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한국 산업화 주역’ 정주영 별세 20년
20년 전 오늘(2001년 3월22일) 경향신문에는 <정주영씨 별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1년 3월21일 밤 10시 향년 86세로 별세했습니다. 현대그룹은 “정 전 회장이 평소 노환으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오다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 부전증으로 운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 전 회장은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인들은 그의 이같은 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습니다.
정 전 회장은 1915년 강원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5세 때 송전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마치고는 더 이상 정규 학교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농사일을 돕다가 16세 때 첫 가출을 감행합니다. 원산의 철도공사판에서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18세 때 그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또 가출을 했습니다. 이번엔 서울로 갔습니다.
쌀가게 배달원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한 정 전 회장은 쌀가게 주인을 거쳐 광복 후인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끊어진 한강인도교 복구 공사를 맡는 등 현대건설은 승승장구했고, 금세 국내 제1의 건설업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고리원자력발전소,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무너진 성수대교 재시공 등 굵직한 현장을 현대건설이 맡았습니다. 해외건설시장에 진출하고, 조선소를 만들었습니다. 1967년 설립한 현대자동차가 자동차 고유모델 ‘포니’를 개발해 수출하는 등 정 전 회장은 50여년간 국내 산업의 발전을 주도했습니다.
정 전 회장은 1992년 정치인으로 변신합니다. 그해 2월 창당한 통일국민당은 한달 만인 ‘3·24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31석을 획득해 원내 3당이 됐습니다. 정 전 회장은 77세의 고령으로 그해 5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아파트를 반값에 전국민에게 공급하겠다”, “재벌을 해체하겠다”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에 이어 득표 3위에 그치며 낙선했고, 다음해 2월 정계 은퇴했습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정 전 회장은 대북사업에 물꼬를 트며 남북화해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습니다. 그해 6월16일 85세의 정 전 회장은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북한으로 갑니다. 가기 직전 그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가출한 일을 회고하며 감격했습니다. “이제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갑니다.”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수십대에 실린 소들이 판문점 북측지역을 먼저 넘고, 정 회장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남북 분단 이후 민간인이 민간 차원의 합의를 거쳐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에 들어간 것은 정 전 회장이 처음이었습니다.
소떼 방북으로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11월18일 첫 금강산 관광객을 태운 현대금강호가 동해항에서 북한 장전항으로 가면서 금강산 관광사업이 개시됐고, 2000년 6월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그해 8월 현대아산이 북한과 개성공단 건설에 합의했습니다.
그가 생전에 쓴 자서전 제목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생애를 잘 드러냅니다.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데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자서전 중) 일을 추진할 때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면 “이봐, 해봤어?”라고 말하며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생각을 질타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