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쪽샘’ 지구라는 곳이 있다. 황오동·황남동·인왕동 일대를 의미한다. 면적이 약 38만㎡에 이르는데 이곳에 쪽빛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샘이 있다고 해서 ‘쪽샘’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 사이 이곳에 주택 및 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고분 훼손이 심해지자 2002년부터 민가와 사유지를 매입하고 2007년부터 본격발굴하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는 이곳을 귀족무덤이라 판단한다. 지름 100m가 넘는 황남대총을 비롯한 왕릉급보다는 작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황남대총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조성되기 이전의 임금이 이곳에 묻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3~4세기에는 주로 덧널무덤(목곽묘)를 썼으니 그 시대 신라 임금들이 이와같은 무덤을 판다면 어땠을까.
■조각 2편에서 복원한 역사
201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쪽샘 L지구 분포조사에서 흥미로운 고분 한 기가 확인됐다.
바로 신라 고고학의 공백기라 할 수 있는 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덧널무덤(L17호)이었다. 무덤 구멍을 두 개 뚫은, 즉 주곽과 부곽을 각각 조성한 이른바 이혈주부곽식 무덤이었다. 게다가 주곽 묘광(墓壙)의 길이 8.5m, 너비 4.1m, 부곽 묘광 길이 2.7m(잔존), 너비 4.1m 규모의 무덤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경주지역 덧널무덤 중 가장 큰 것이다.
연구소팀의 관심이 쏟아졌다. 그러나 지난해(2019년) 본격 발굴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막상 조사해보니 고분의 3분의 2가 개발 혹은 도굴로 인해 훼손된채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토기들은 제법 완형인채로 발굴됐지만 나머지 유물의 절대 다수가 파편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지난 8월 수습된 유물들을 보존 및 복원처리하는 과정에서 깜짝 놀랄만한 조각 2점을 확인했다. 그것은 중국 서진(265~316)·동진(317~420)에서 제작된 최고급 명품인 허리띠 장식 조각이었다. 이 조각들은 17호분의 주곽 서쪽에서 출토된 것이다.
어창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자세히 보니 금동(金銅)으로 제작됐고, 용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됐다”고 밝혔다. 용의 머리는 없어졌지만, 몸통과 발, 꼬리 부분이 남아 있어 일부 문양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도영 경북대 강사는 “두께 0.8~1.0㎜의 동판을 뚫어 도금하고 끝이 삼각형 모양의 끌을 이용해서 문양을 리듬있게 연속적으로 새겨넣었다”고 전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제작된 금동제 허리띠는 고구려(지안 산성하·우산하)나 백제(몽촌토성 등), 가야(경남 김해 대성동)까지 수출된 최고급품”이라며 “그런 명품을 당대 가장 뒤떨어졌다는 신라가 직수입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라고 의미를 두었다.
또 하나 이번에 출토된 47점의 토기 중 ‘손잡이 화로형 그릇받침’과 ‘삿자리 무늬 짧은 목항아리’, ‘통형 굽다리 접시’ 등은 김해나 부산, 경남 함안 등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가야식 토기로 해석된다. 이 토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야 기술자가 신라에 와서 제작했거나, 혹은 가야에서 제작된 토기가 수출되었거나, 아니면 신라든 가야든 당대 토기 제작 방식이 원래 그랬거나 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재갈과, 안장의 목재를 고정하는 용도의 고정구, 나뭇잎 모양의 철기 등 다양한 형태의 말갖춤새(마구·馬具)가 확인됐다. 또 사람 머리에 쓰는 투구 및 갑옷 조각이 출토됐다.
