로를 ‘바보’와 ‘멍청이’로 비난했던 두 사람은 2004년 동남아 쓰나미,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복구 활동에도 함께 참여하며 정파를 초월한 우정을 다졌다.
당신이 이곳에서 크게 행복하길 바랍니다. 나는 일부 대통령이 묘사했던 것처럼 외로움을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매우 힘든 시간이 될 것입니다.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비판 때문에 더욱 어렵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조언을 줄만큼 대단히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판자들이 당신을 좌절시키거나 경로에서 밀어내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이 편지를 읽을때쯤엔 우리의 대통령이 돼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그리고 당신의 가족의 건투를 빕니다.
이제 당신의 성공이 우리 나라의 성공입니다. 진심을 다해, 당신을 열렬히 응원하겠습니다.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공화·43대)
클린턴 전 대통령도 2001년 취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는 8년 전 클린턴에게 응원 편지를 남겼던 조지 H W 부시의 장남이기도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지금 당신이 어깨에 지고 있는 짐은 분명 무겁지만, 실제보다 과장돼 있을때도 종종 있습니다”며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는 순수한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고 썼다.
내가 그러했듯이, 당신은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중대하고 긍정적인 변화의 시대에 미국을 이끌게 됐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정부의 역할 뿐 아니라 국가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오랜 질문에 새로운 답을 내놓아야 할 때입니다.
당신은 자랑스럽고, 품위있으며, 선량한 국민들을 이끌게 됐습니다. 바로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 모두의 대통령입니다. 당신에게 성공과 행복이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당신이 어깨에 지고 있는 짐은 분명 무겁지만, 실제보다 과장돼 있을때도 종종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는 순수한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의 축복이 있길!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민주·44대)
8년 임기를 끝마친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2009년 1월 취임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편지를 남겼다.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그리고 또다시 민주당으로 정권이 세번 바뀌는 동안에도 전통은 끊김없이 이어졌다.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공화·45대)
역대 가장 치열했던 선거 중 하나로 꼽혔던 2016년 대선이 끝나고, 또다시 공화당 정권이 들어섰다. 지난해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백악관 책상 서랍 속에서 전임 오바마 대통령이 남긴 편지를 발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려깊고 아름다운 편지”라면서도,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다만 CNN이 지난해 9월 편지 내용을 단독 입수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오바마의 편지에는 전임자들에 비해 비교적 구체적인 조언을 담고 있다. ‘세계의 리더’로서 미국의 역할을 당부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우선주의(American First)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는 부분이다.
대통령 직은 독특한 업무입니다. 성공을 위한 명백한 청사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특별히 도움이 될 충고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지난 8년간 깨달은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째,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엄청나게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운이 좋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려는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성공의 사다리를 만들어주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 세계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정말이지 필수불가결합니다. 행동과 모범을 통해 냉전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게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자신의 부와 안전도 그에 기대고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이 자리를 잠시 맡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피 흘리며 싸워 지킨 법치, 분권, 평등한 보호, 시민적 자유 등의 민주적 제도와 정책의 수호자 역할을 합니다. 일상의 정치가 흔들리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우리 민주주의의 수단들이 최소한 더 약해지지는 않도록 지키는 게 우리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온갖 사건과 책임이 밀어닥칠 때, 친구들과 가족을 위한 시간을 내십시오. 피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그들이 도움을 줄 것입니다.
미셸과 나는 이 위대한 모험을 떠나는 당신과 멜라니아의 행운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식으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행운과 성공을 빌며, BO
■도널드 트럼프 → ?
이제 대통령 역사학자들의 눈은 기존 정치 문법을 따르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 전통을 계속 지켜나갈지에 쏠려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기간 오바마 대통령의 거의 모든 정책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도 이란 핵 합의를 비롯한 대내외적 정책을 뒤집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