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1년 3월24일 영화의 ‘삼진그룹’은 실제로 어느 기업이었을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지난해 10월 극장 개봉한 이 영화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삼진그룹’이라는 회사의 여직원들이 페놀 유출 사건의 흑막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의 조직 내 성차별적 문화를 잘 보여줬고,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여성들의 서사로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개봉 당시 코로나19 펜데믹 상황이었음에도 개봉 한달 여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했습니다.
이 영화 얘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3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 소개돼 있기 때문입니다. “페놀 검출하고도 은폐”라는 제목의 기사는 “대구지방환경청이 수돗물 악취사태 이후 낙동강 강물의 페놀 성분을 검사한 결과 지난 19일 경북 고령 지점에서 페놀이 음용수 기준치를 무려 22배나 초과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즉시 발표치 않아 시민들의 불안을 가중시킨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대구지검 특수부가 “대구지방환경청 직원 7명을 구속하고 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사는 당시로부터 열흘 전인 그해 3월 14일 발생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의 후속 조치에 관한 기사 중 하나인데요. 당시 경북 구미에 위치한 두산전자 공장에서 페놀 원액 저장 탱크의 파이프가 파열돼, 다음날 오전 2시간 동안 페놀 원액 30t이 낙동강 유역 하천에 유입됐습니다. 이 페놀은 당시 42만 가구가 식수로 사용하는 상수원인 다수취수장으로 흘러들갑니다.
당시 수돗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대구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취수장 측에서는 악취를 없애려고 다량의 염소를 투입했는데요. 이게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습니다. 페놀과 염소가 결합하면서 한층 독성이 강한 클로로페놀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돗물을 마신 대구 시민들은 극심한 두통과 구토 피부질환을 앓게 됩니다. 강물에 흘러들어간 페놀은 유역의 과수원과 농지도 오염시켰고, 작물은 물론 이를 먹은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2차 피해를 유발했습니다. 결국 대구 환경처 직원 7명과 두산전자 직원 6명 등 13명이 구속되고 환경처 장관까지 경질됐습니다. 또 당시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이 사건의 배후는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해외 자본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에 대한 낙후된 인식을 가지고 있던 그룹의 오너와 경영진들이었습니다. 당시 검찰 조사 결과 공장 측은 페놀 유출 사고 이전에도 5개월 여에 걸쳐 페놀 폐수 325t을 무단 방류해왔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시 검찰의 1심 논고문에 따르면 “지하 피트(PIT)안의 폐수를 집수하는 과정에서 탱크가 넘쳐흐르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 매일 1t가량의 폐수를 방류함”, “폐수가 흘러나간 흔적을 가리기 위해 철판뚜껑 덮어 놓는 등 세심한 보안활동을 함”, “지하집수탱크 밑에는 밸브가 설치돼 있어 폐수가 밸브를 통해 배출구로 흘러나가도록 되어있다”, “작업반장이 생산부 차장에게 5~6회에 걸쳐 폐수유출 사실을 보고했고 공장장에게도 사실을 보고했으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아니함” 등의 내용이 적시됐습니다. 이유는 폐수 처리 비용 500여만원을 아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사건의 결말 역시 외국 자본으로부터 회사를 지키게 되는 영화의 결말과 달랐습니다. 당시 두산에 대한 시민들의 대대적인 불매 운동이 벌어지면서 두산은 오히려 수십년 간의 주력 사업이었던 먹거리·소비재 사업들을 대거 매각해야 했습니다. 당시까지 부동의 1위였던 두산의 ‘OB 맥주’가 해외 자본에 매각된 것도 이 사건이 계기였습니다. 이후 두산그룹은 중공업 위주로 사업이 재편되죠.
또한 실제 사건의 전모를 밝힌 이들 역시 영화의 내용과는 다릅니다. 언론사와 관계기관 등에 수많은 제보를 한 이들은 ‘내부 여직원들’이 아닌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보들을 바탕으로 당시 KBS 대구지국 기자 등이 특종 보도를 터뜨리면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실제 영화에서 사건 해결을 주도하는 주인공 ‘이자영’의 캐릭터는 두산전자 직원이 아닌 파리바케뜨 제빵 기사 노조를 만든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 임종린 지회장이 모델이라고 합니다.
일각에선 영화 후반부의 적대적 M&A 시도와 이를 막아내는 여직원들의 이야기가 ‘론스타게이트’를 참고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옵니다. 또 영화에서 여직원들에게 토익 점수를 요구하는 부분은 1982년 국내 최초로 토익 특별 시험을 도입한 삼성이, 그걸 조건으로 여직원들의 정직원 전환을 내거는 부분은 1985년 최초의 대졸 여성 정직원 공채를 실시한 대우가 모티브가 됐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두산과 SPC(파리바게뜨 브랜드의 모기업), 삼성, 대우 그리고 ‘론스타 게이트’에서 먹잇감이 된 회사들, 이 중 진짜 삼진그룹은 어디였을까요? 아마도 환경 문제에서부터 비정규직 문제에까지 둔감했었던, 그리고 여성들에 대해 복장에서부터 학력, 직무, 직급, 대우에 이르기까지 남성들과 차별을 두었던, 그럼에도 묵묵히 자기 직분에 충실했던 수많은 여직원들이 있었던 한국의 모든 기업들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