■3분의2가 훼손되었지만…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사실 신라 고고학에서 4세기는 공백기로 꼽힌다. 1~3세기에는 경주 황성동·조양동·덕천리의 널무덤(목관묘)이, 5~6세기에는 황남대총·서봉총·천마총·금관총·금령총 등으로 대표되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 있는데, 유독 4세기 시대 고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4세기 중반까지도 신라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소국, 즉 사로국 단계였다는 설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그 시대는 대성동 고분군의 위용이 말해주듯 금관 가야의 위상이 신라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가 변변한 고분 하나 조성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다 돌무지덧널무덤을 쓰는 마립간의 시대를 맞이한 것일까. 하지만 ‘오해’일 가능성이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봉분이 크지 않게 조성한 덧널무덤의 특성상 장구한 세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거나, 혹은 주택 등을 짓느라 인위적으로 훼손시킨 사례가 많았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는 그야말로 ‘유물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한때 도굴범들 가운데는 아예 문화재가 존재할만한 주택이나 건물을 사들여 실내에서 발굴하는 방식으로 도굴한 자들도 있었다. 이번에 확인된 쪽샘 17호 목곽묘의 경우는 건물을 짓느라 훼손되었을 수도 있지만 유물을 말끔히 털어간 도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랬기에 가치가 더 나간다고 여기는 금동제 허리띠 등 공예품들이 사라지고, 조각만 떨어뜨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훼손 내지 도굴되지 않았다면 이 고분에는 엄청난 부장품이 쌓여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3.5×2.4㎝, 4.5×2.3㎝의 아주 작은 조각으로 공백으로 남았던 신라의 4세기를 복원해볼 수 있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그 시대 신라의 임금이 이미 중국의 최상위 제품을 직수입할만큼 교류가 활발했고, 당대 가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만큼 만만치않은 위상을 갖고있음을 보여주는 발굴성과”라고 의미를 두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이른바 사로국에서 신라국으로 전환되는 시기, 즉 신라 조기의 왕묘급이라 표현해도 좋을 만큼 무덤의 위상이 높다”고 해석한다. 이한상 교수도 “당대 최고급 명품을 수입한 무덤 주인공은 4세기 신라의 최고위층일 가능성이 짙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 쪽샘 L17호분은 4세기 신라의 임금인가. 물론 국가기관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해석은 조심스럽다. 다른 연구자들도 ‘그렇다’고 단정내리지는 못한다. 워낙 ‘사로국-신라’와 ‘신라-가야’ 논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발굴 유물을 두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기림 이사금, 흘해이사금?
그러나 만약 신라 임금이라면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시기로 추정되는 마립간 시대(356년~503년)보다 앞선 임금이 지목될 수 있다. 바로 4세기 초중반에 신라를 다스린 기림 이사금(재위 298~310)과 흘해 이사금(310~356) 등을 꼽을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기림 이사금이 307년(기림 이사금 10년) 국호를 다시 신라라 했다”고 기록했다. 신라는 초기에 서야벌, 사라, 사로, 신라로 일컬어졌다가 65년(탈해 이사금 9년) ‘계림’이라 고쳤고, 다시 307년 기림 이사금 때 ‘신라’로 바꾸었다. 또 “300년(기림 이사금 3년) 왜국과 강화를 맺었고. 낙랑과 대방 두나라가 항복해왔다”는 기록도 있다. 기림 이사금의 뒤를 이은 흘해 이사금은 47년간 재위하면서 346년(흘해 이사금 37년) 왜국의 침범을 격퇴시킨 성과를 얻기도 했다. 이 모두 <삼국사기> 기록이다.
아닌게 아니라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이미 1~2세기부터 소문국(185년·벌휴 이사금 2년)과 감문국(231년·조분 이사금 2년)을 정벌하고 포상 8국의 난 때 ‘가라’를 돕는 등(208년·나해 이사금 14년) 나름 활발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3세기 중국 서진 시대의 인물인 진수(233~297)가 편찬한 <삼국지>는 여전히 신라 아닌 사로국을 진한 12국 중 1국으로 묘사했다. 국내학계는 오히려 <삼국지>가 3세기 중반의 객관적인 시각에서 기술했다면서 <삼국사기>보다 더 신뢰하는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교통도 좋지않은 이역만리 중국 인사가 편찬한 책은 믿고, 고려 역사가인 김부식이 그때까지 남아있던 풍부한 삼국의 자료를 토대로 썼을 <삼국사기>를 불신할 수 있을까.
이번에 안타깝지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2점이나마 남은 허리띠 장식 조각으로 4세기 신라의 위상을 더듬어볼 수 있었다. 앞으로 20년 가까이 장기 발굴하는 쪽샘 발굴이니 역사의 공백을 풀어줄 더 완벽한 고분과 더 완벽한 유물이 등장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