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대교 (하)
얼어붙은 물 위로 폭설이 내려앉고, 강이 설원으로 바뀐다. 그런 날이면 삐죽하게 솟은 녹색 트러스 위에 흰 눈이 수북이 쌓인 한강철교는 허공에 심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인다. 남쪽 땅끝에서부터 승객을 싣고 부지런히 달려온 기차는 한강철교를 건너면서 숨을 고르고 종착지인 서울역에 다가선다. 또 한번 여정이 끝난 것이다.
거의 보기 어렵지만 그 겨울풍경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국호가 아직 조선이었던 1897년에 착공한 철교 위로 12기의 전동 모터가 달린 1만8200마력의 고속열차가 지나갈 때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지나간 시간들이 소실점 위에 차곡차곡 포개지는 여운을 느낄 수 있다. 신속하고 과감하게 도시의 표면을 갈아엎는 바람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사적 맥락을 간직한 풍경이 거의 남지 않은 서울에서는 각별하게 귀중한 자산이다. 롯데월드타워가 아무리 높고 매끈해도 파리의 에펠탑, 런던의 빅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당장 될 수는 없다. 그건 건축술의 수준이나 미적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울의 대표 건축물로 경복궁과 숭례문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기에 지금 누가 살고 있으며 몇 번이나 방문했는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스물두 살 앳된 청년을 태운 기차가 무수하게 저 철교를 건넜다. 그 스물두 살의 젊은이 가운데는 집안의 철부지였던 윤봉길과 소학교 4학년 담임교사였던 박정희, 방학을 맞아 같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지만 아직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나의 부모님, 취업 추천장 하나만 믿고 순진하게 상경했다는 나의 애인 등이 있다. 옷짐을 구겨넣은 커다란 가방을 무릎맡에 내려둔 채로 차창 밖의 한결같은 강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그 기차 안에서 싹튼 우정, 그 기차 안에서 맺은 사랑, 그 기차 안에서 퍼뜩 떠오른 혁명적인 개념들이 지금 우리 세계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어떤 변수로 작용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역사는 공간의 흐름을 좇아 기록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기능하는 건축물들은 명명백백하게 우리의 눈앞에 존재하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애수 어린 분위기를 자아낸다. 먼 미래 지구를 떠나 수천개의 은하식민지를 개척한 우리의 후손들이 초공간 도약 엔진을 장착한 함선을 타고 이 행성에 돌아온다고 상상해보라. 그때도 여전히 전기동력으로 움직이는 열차를 지탱하고 있는 낡은 철교를 운 좋게 발견하게 된다면, 그들도 똑같이 애틋한 감정을 느낄 게 틀림없다.
몇 분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기차의 굉음을 음미하면서 철교와 나란히 뻗은 한강대교 위를 걷다보면, 길쭉한 타원 모양의 섬을 만난다. 섬의 현재 이름은 노들섬이고, 과거에는 교각을 떠받치는 주춧돌 역할을 해서 중지도라 불렸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섬의 이름이 붙지 않았다. 이곳으로부터 삼각지까지를 광활한 백사장이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반달을 그리며 물이 도는 한강의 어깨마다 낙동강과 섬진강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는 모래톱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까지 한강은 조수의 흐름에 강력하게 속박되어서 바다로부터 올라온 고래 사체가 모래 위에서 발견되곤 했다.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상서롭지 못한 조짐에 저마다 의미를 부여했다.
물과 뭍의 경계를 비스듬히 이어주는 강모래를 긁어내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제방을 세운 뒤로 물가는 절벽처럼 급하게 깊어졌다. 수천년에 걸쳐 유전자처럼 물려받은, 한강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픈 아이들의 충동을 억누를 필요가 생겼다. 위압적인 붉은색 궁서체로 ‘위험’ ‘입수금지’라 쓴 팻말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강 근처 초등학교의 교사들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걸 실행하도록 부추기는 꼴일 터였다.
