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군의 AK-47을 훨씬 능가하는 무기”

2021.03.17 00:00 입력 2021.03.17 08:35 수정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오래 전 ‘이날’]“북괴군의 AK-47을 훨씬 능가하는 무기”

■1971년 3월17일 “북괴군의 AK-47을 훨씬 능가하는 무기”
첫 국산전투기 KFX 시제기 출고가 한달 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언론에서는 곧잘 “소총 한자루도 못 만들던 한국이 첨단 전투기를 독자 기술로 개발했다”는 식의 의미부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소총 한 자루도 못 만들던 한국”이 소총을 만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5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 그에 관한 단서가 될 만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는 게재 시점 나흘 전인 13일 체결된 한·미 소총공장 건설계약 체결소식을 전하며 이 공장에서 생산하게 될 총에 관해 소개를 하고 있는데요 “가스작용에 의한 완전자동식이며 무게는 M1이나 아카보(북한판 AK-47) 소총보다 가벼운 6.31파운드, 최소 유효사거리 440m, 최대 유효사거리 2653m, 20발의 탄환을 장진하고 최대 발사속도는 1분간 750발이라는 놀라운 성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산악전, 게릴라전, 시가전에 다같이 쓸모있는 병기”라고 전합니다.

이 총은 바로 M-16, 더 정확히 말하자면 M-16A1입니다. 기사는 “우리 60만 국군의 기본 무기가 되고 있는 M-1소총은 현재 북괴가 가지고 있는 아카보 소총보다 성능이 떨어져 개인화기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 했던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M-16은 북괴군의 AK-47을 훨씬 능가하는 무기”라고 전합니다.

특히 “미국 측은 당초 부분품만을 들여다 국내에서 조립하는 ‘싱가포르 형’을 권유했으나 정부는 원자재만 도입해 100% 국내에서 생산할 것을 관철시켰다”며 특허료 또한 “미국이 10%선을 우겼으나 정부가 6.2%선으로 낮추는데 성공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사상 처음으로 현대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뜻이 크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기사는 이 소총 공장이 지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당시로부터 3년 전 발생한 ‘1.21 사태’라고 소개합니다. “적의 무장테러조가 서울의 심장부까지 침투, 국민을 경악케했던 이 사건이 터지자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를 받고 그해(1968년) 3월부터 소화기 공장 건설을 위한 한·미 합동연구위를 설치했다”며 “AR-18과 M-16을 놓고 검토한 결과 M-16이 더 이상적이라는 결론을 얻고 그해 7월부터 대미교섭에 들어갔다”고 전합니다.

1971년 3월17일자 경향신문

1971년 3월17일자 경향신문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베트남전이었습니다. 1964년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이에 1966년 당시 윈스럽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외무부 장관에서 보낸 일명 ‘브라운 각서’를 통해 16개항의 군사·경제 원조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엔 당시 최신 소총이었던 M-16에 대한 군사 원조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68년의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M-16 소총 생산공장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보게 됩니다.

특히 베트남에서 호된 경험을 한 미국은 1969년 “아시아 각국은 내란·침략의 위협에 스스로 대처해야 하고 미국은 직접적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닉슨독트린을 발표합니다. 이에 한국은 방위 산업 육성과 병기·탄약의 자급자족을 서둘러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실제로 기사가 게재되기 얼마 전인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한 데 이어 2사단까지 철수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당시 한국은 휴전선 방위를 직접 맡아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미국을 설득해 M-16 소총 생산공장에 대한 양해각서를 이때 체결하게 된 거죠.

공장은 그해 착공돼 이듬해 준공됐고, 1973년부터 양산 체제를 갖춥니다. 1972년 국방부 조병창이 창설돼 이 공장의 운영을 맡았고, 1974년부터 M-16 양산이 진행돼 1978년 무렵까지 60만정 이상이 생산돼 전군에 보급됩니다.

그러나 당시 국내 생산이 허락된 M-16은 60만정이었습니다. 노후화에 따른 추가 생산은 할 수 없었던만큼 독자적인 국산 총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1970년 8월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해 국산 총기 개발을 맡깁니다. 1977년 최초의 국산 총기인 K-1소총이 개발돼 1980년부터 생산이 시작됐으며, 1984년부터는 K-2소총이 군에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M-16을 국내 생산하며 쌓았던 노하우가 십분 활용됐습니다. 실제 K-2소총의 경우 가스직동식인 M-16과 달리 가스피스톤 방식이 채택됐지만 탄약·탄창은 물론 총의 아랫몸통까지도 M-16과 호환이 가능합니다.

M-16의 국내 생산과 국산 총기 개발을 주도했던 국방부 조병창과 ADD는 이후 한국의 방위산업을 주도합니다. 국방부 조병창은 1981년 민영화돼 현재 S&T모티브가 됐죠. 다산기공이라는 경쟁업체가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 군용 총기 시장을 독점했습니다. ADD는 천궁, 현궁 등의 국산 미사일은 물론 KAI(한국항공우주산업)와 함께 KFX를 탄생시켰고요.

“소총 한자루 못만들던 한국이 전투기까지 개발”하게 된 힘은 결국 소총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자라났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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