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의 거장 임성한·김순옥, 두 사람이 택한 다른 길

2021.02.28 17:40 입력 2021.02.28 23:15 수정

김순옥 작가가 집필한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즌2>와 임성한 작가가 쓴 TV조선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 포스터. SBS·TV조선 제공

김순옥 작가가 집필한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즌2>와 임성한 작가가 쓴 TV조선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 포스터. SBS·TV조선 제공

임성한과 김순옥, ‘막장 드라마’계의 두 거성이 마침내 맞붙었다. 시청률만 보면 승패는 명백하다. 지난 27일 시청률 24%(이하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자체 최고점을 찍은 SBS <펜트하우스 시즌2>(극본 김순옥, 연출 주동민) 4회는, 1시간 앞서 방송돼 시청률 8.2%를 기록한 TV조선 <결혼작사 이혼작곡>(극본 임성한, 연출 유정준·이승훈, 이하 <결사곡>) 12회를 가볍게 따돌렸다. 하지만 <결사곡>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다. 넷플릭스에 새 회차가 공개될 때마다 국내 시청 순위 상위권에 오르며 상승세를 이어가더니, 지난 26일 시즌2 제작을 확정했다.

이쯤 되면 승부는 중요치 않아 보인다. SF부터 괴수물까지 신선한 감각의 웰메이드 K드라마들이 세계적 주목을 받는 지금, 두 작가의 동시 흥행은 브라운관의 추억으로 저물 줄만 알았던 ‘막장’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플랫폼 다변화와 함께 찾아온 콘텐츠 춘추전국시대, 두 작가는 어떻게 지난 세기의 유물인 막장의 이름으로 눈 높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스타일도 가치관도 판이하지만,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무적의 흥행 코드만은 공유하는 두 작가의 막장 세계관을 들여다봤다.

김순옥의 <펜트하우스 시즌2>의 오윤희(유진)는 로건리(박은석)의 허접한 계획으로 살인 누명을 벗고 기적적인 의술로 망가진 성대까지 되살린다. 급기야 온 세상의 눈과 귀를 속이고 천서진(김소연)의 립싱크 가수가 돼 그에게 빼앗긴 모든 걸 되찾기 위한 복수의 서막을 올린다. SBS 제공

김순옥의 <펜트하우스 시즌2>의 오윤희(유진)는 로건리(박은석)의 허접한 계획으로 살인 누명을 벗고 기적적인 의술로 망가진 성대까지 되살린다. 급기야 온 세상의 눈과 귀를 속이고 천서진(김소연)의 립싱크 가수가 돼 그에게 빼앗긴 모든 걸 되찾기 위한 복수의 서막을 올린다. SBS 제공

■개연성? 없으면 어때

‘막장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인간은 원체 치졸하고 원초적이다. 개연성? 포기한다. 거추장스러운 품위와 체면, 사회 상규도 생략한다. 인간의 민낯을 드러내는 방법일 뿐이다.’

<결사곡>과 <펜트하우스>, 임성한과 김순옥이 공유하는 막장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 겸 드라마 평론가는 “개연성은 드라마의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다”라면서 “이른바 막장 드라마들은 여타 드라마에서 요구되던 개연성을 포기하는 대신 인간의 이중적인 면모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길을 택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다만 ‘길’을 내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김순옥이 폭주에 가까운 빠른 전개와 잦은 장면 생략, 비일상적인 사건의 나열로 개연성을 내버린다면, 임성한은 하도 치졸하고 천박해 현실에선 내비칠 수 없었던 속물적인 감정들에 일일이 해설을 붙이며 장광설을 푸는 식이다. 두 작가는 각각 ‘미친 듯이 빠르게’, ‘지겹도록 느리게’ 기존 드라마의 문법을 벗어나 각자의 ‘막장’을 완성한다.

<결혼작사 이혼작곡> 속 의붓 모자 사이인 김동미(김보연)와 신유신(이태곤)은 서로에게 연정을 품었거나 품은 적 있는 묘한 관계를 이어간다. 임성한은 극중 인물을 통해 “한국 막장 드라마가 떠오른다”고 말할 정도로 ‘막장’임을 인정한다. TV조선 캡처

<결혼작사 이혼작곡> 속 의붓 모자 사이인 김동미(김보연)와 신유신(이태곤)은 서로에게 연정을 품었거나 품은 적 있는 묘한 관계를 이어간다. 임성한은 극중 인물을 통해 “한국 막장 드라마가 떠오른다”고 말할 정도로 ‘막장’임을 인정한다. TV조선 캡처