나는 한강이 교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강이 너무 가까워서 장마철이면 불어난 물이 도로를 침수시키고 운동장에 넘쳐들어와 지도에 나오지 않는 강의 새로운 지류를 만들 정도였다. 학생들을 강에서 떨어뜨려두기 위해 내 담임 선생님이 고안한 방법은 익사한 수영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강둑 아래 거대한 정수용 흡입 펌프가 돌아가고 있어서 빨려 들어가면 누구도 나올 수 없다고 그는 겁을 주었다. 물귀신이 발목을 잡는다고 했다면 코웃음쳤겠지만, 나는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이 솜씨 좋은 괴담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미신이 그럴듯하게 버무려졌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도 이 속임수에 당할까? 그럴 리 없다. 현대의 아동 사고 위험이 크게 증가한 데는 기술이 바꾼 물리적 환경과 인간의 본능적 행동 양식 사이에 틈이 벌어진 탓도 있지만, 어린 세대의 지적 능력이 문명의 단계에 맞게 점점 진화하는 이유도 있다. 오늘날의 초등교사라면, 강물에 부유하는 병원성 미생물에 감염되었을 때 나타나는 치명적인 증상쯤은 줄줄이 지어낼 수 있어야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광활한 백사장, 바다로 떠날 여력 없던 이들의 소박한 피서지였던 곳
이명박·오세훈…‘욕망의 삽질’은 되돌릴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고
오페라하우스는 임시텃밭을 거쳐 결국 대중음악 공연장으로 타협했다
공사 중인 노들섬은 철제 가벽에 둘러막혀 들어갈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지만 굳이 누구도 출입하지 않는 빈 땅이었다. 서울시장 재임기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곳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는 구상을 세웠고, 후임인 오세훈 시장은 사업 규모를 야심차게 키웠다. 청소년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하며 막아섰을 때 그는 격렬한 분노에 직면해야 했다. 초대장을 남발한 나머지 실관객수가 집계조차 되지 않는 오페라 관람객을 위한 6800억원짜리 건축 계획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기 때문이다.
공사가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노들섬에는 신명을 내며 오른쪽 다리를 접어올린 민속 광대의 춤사위를 형상화한 오페라 전문 공연장이 들어섰을 터다. ‘역대급’ 토목공사와 청소년 무상급식 사이에 배수의 진을 쳤던 전임 시장이 사퇴하고, 후임인 박원순 시장은 오페라하우스 부지에 시민 임대 텃밭을 만들었다. 하지만 말라비틀어진 채소를 제외하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게 된 시민들의 텃밭을 보았을 때, 시민단체 출신의 새 시장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명분에 충실한 나머지 시민들의 욕망을 헤아리지 못했음을. 정책 실패의 양극단을 겪었던 이곳에는 타협점을 찾아 대중음악 공연장이 조성되고 있다.
노들섬의 공간 가치를 최대화하는 방법을 두고 많은 이들이 머리를 싸맸다. 수천시간의 회의와 수만장의 제안서, 수백억원의 공사비가 허공에 흩어졌고, 개인적인 취향을 드러내며 섣불리 삽을 들었던 시장들은 뒤따르는 논란에 발목이 잡혔다. 차라리 이 작은 무인도가 아틀란티스처럼 스스로 물밑에 가라앉았다면 그들도 고민을 덜었을까? 어쩌면 최선은 아예 손대지 않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한 세기 동안의 시행착오를 되돌릴 수 있다면.
아~ 그대로 두었다면…태양이 달군 모래밭에 시민들 북적였을 것을
수백억을 허공에 날린 한 세기의 시행착오…섬은 슬프고 애틋하다
개발 이전 노들섬의 백사장은 바다로 떠날 여력이 없는 시민들의 소박한 피서지였다. 그대로 두었다면, 한 손에는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차가운 맥주병을 쥐고 맨발을 태양이 달군 모래에 파묻은 시민들로 오늘도 북적이고 있지 않았을까? 한낮의 무더위가 지나간 뒤 빨간 파라솔을 접을 즈음에는, 한때 이 섬을 장악했다는 백로 무리가 수풀을 박차올라 석양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감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름마다 낙원을 꿈꾸며 비행기에 오르는 도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공간은 그런 곳일지도 모른다. 개발 시계를 한 세기 전으로 되돌려 모래톱을 복원하고 한강을 재자연화하자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손을 탄 노들섬이 제 모습을 되찾기는 어려워졌다. 이 섬을 뒤덮었던, 금가루처럼 반짝이지만 금가루처럼 퍼다 팔 수 없는 모래알은 과거의 개념으로는 사용가치가 크지 않은 자원이었다. 엘도라도를 찾아 떠났던 스페인 탐험가들 역시 콜롬비아의 금광 채굴을 복잡하게 만드는 이상한 광석 가루를 똑같이 취급했다. 그들은 황금 원석에 불순물로 섞이면 정제조차 어려운 이 회백색 원소를 덩어리째 캐다 버렸다. 후세대 탐험가들이 쓰레기 더미를 수색하기 시작한 건 이 광물에 백금이라는 이름이 붙은 뒤였다.
