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블랙유머로 포착한 ‘전범기업의 진실’

2019.07.26 20:58 입력 2019.07.26 21:04 수정

그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지음·이재룡 옮김

열린책들 | 176쪽 | 1만2800원

[책과 삶]블랙유머로 포착한 ‘전범기업의 진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전운이 감도는 유럽의 풍경을 포착한 소설 <그날의 비밀> 표지의 주인공은 다소 낯선 얼굴이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히틀러도, 나치 돌격대장이었던 괴링도 아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거대한 군수기업이었던 크루프사를 이끈 구스타프 크루프다. 크루프사는 현재 세계 굴지의 철강기업인 티센크루프의 전신이기도 하다. 티센크루프는 동양엘리베이터를 합병,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코리아로 명칭을 바꾸고 한국에서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날의 비밀>의 프랑스판 표지 역시 크루프의 사진이며, 소설의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모두 크루프가 등장한다. 소설을 열고 닫는 이가 모두 크루프라는 점은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지, 전쟁의 어떤 측면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현재 우리에게 역사가 남긴 숙제는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소설은 1933년 2월20일, 독일 산업과 금융을 대표하는 스물네 명의 인물과 괴링, 히틀러의 ‘비밀 회동’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회동엔 구스타프 크루프를 비롯, 알베르트 푀글러, 귄터 크반트와 같은 이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진정한 이름은 사실 바이엘,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켄 등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동차, 세탁기, 세제, 라디오시계, 화재보험, 그리고 건전지의 이름이다.”

스물네 명의 기업가는 “뇌물과 뒷거래에 이골이 난 사람들”로 “부패는 대기업의 회계 장부에서 긴축 불가 항목”이다. 이들에게 2월20일 회동은 ‘경영자와 나치스의 미증유의 타협’이 아니라 “사업하다 보면 겪게 되는 매우 일상적 일화, 진부한 모금 활동과 다를 게 없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을 기념해 만든 카드 형태의 지도인 ‘오스트리아의 안슐루스(합병)’. <지구 끝까지, 세상을 바꾼 100장의 지도>에 수록돼 있다. 푸른길 제공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을 기념해 만든 카드 형태의 지도인 ‘오스트리아의 안슐루스(합병)’. <지구 끝까지, 세상을 바꾼 100장의 지도>에 수록돼 있다. 푸른길 제공

에리크 뷔야르의 소설 <그날의 비밀>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과정을 그린 짧은 소설이다. 2017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공쿠르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에서만 42만부가 판매되고 30여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뷔야르는 <그날의 비밀> 외에도 서구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을 다룬 ‘역사 다시 쓰기’를 해왔다. 프랑스 대혁명을 다룬 <7월14일>, 아프리카에 자행된 벨기에 제국주의의 폭력을 그린 <콩고>, 최근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에 호응해 쓴 <가난한 사람들의 전쟁> 등을 통해 그는 역사의 주인공보다는 조연들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날의 비밀> 역시 2차 세계대전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배후 인물, 조력자, 공범자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은 전쟁 하면 떠올리는 격렬한 전투, 포성과 연기, 잔인한 학살을 그리지 않는다. 흔한 총성 소리 한 번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차가울 정도의 냉소적 시선으로 당시 상황을 관망한다. 그런데 무엇이 이 소설을 뜨겁게 만들었을까. 바로 그 ‘차가움’에 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유럽 주요국의 정치인, 경제인들이 어떻게 비겁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를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의 조연에 대한 블랙유머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소설 곳곳에 잠복한 촌철살인의 블랙유머는 역사의 이면에 자리한 진실을 포착해낸다.

예를 들어 독일의 오스트리아 침공이 이뤄지는 동안 영국의 처칠 등 유럽 주요국 장관이 참석한 오찬에선 테니스 선수에 대한 한담이 주를 이루는 ‘끝없는 식사’가 이어진다.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영국은 드러누워 평화롭게 코를 골고 프랑스는 단꿈에 빠져서 세상 모두가 나 몰라라 하는 그 순간”에 비극은 일어났다.

작가 에리크 뷔야르.

작가 에리크 뷔야르.

작가는 소설에서 “역사는 스펙터클”이라며 “진실은 온갖 종류의 먼지 속에 흩어져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작가가 벌이는 작업은 우리의 눈을 현혹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스펙터클을 걷어내고 흩어진 진실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소설 속에 그려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함락 과정은 괴벨스가 만든 선전 영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극적이지 않다. 독일군의 탱크는 고장이 나고, 영광적이어야 할 진군은 ‘교통 체증’으로 변해버린다. 오스트리아에서 나치 지지자들은 지루하게 오지 않는 독일군을 기다린다.

소설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병합 다음날, 네 건의 짧은 부고기사를 소개한다. 히틀러의 우스꽝스러운 오스트리아 진군이 괴벨스에 의해 극적으로 연출된 영상으로 남은 것과 절망한 유대인의 잇따른 자살이 간략한 부고기사로 단순화돼버린 현실이 대비되어 다가온다.

소설의 마지막 장, 1944년으로 시간이 이동하고 늙고 병든 구스타프 크루프가 다시 등장한다. 치매에 걸린 크루프는 어둠 속에서 수천 수만구의 시체들, 강제노동자들을 본다. 나치에 100만마르크를 쾌척한 대가로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에서 데려와 노동력을 착취했던 이들이다. 1943년 크루프 공장에 도착한 600여명의 수감자 중 1년 후까지 남은 사람은 20명뿐이었다. 나치에 천문학적 금액을 아끼지 않은 크루프는 전후 보상금으로 생존자 한 명당 2250달러를 지불했을 뿐이다.

소설을 옮긴 이재룡 숭실대 불문과 교수는 “20세기 비극의 주범과 공모자들이 한결같이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한 장사꾼, 광대, 소심하거나 무능력한 정치인이었다는 것이 에리크 뷔야르의 일관된 생각”이라며 “그의 역사관이 지금, 어디에서나 여전히 혹은 지난 세기보다 더욱 강력하게 절실”하다고 말했다.

일제의 식민지배 당시 벌어진 미쓰비시중공업 등의 강제노역에 대한 법원의 배상 판결로 한·일 경제갈등이 심화되는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크루프와 같은 전범 기업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크루프는 나치에 협력한 대가로 전시 특수와 수용소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세계 굴지의 기업이 됐다. 그러나 생존자들에게 지급한 보상금은 터무니없이 작았다. “이것이 까마득한 옛일에 속한다고 믿지 말자. 그들의 이름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들의 재산은 엄청나다”는 소설 속 구절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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