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은 어떻게 증폭되고 해소되는가

2020.03.09 21:11 입력 2020.03.09 21:13 수정

[장대익 칼럼]편견은 어떻게 증폭되고 해소되는가

1954년 여름, 사회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오클라호마에 있는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심신이 건강한 소년 22명(평균 12세)을 초대했다. 그는 아이들이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독수리팀과 방울뱀팀 중 한 팀에 ‘무작위로’ 배정했다. 첫 주에는 두 팀을 분리했고 각 팀 내에서 아이들이 협조하게끔 만들었다. 가령 각 팀원끼리 식사 준비를 하고 다이빙보드를 함께 만들게 했다. 그러자 팀 내부에 강한 응집력이 생겼다.

[장대익 칼럼]편견은 어떻게 증폭되고 해소되는가

둘째 주엔 두 팀 간의 경쟁을 조장했다. 줄다리기, 축구, 야구 경기를 시키고 이긴 팀에만 상품을 줬다. 더 심한 경쟁도 시켰다. 파티장에 먼저 도착하는 팀에만 맛있는 음식을 주는 식이었는데, 셰리프는 독수리팀이 훨씬 일찍 도착할 수밖에 없게끔 일정을 짰다. 늦게 도착한 방울뱀팀 아이들은 볼품없는 음식을 보고는 상대팀에 욕설을 퍼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독수리팀 아이들은 선착순으로 자신들이 이긴 거라며 대립했고 급기야 음식을 서로 집어 던지며 치고받고 싸웠다.

집단 간 갈등에 관한 고전적 연구로 익히 알려진 이 사례의 핵심은 집단을 만든 방식에 있다. 연구자는 각 팀의 구성원을 ‘임의로’ 배정했을 뿐인데도, 경쟁 상황에 돌입하자 상대 팀의 구성원을 욕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 정체감 이론을 제시한 헨리 타지펠의 실험은 더 충격적이다. 피험자에게 동전 던지기를 시키고 앞면, 뒷면에 따라 X, W 집단에 배치되게끔 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 집단을 치켜세우고 상대 집단을 폄훼하기 시작했다. 같은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이미 친구나 친척인 듯 행동했고 성격과 업무능력도 더 좋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그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줘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설마 그럴까 의심스럽다면, “근처에 사시는가 봐요. 자주 뵙네요”라는 식으로 우연을 가장해 사람을 포섭해온 집단을 떠올려보라. 잘 통했다!

동전 던지기로 편을 갈라도 이 정도인데 학연, 지연, 혈연은 어떻겠는가? 심지어 흡연자는 건물 밖에서 우연히 만난 또 다른 흡연자가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래, 인정하자. 우리는 이분법에 취약하다. 오죽하면 이 세상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자와 그러지 않는 자로 나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대 그들로 세상을 나누는 이런 본능은 크게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자기 집단에 대한 편애와 타 집단에 대한 편견이 그것이다. 사실 내집단(ingroup) 선호와 외집단(outgroup) 폄훼는 짝꿍처럼 함께 간다. 보이스카우트 사례처럼 집단 간 경쟁 상황이 발생하면, 즉 자기 집단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타 집단 사람들을 폄훼하고 비난한다. 외집단을 비난하는 이유는 그래야 내집단이 우월해지고 그 속의 자신이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존감은 대개 내집단에서 온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수준이 세계 최고라고 으쓱대는 국민은 외국을 외집단으로, 중국 봉쇄는 못하더니 일본에 봉쇄당했다며 비난하는 국민은 현 정부를 외집단으로 삼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누가 옳은가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왜 이 국가적 응급 상황에 온갖 편견들이 난무하고 있는지를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 초기 단계에서부터 무리를 지어 살아온 조상에게 내부자와 외부자의 구분은 매우 원초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부자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협력 파트너지만 외부자는 대개 경쟁자이거나 침략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부자와 외부자를 같은 태도로 선호했던 조상은 살아남지 못했던 반면, 내부자를 편애했던 조상은 살아남아 우리의 선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자원이 풍부하면 타 집단에 대한 편견은 잦아들지만 희소자원을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돌입하면 편견 본능이 증폭된다.

코로나19는 현재 명백히 집단 간 갈등의 유발 인자로 작동하고 있다. 품격의 옷 속에 깊숙이 숨었던 인종차별과 민족주의가 삐져나오고 있다. 통제를 무시한 중국인들이 우한에서 외국으로 탈출했으며, 그 와중에 이탈리아의 명품을 싹쓸이하다가 유럽을 전염시켰다고 근거 없이 비난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중국인처럼 생긴 이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거나 손가락질, 욕설, 구타까지 자행되고 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가장 우려할 만한 일은 이웃 국가에 대한 편견의 증폭이다. 지난주, 극우파에 끌려다니던 아베 총리는 일본 내 감염 증가와 도쿄 올림픽 회의론에 다급해진 나머지 한국에 대한 편견의 발톱을 바로 드러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우리 정부도 어제 비슷한 수위로 대응 조치를 감행했다. 긴밀한 국제적 협조로도 막기 힘든 것이 코로나19이지 않은가?

자국민이 위협을 받을 때 국가와 국민은 타국을 비난하면서까지 자존감을 지키고 안심할 수는 있다. 이것이 편견의 심리다. 하지만 이것은 편견에 대한 진실의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어떻게 편견을 극복하고 협력하는가에 대한 스토리다. 셰리프의 캠프 연구는 둘째 주에서 끝나지 않았다. 셋째 주에 그는 물탱크와 수도꼭지를 몰래 망가뜨려 두 팀이 모두 협력해서 고쳐야만 물 공급을 다시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바로 전주까지 서로 으르렁댔던 두 팀의 소년들은 어느새 친해졌고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췄다. ‘공동의 위협’이 두 집단 사이의 편견과 혐오 감정을 수그러지게 한 것이다.

코로나19는 대유행(팬데믹)으로 가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전 세계 공동의 위협이 또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인종주의, 민족주의, 정치적 양극화를 추동하는 온갖 편견들을 상대적으로 더 쉽게 날려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일 양국은 서로를 막을 것이 아니라 더 큰 틀에서 협조해야 한다. 그래야 승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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