몇년 전 노들섬에서 한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최소한까지 체로 거른 단어를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 밖에 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정부의 여러 개발 정책을 매번 홀몸으로 맞섰고, 이번에는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천의 모래톱을 지키려고 싸우는 중이었다. 그가 정치인의 반대편에 설 때마다 지지자들의 거센 반격이 돌아왔다.
종단의 지원조차 없는 외로운 투쟁의 승산을 높이려면 상황을 소란스럽게 만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간파했으면서도, 구설에 오르는 게 성정에 맞지 않아 그는 버거워하는 인상이었다. 나는 잡지사의 의뢰로 서울로 올라온 스님을 인터뷰했다. 모래를 ‘강에 실려 흐르는 땅’이라 부르는 그가 노들섬을 인터뷰 장소로 고른 데는 분명한 정치적 함의가 있었다. 내가 왜 노들섬을 선택했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한강 개발로 노들섬이 모래를 잃었듯 4대강 개발로 다른 곳도 모래를 잃고 있기 때문이라고 빈틈없는 웅변조로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신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인적이 드문 장소라서요. 저는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나는 불가적인 고요가 느껴지는 문장 뒤로 주장을 슬며시 숨겨놓은 그 표현이 더 마음에 들었다.
훗날 스님은 자신이 맞섰던 정치인에게 투표한 적이 있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다. 자연과 생명을 지키려는 그의 전쟁에서는 적이었지만, 사회 전체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최선이라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공개적으로 밝힐 수도 없었고 자신의 싸움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지지 세력끼리 전쟁의 기수들처럼 증오를 불태우는 동안, 각자의 입장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종교인과 정치인에 대해 나는 상상해 보았다. 평면적인 세계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걸 모순이라 부르겠지만, 작가가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어휘들이 사전 바깥으로 소멸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쉽게 표현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것은 슬픈 카르마였다.
노들섬을 둘러싼 논쟁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난립하는 정치적 주장들, 반론과 재반론, 강행과 백지화, 야망과 몰락 끝에, 가장 민주적인 동시에 책임이 확실하게 분산되는 아이디어 공모전이 개최됐다. 나 역시 제안서를 써서 서울시 관계자에게 가져갔다. 코스타리카의 유기동물공원을 모티브로 삼은 도시형 유기동물원이었다. 내 상상 속의 노들섬에는 방문객들이 희귀동물을 구경하는 대신 흔한 도시 유기동물을 돌보는 아름다운 동물원이 이미 개장하고 있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미지근했다. “멋진 아이디어군요. 과연 현실적일까요?” 그가 옳았을 수도. 내가 볼 수 없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였을 것이다. 결과를 감수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신경 쓰는 현실과 상상 사이 커다란 틈이. 어쩌면 나와 대화하는 동안에도 그는 떠올렸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세계 순회공연차 내한한 파리 국립오페라단 소속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카르멘의 청명한 아리아를 상상했고, 누군가는 돗자리 위에 손수 재배한 상추와 고추를 펼쳐놓고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상상했지만, 인기척도 없는 적막만이 감돌게 된 작은 섬을.
2008년 과거 자신이 활동한 힙합 그룹의 이름을 딴 동명의 소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를 발표했다. 2010년에는 장편소설 <소수의견>의 원작자이자 공동 각본가로 제24회 부일영화상 각본상과 제36회 청룡영화상 각본상 등을 수상했다. 그 외 <디 마이너스> <세계를 만드는 방법> 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