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다음은 뭐지? 다시 종이책이 아닐까? 사람들이 아날로그에 굶주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에 배고파 있다고 생각해요. 모니터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총합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고 크기와 무게가 있고 감촉이 있는 매체를 그리워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1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영원히 새롭게 출현하는 것들’이란 주제로 종이책과 문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강연은 강지희 문학평론가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증강현실(AR)의 시대가 올거라고 하는데, 증강현실을 통해 누군가의 내면, 생각과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오감을 자극할 수는 있겠지만 영혼으로 들어갈 순 없어요. 진정한 증강현실은 책 속에 있지 않을까요. 문학은 인간 내면의 끝까지 들어가볼 수 있는 매체입니다. 결국 앞으로 새롭게 출현해올 것은 잠시 사라지고 있다고 믿었던 종이책과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문학이 다루는 인간의 삶과 죽음, 고통, 사랑, 슬픔 등은 영원히 새로운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강은 지난달 노르웨이 ‘미래의 도서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지난달 오슬로 외곽의 ‘미래도서관의 숲’에서 원고 전달식을 가졌다. 원고 제목은 ‘사랑하는 아들에게(Dear Son, My Beloved)’으로, 95년 뒤인 2114년 출판하는 프로젝트다. 한강은 강연에서 노르웨이에서 열린 행사에서 흰 천을 끌고 숲으로 들어가 원고를 싼 뒤 흰 실로 묶어 전달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고를 받은 노르웨이 오슬로 시장이 100년 뒤에 꼭 출간해주겠다고 말했어요. 그들의 낙관이 부럽기도 했어요 한국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영속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 건물이 무너졌다가 새로 세워지고 자연이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환경 속에서 살아와 영원의 이미지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한강은 ‘미래의 도서관’에 대해 “미래에 대한 기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이 확실할 때는 기도하지 않는다. 아무런 확신이 없고 인간의 힘으로 애를 써도 안되는 일이 있을 때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며 “100년 뒤에 원고를 준 사람들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고 새로운 작가가 태어나서 불씨를 옮기는 것처럼 이어지는 거다. 덧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불확실성이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강은 종이책의 매력에 대해 “전자책으로 책을 읽으면 책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알 수 있는 감각이 없어서 아쉬웠다. 책을 읽으면서 남은 페이지를 보며 결말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한 독자분은 전자책으로 <희랍어 시간>을 읽었는데 결말이 갑작스레 끝나 미완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더라”며 “소설은 길이와 관계가 있고, 전체적 레이아웃과 디자인 자체도 많은 영향을 끼쳐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강은 ‘책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저를 만들어줬고, 저를 살게 해줬던 책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책을 한 권 쓰고 싶다”며 “직육면체의 커버로 닫혀진 이 세계 속에 다른 세계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 그게 언제나 특별하다”고 말했다.
“책을 많이 읽고 나면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책을 바빠서 못 읽는 시기엔 사람이 희미해진달까,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느껴요. 책에 대한 허기가 져서 몇일동안 정신없이 책을 몰아서 읽으면, 어느 순간 충전됐다, 강해졌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책을 읽지 않을 땐 자신이 부스러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읽고 나면 부스러졌던 부분이 다시 모아지는 느낌이 있어요.”
한강은 현재 ‘눈’ 연작소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쓰고 있다. 한강은 “‘눈’ 3부작 마지막 파트는 <소년이 온다>와 조금 관련이 있다. 그것을 쓰고 나서의 이야기, 그 소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관한 이야기”라며 “소설이 잘 써지지 않아 작년 말에 완성하려던 걸 못 하고 있다. 여름동안 두문불출하며 소설에만 집중해 완성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강은 “소설쓰기는 아주 좁은 길, 실처럼 가는 길 같다. 길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게 되면 진실하지 않고 상투적이게 된다”며 “길이 끊어졌다고 생각돼도 어딘가에 아주 좁은 길이 있지만 그걸 못 찾아서 그런 거라고 믿으며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한강은 소설도 쓰고, 시도 쓰고, 음악도 만든다. 그는 ‘겨울’을 주제로 작사·작곡을 한 신곡 두 편이 있다고 했다. 현재 쓰는 소설을 마치면 음반 발표도 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강은 “제 노래는 기대하면 안된다. 부르는 게 아니라 속삭이는 것”이라며 웃었다. 200여명의 독자가 모여든 강연의 마지막에 한강이 말했다. “책 속에서 계속 만나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