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노동자들이 말하는 ‘내가 겪은 언어폭력’
반말은 기본, 툭하면 폭언
성희롱·성차별 비일비재
뒤통수 때리는 등 실제 폭행
“장시간 노동에 다들 예민”
프리랜서? 현장선 종속관계
노동자 인정하고 보호해야
“나이가 어리다고 보자마자 반말은 기본”(4년차, 분장팀), “‘지랄을 한다’ ‘이 파일 잘못되면 죽여버린다’ 등 말이 5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깊이 남아있다”(예능 조연출), “40대인 남자 선배에게 오빠라고 하지 않으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2년차, 연출부).
미디어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들은 폭언들이다. 경향신문은 3일 ‘내가 겪은 방송 현장 언어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입수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지난달 한 달간 제보받은 사례로, 미디어 노동자 23명이 참여했다. 또 15년차 프리랜서 PD와 연출부 2년 경력자 등 전·현직자 4명에게 그들이 경험한 방송제작 현장의 폭언·정서적 괴롭힘 실태도 들었다.
제작 현장 내 반말은 기본, 폭언과 괴롭힘은 일상이었다. 연출팀 3년 경력자인 A씨는 “기본적으로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반말하는 문화”라고 했다. “욕설, 폭언, 무시 등 기본적으로 듣고 있음”(7년차, 연출팀), “인격모독, 부모님 욕”(6년차, 데이터)의 사례도 있었다.
이름이나 직함 대신 ‘야’ ‘막내’ 등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았다. 3년차 미술감독인 B씨는 “촬영감독은 미술감독인 나를 ‘미술’이라고 소리치며 불렀다. 의견 또한 서로 나누는 게 아니라 허락을 해주는 식이었다”고 했다.
연출부 3년 경력의 C씨는 “‘막내’라는 단어를 쓰면서 ‘막내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 들었다”고 했다.
여성 스태프의 경우 성희롱과 성차별적 발언에 노출됐다. 한 드라마의 붐오퍼레이터(현장녹음 담당자)로 1년간 일한 20대 D씨는 50대인 그립(특수장비운용)팀장을 두고 “돈 많은 솔로인데 (사귀어보면) 어떠냐”는 선배들의 말을 들었다. 같은 팀 동료는 실수를 한 그에게 “군대를 안 다녀와서 이렇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15년차 드라마 프리랜서 PD인 E씨는 “살이 찌자 ‘너 흑인 몸매 돼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신체적 위협도 있었다. E씨는 영화 촬영장에서 한 PD가 던진 휴대전화에 맞을 뻔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전화기가 박살날 정도였다”며 “평소에도 ‘너 말 잘해서 마음에 든다’며 뒤통수를 때렸다”고 말했다. 연출부 경력 7년차인 F씨는 “단역 배우들이 연기를 못한다며 조감독이 이들을 화장실에서 폭행하는 것을 봤다”며 “배우들은 소문이 금방 나는 데다 기회가 더 간절해 문제제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참여자들은 빠듯한 제작 일정, 시청률로 성과가 결정되는 방송업계 특성이 작용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상파 방송국 정규직 PD인 G씨는 “정해진 시간 안에 방송을 내보내야 한다는 룰 아래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고 했다.
하루 20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 또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E씨는 “오래 일하고 수면시간이 적다보니 작은 실수에도 다들 예민해진다”고 했다.
방송제작 현장 내 괴롭힘은 심각한 수준이지만 보호책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대다수 미디어 노동자가 프리랜서인 탓에 근로기준법 테두리 안에 있는 직장내 괴롭힘 방지 규정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무늬만 프리랜서’일 뿐 실질적으로는 종속적 관계에 있는 이들 노동자들을 ‘근로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진재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은 “방송 현장에서의 근로계약서 작성을 의무화해 근로기준법 내 괴롭힘 관련 조항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방송만 나가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방송사와 제작사, 현장 노동자 모두의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