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작고한 앨런 크루거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도 지낸 불평등 분야 실증연구 전문가였다. 그가 미국 사회의 심화되는 부(富)의 불평등 문제를 부모와 자녀 간 신장(키)의 상관관계로 비유한 적이 있다. 소득 하위 10% 가구에서 태어난 사람이 상위 10% 계층으로 올라갈 확률은 키가 170㎝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키가 185㎝가 될 확률과 거의 비슷하다는 거다. 유전자의 장벽에 속상해하는 키 작은 아버지들에겐 참 씁쓸한 얘기인데, 왜 굳이 이런 연구까지…. 고착화된 불평등 속에서 계층상승의 희망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꼬집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계층상승의 가장 일반적인 수단은 교육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와, 소득이 많은 직업을 구해 가난에서 벗어나고, 때론 부자도 되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통로는 ‘기회의 땅’ 미국이나, ‘교육열의 나라’ 한국 모두에서 점점 좁아지고 있다. 부모의 재력이 자녀의 교육 성취에 결정적 요소가 된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강남·서초·송파구 등 서울 강남3구 출신이 서울대 정시모집 신입생의 절반을 넘는 등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부자 동네 자녀들의 비중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부잣집 학생들은 비싼 학비 걱정 없이 스펙과 학점 취득에 전념해 취업에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학력은 소득과 비례한다. 통계청의 ‘2018 한국의 사회지표’를 보면 노동자 임금은 고졸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중졸 이하는 84.8%, 전문대졸은 113.2%, 대졸은 152.4%, 대학원졸은 243.3%이다. 중졸 이하와 대졸자 간의 임금 격차가 두 배다. 실제 저소득층의 상당수가 저학력자들이다. 서강대 산학협력단이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저소득층(소득 1분위) 가구의 구성과 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61.0%가 중졸 이하 학력자다. 대졸 이상의 비중은 14.8%에 불과하다. 1분위 저소득층 5명 중 3명이 중졸 이하의 저학력자라는 얘기다. 이는 전체 소득구간에서 대졸 이상이 42.0%로 가장 많고, 중졸 이하가 25.4%인 것과 대조된다. 학력이 경제적 계급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어느 부모가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데 목을 매지 않겠는가.
그래서 벌어지는 치열한 입시 경쟁을 정당화하는 것이 ‘기회의 평등’ 논리다. 100m 달리기 출발선처럼 어느 누구에게나 노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주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부의 불평등이 심화돼 있는 사회에서 이런 기회의 평등은 쉽게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자녀들에게 비싼 학원을 여러 개 다니게 할 돈이 없고, 먹고사는 데 바빠 아이들 공부나 스펙을 돌볼 여유가 없고, 무엇보다도 좋은 학원과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있는, 그래서 입시에 대한 고급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집값 비싼 동네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의 평등을 활용할 기회 자체가 없다. 결국 부모 세대 부의 불평등이 자녀들의 교육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부는 부대로, 가난은 가난대로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이 갖고 있는 허점을 보완할 ‘결과의 평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가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자녀들은 최대한 비슷한 조건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저소득층 자녀도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복지를 강화하는 것과 함께 제대로 된 공교육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공교육 강화는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완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교육 불평등이 부실한 공교육 체계로 인한 사교육의 과잉에서 촉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투자가 절실한 이유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국민 개개인뿐 아니라 나라 전체에도 도움이 된다. 좋은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적자본은 경제의 생산성을 높여 국민소득을 증대시킨다.
정부가 악화되는 대내외 경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과감하게 확장한 내년도 예산안을 내놓았다. 전체 예산이 올해보다 9.3% 증가했는데, 사회간접자본(SOC) 12.9%, 연구·개발(R&D) 17.3%, 산업 27.5% 등 경기악화에 대응할 분야들이 대폭 늘었다. 반면 12개 예산 분야 중 교육분야의 증가율은 2.6%로 가장 낮다. 교육은 SOC처럼 투자 효과가 당장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더 높은 소득과 삶의 질을 보장하며, 더 튼튼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