예컨대 김순옥의 <펜트하우스 시즌2>. 오윤희(유진)는 로건리(박은석)의 허접한 계획으로 살인 누명을 벗고 기적적인 의술로 망가진 성대까지 되살린다. 급기야 온 세상의 눈과 귀를 속이고 천서진(김소연)의 립싱크 가수가 돼 그에게 빼앗긴 모든 걸 되찾기 위한 복수의 서막을 올린다. 현실에서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상관없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시청자들은 이제 막장 드라마의 개연성 포기를 SF 드라마의 타임슬립처럼 장르적 특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반면 임성한의 <결사곡>은 누구나 느끼지만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일상의 불편한 감정과 관계들을 지나치게 세밀하게 그려낸다. 의붓아들 신유신(이태곤)에게 흑심을 품은 김동미(김보연)가 유신의 아내 사피영(박주미)에게 유신이 좋아하는 닭볶음탕 레시피를 알려주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거나, 퇴직 의사이자 당뇨 환자인 남편 신기림(노주현)의 건강을 해치기 위해 탄수화물 식단을 이용하는 모습이 공들여 표현되는 식이다. 김동미와 신유신의 미묘한 관계를 두고, 임성한은 극중 인물인 아미(송지인)의 입을 빌려 “한국 막장 드라마가 떠오른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이 드라마가 상식에 맞지 않는 기묘하고 치졸한 인간의 모습에 집중한 ‘막장’임을 작가 스스로 인정한 셈인데, 이같은 문법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은 점차 ‘그러려니’ 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김순옥은 오윤희의 살인 누명부터 배로나(김현수)의 학교폭력까지 약자의 고난을 공들여 표현하며 인간 서열의 잔인함을 실컷 강조하다가, 곧바로 이들의 반격에 일그러지는 천서진과 주단태(엄기준)의 얼굴을 비추며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SBS 제공

김순옥은 오윤희의 살인 누명부터 배로나(김현수)의 학교폭력까지 약자의 고난을 공들여 표현하며 인간 서열의 잔인함을 실컷 강조하다가, 곧바로 이들의 반격에 일그러지는 천서진과 주단태(엄기준)의 얼굴을 비추며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SBS 제공

■원초적 욕망과 치졸한 본능

각기 다른 방법으로 개연성을 포기한 두 작가, 표현하고자 하는 민낯의 모습도 다르다. 김순옥의 경우 계급과 서열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인 욕망에 집중한다. <펜트하우스> 속 세계는 사회적 안전망이라고는 전무한 약육강식의 정글처럼 표현된다. 약자는 쉽게 수렁에 처박히고 강자는 당연히 승승장구한다. 물론 이후 폭발적으로 전개될 비현실적 사건들을 통해 약자와 강자의 자리를 뒤집는 카타르시스를 연출하기 위한 전제일 뿐이다. 김순옥은 오윤희의 살인 누명부터 배로나(김현수)의 학교폭력까지 약자의 고난을 공들여 표현하며 인간 서열의 잔인함을 실컷 강조하다가, 곧바로 이들의 반격에 일그러지는 천서진과 주단태(엄기준)의 얼굴을 비추며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결혼작사 이혼작곡> 중 대학교수인 박해륜(전노민)은 가족들에게 외도를 고백하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도 아니다”라며 ‘남자로서의 본능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TV조선 캡처.

<결혼작사 이혼작곡> 중 대학교수인 박해륜(전노민)은 가족들에게 외도를 고백하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도 아니다”라며 ‘남자로서의 본능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TV조선 캡처.

임성한이 주목하는 것은 보다 현실적이고 치졸한 본능들이다. <결사곡>의 세계는 남편의 외도를 막으려면 “여자들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20~50대들로 가득한, 현실보다 10~20년은 뒤떨어진 것 같은 보수적인 공간이다. 아내가 꾸미지 않아서, 다정하지 못해서 남편의 외도를 불렀다는 이 세계의 전제는 곧 “내가 예수나 석가가 아니”라 외도에 대한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는 남편들의 비겁한 변명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의사부터 변호사까지 그럴싸한 직업을 지닌 엘리트 남성들이 결국 아내 아닌 다른 여성을 향한 ‘본능’ 하나 참을 수 없는 인간임을, 그 허위의식과 이중성을 낱낱이 그려낸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막장의 인기는 여기서 피어난다.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막장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회피해온 인간의 민낯을 발견한다. 윤석진 교수는 “시청자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러나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는 ‘불편한 진실’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막장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다”면서도 “다만 개연성이 상실된 막장의 폭로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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