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알아야 할 '나의 낙태 경험'

2019.04.13 10:48 입력 2019.04.13 10:55 수정
이하늬 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2017년 11월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 폐지 시위를 하고 있다./김기남 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2017년 11월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 폐지 시위를 하고 있다./김기남 기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월 발표한 ‘인공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보면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 5명 중 1명이 임신중절 수술을 했다고 응답했다. 성관계 경험이 있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질문에서도 10명 중 1명이 수술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대대적인 낙태 실태조사가 이뤄진 것은 2011년 이후 7년 만이다.

10명 중 1명, 5명 중 1명은 적은 비율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서 자신의 낙태 경험을 밝히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한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임에도 낙태는 늘 정부나 종교계, 산부인과 의사, 여성단체 등에서만 논의되어 왔다. 왜 낙태를 선택했는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주간경향>은 임신중절 수술 경험이 있는 당사자 3명을 만났다. 30대 중반과 30대 후반, 그리고 40대 후반인 여성 셋의 경험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멀게는 20년 전, 가깝게는 최근 임신중절 수술을 했다. 이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낙태와 실제 낙태에는 차이가 있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신상은 밝히기 어려워했다.

#1. ㄱ씨(30대 중반, 낙태 당시 20대 초반, 현재 비혼)

ㄱ씨는 생리주기가 ‘칼 같다’. 애매하게 한 달도 아니고 정확히 28일 주기로 생리를 시작한다. 덕분에 임신사실을 빨리 알 수 있었다. 임신테스트기를 사러 약국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길 몇 차례나 반복했다. 결국 테스트기는 남자친구가 사왔다. 선명하게 두 줄이 나왔지만 믿을 수 없어 몇 개를 더 샀다. 제발 하나라도 한 줄이 나오길 바랐지만 모두 다 두 줄이었다.

가장 무서웠던 건 ‘부모님’이었다. 엄격한 부모님에게 임신사실을 알릴 바에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온라인에서 추천받은 산부인과로 갔다. 여자의사는 딱 봐도 20대 초반의 학생처럼 보이는 ㄱ씨와 남자친구에게 “결혼은 언제 하실 거예요?”라고 물었다. ㄱ씨는 “나를 비난하려고 일부러 꺼낸 말 같았다. 너무 가증스러웠다”고 말했다. ㄱ씨는 당시 일련의 사건 중 그때가 가장 수치스러웠다고 기억했다.

수술은 다른 병원에서 했다. 비용은 남자친구가 냈다.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ㄱ씨와 남자친구가 가장 어렸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여자 어른’들의 눈치가 보였다. 자신은 그 병원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수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차갑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차가운 느낌이 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회복실이었다.

낙태가 여성의 몸에 미치는 영향은 출산이랑 비슷하다며 남자친구가 며칠 동안 미역국을 끓여줬다. 크게 아프지 않았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아이의 성별을 잠시 생각했지만 4주차면 성별이 정해지기는커녕 장기도 형성되기 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엄마’라는 말은 안 나왔고 그냥 ‘내가 미안해’라는 말을 계속 했던 거 같아요.”

며칠 뒤, ㄱ씨는 망설이다가 일기장을 폈다. 그래도 그 날을 기록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만 알 수 있는 단어들을 일기장에 적었다. 한 달쯤 지나고 ㄱ씨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ㄱ씨가 임신중절 수술 경험이 있다는 사실은 당시의 남자친구, 그리고 지금 남자친구만 알고 있다. 망설여졌지만 말을 꺼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ㄱ씨는 “저는 그 시기를 무난하게 넘겼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죄를 지어서 아이를 못낳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일종의 죄의식인 거죠. 아마 이 생각은 평생 할 것 같아요”라며 “그리고 그때 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 낙태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괜찮다고, 죄의식 갖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2. ㄴ씨(30대 후반, 낙태 당시 30대 후반, 현재 기혼, 자녀 없음)

ㄴ씨는 지난해 임신중절 수술을 했다. 결혼 8년차에 생긴 아이였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컸다. 결혼하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부 모두 불임클리닉 같은 곳에 가면서까지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았다. 양가 부모님도 부부의 의사를 존중했다.

