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2일 정주영 현대 회장 별세 20년

2021.03.22 00:05 입력 2021.03.22 00:13 수정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8년 6월16일 임진각 근처에 마련된 환송회장에서 ‘통일소’의 고삐를 잡고 실향민들과 현대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8년 6월16일 임진각 근처에 마련된 환송회장에서 ‘통일소’의 고삐를 잡고 실향민들과 현대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 산업화 주역’ 정주영 별세 20년

20년 전 오늘(2001년 3월22일) 경향신문에는 <정주영씨 별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1년 3월21일 밤 10시 향년 86세로 별세했습니다. 현대그룹은 “정 전 회장이 평소 노환으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오다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 부전증으로 운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 전 회장은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인들은 그의 이같은 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습니다.

정 전 회장은 1915년 강원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5세 때 송전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마치고는 더 이상 정규 학교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농사일을 돕다가 16세 때 첫 가출을 감행합니다. 원산의 철도공사판에서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18세 때 그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또 가출을 했습니다. 이번엔 서울로 갔습니다.

쌀가게 배달원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한 정 전 회장은 쌀가게 주인을 거쳐 광복 후인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끊어진 한강인도교 복구 공사를 맡는 등 현대건설은 승승장구했고, 금세 국내 제1의 건설업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고리원자력발전소,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무너진 성수대교 재시공 등 굵직한 현장을 현대건설이 맡았습니다. 해외건설시장에 진출하고, 조선소를 만들었습니다. 1967년 설립한 현대자동차가 자동차 고유모델 ‘포니’를 개발해 수출하는 등 정 전 회장은 50여년간 국내 산업의 발전을 주도했습니다.

2000년 6월28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다시 방북하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0년 6월28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다시 방북하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 전 회장은 1992년 정치인으로 변신합니다. 그해 2월 창당한 통일국민당은 한달 만인 ‘3·24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31석을 획득해 원내 3당이 됐습니다. 정 전 회장은 77세의 고령으로 그해 5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아파트를 반값에 전국민에게 공급하겠다”, “재벌을 해체하겠다”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에 이어 득표 3위에 그치며 낙선했고, 다음해 2월 정계 은퇴했습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정 전 회장은 대북사업에 물꼬를 트며 남북화해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습니다. 그해 6월16일 85세의 정 전 회장은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북한으로 갑니다. 가기 직전 그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가출한 일을 회고하며 감격했습니다. “이제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갑니다.”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수십대에 실린 소들이 판문점 북측지역을 먼저 넘고, 정 회장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남북 분단 이후 민간인이 민간 차원의 합의를 거쳐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에 들어간 것은 정 전 회장이 처음이었습니다.

[오래 전 ‘이날’] 3월22일 정주영 현대 회장 별세 20년

소떼 방북으로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11월18일 첫 금강산 관광객을 태운 현대금강호가 동해항에서 북한 장전항으로 가면서 금강산 관광사업이 개시됐고, 2000년 6월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그해 8월 현대아산이 북한과 개성공단 건설에 합의했습니다.

그가 생전에 쓴 자서전 제목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생애를 잘 드러냅니다.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데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자서전 중) 일을 추진할 때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면 “이봐, 해봤어?”라고 말하며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생각을 질타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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