결혼 5년차가 지나고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5년 동안 되지 않은 임신이 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일상의 스트레스는 술과 담배로 풀었다. 그래서 임신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걱정됐던 건 아이의 건강이다. “아이가 아프면 치료비야 그렇다치고 그게 행복한 삶일까? 혹시 장애가 있으면 평생 차별과 싸워나가야 할 텐데.”

실제 주변에는 아픈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ㄴ씨 사촌언니도 그 중 한 명이다. 능력을 인정받으며 일했던 사촌언니는 직장을 그만뒀다. 형부는 쉬는 날이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사촌언니에게는 미안해서 말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그런 상황을 겪게 될까봐 무서웠다. 부부는 낙태를 결정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2017년 11월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 폐지 시위를 하고 있다./김기남 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2017년 11월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 폐지 시위를 하고 있다./김기남 기자

낙태비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다만 현금을 요구했다. ㄴ씨에게는 부담이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는 부담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수술 이후 병원은 ‘자궁수축 촉진제’를 권했다. 수축 촉진제, 영양제 등 받을 수 있는 처치는 다 받았다. 하지만 역시 누군가는 비용은 물론이고 다시 병원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ㄴ씨의 일상은 낙태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술 이후 느끼기 쉽다는 우울감도 없었다. 오히려 우울감이나 죄의식이 들지 않아서 ‘죄책감’이 들긴 했다. 이게 모성애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 나는 모성애가 없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이어지자 아이를 낳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남편은 정관수술을 했다.

임신 당시, 아이의 건강이 염려된다는 고민을 털어놨을 때 ㄴ씨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회·경제적으로 짊어져야 할 짐이 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ㄴ씨는 손톱만큼 작은 태아의 발바닥을 보여주는 등 낙태의 잔임함을 강조하는 ‘운동’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에 낙태를 하려고 임신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럼에도 낙태를 결정하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주면 좋겠어요.”

#3. ㄷ씨 (40대 후반, 낙태 당시 20대 중반, 현재 기혼, 자녀 1명)

“아유,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얼마나 낙태를 많이 했다고.”

ㄷ씨는 25년 전쯤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 실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낙태는 사문화된 법이었다. 1970~1980년대에는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낙태를 대놓고 권유하기도 했다. 문제는 ㄷ씨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 성인이 돼서 피임약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주변에 복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약을 먹어서 생리주기와 배란기를 조절한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고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당시 남자친구는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했다. 콘돔을 끼거나 질외사정을 하는 거였다. 그때는 그러면 ‘완전’하게 피임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임신하면 어쩌느냐는 걱정에 남자친구는 임신이 되면 바로 결혼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임신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친구는 “애를 지우라”고 했다. 심지어 이후에는 연락까지 두절됐다.

국가가 낙태를 단속하지 않을 때라 비용은 비싸지 않았다. 다만 보호자가 동행해야 한다고 했다. 어려우면 전화로라도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가족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아기 아빠’인 것처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ㄷ씨는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수술이 끝나고 나오자 어지러웠다.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보다 친구가 더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마취가 풀리자 ‘밑이 빠지는 것’ 같이 아팠지만 친구에게 미안해서 아프다는 말을 못했다. 오줌이 계속 나오는 것 같아 화장실에 갔더니 오줌이 아닌 피였다.

잊고 있던 낙태의 기억은 결혼 후 임신과 함께 찾아왔다. “그때는 배가 불러오기 전에 수술을 했기 때문에 몸의 변화는 별로 없었어요. 우리 애 가졌을 때 석 달이 지나니까 입덧도 하고 배가 나오더라고. 그런데 왜 그렇게 그때 생각이 나는 건지. 내가 낙태를 안 했으면 그 애도 이랬겠지 싶은 거죠.”

호르몬 분비, 신체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 과거의 기억 등이 합쳐지며 우울증이 찾아왔다. 낙태를 했던 기억이 슬퍼서 울고,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또 울었다. 그래도 ㄷ씨는 돌아간다면 같은 결정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대답했다. “여건이 갖춰져도 이렇게 힘든데 그때 임신과 출산을 겪었다면… 상상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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