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아, 내 아들, 그 4월이 또 왔다

2021.04.02 00:00 입력 2021.04.08 16:34 수정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61년 4월2일 ‘되살아난 4월의 꽃’

4·19 최연소 희생자 전한승군의 묘역. 국립4·19민주묘지 제공

4·19 최연소 희생자 전한승군의 묘역. 국립4·19민주묘지 제공

“그 4월이 무엇 하러 또 오느냐.”

최인훈의 소설 <구운몽>에서 한 간호사가 주인공 독고민의 시체 앞에서 읊조리는 대사입니다. 그는 얼어 죽은 독고민을 내려다보며 4월에 잃은 아들을 생각합니다. 어머니와 “찍소리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라던 아들은 1960년 4·19 혁명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내 것아. 내 귀중하던 망나니. 다시는 이 가슴에 돌아오지 않을 내 것아…”

4·19 혁명은 이승만 독재정부를 끌어내렸지만 많은 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186명. 그 중에는 어린이도 있었습니다. 6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는 혁명 때 어린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옥동자를 낳았다는 소식이 실렸습니다.

1961년 4월2일 경향신문

1961년 4월2일 경향신문

세상을 떠난 아이의 이름은 전한승군. 1948년 태어나 혁명 당시엔 서울 강북구 수송국민학교 6학년이었습니다. 전군은 시위대를 응원하다가 경찰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전군은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전군은 4·19 혁명 최연소 사망자입니다.

4·19 혁명 때는 전군처럼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희생자 186명 가운데 고등학생이 36명, 초등~중학생이 19명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대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반공정책의 일환으로 학교에서 민주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가르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특히 어느 정도 ‘어른 대접’을 받던 고등학생들은 시위를 전면에서 이끌기도 했습니다.

엄혹한 시절은 초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전군이 세상을 떠난 1주일 뒤, 전군의 모교인 수송국민학교 학생 100여명이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이던 강명희양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왜 총에 맞았나요/도둑질을 했나요/강도질을 했나요…(중략)…학교에서 파하는 길에/총알은 날아오고/피는 길을 덮는데/외로이 남은 책가방/무겁기도 하더군요…(중략)…오빠와 언니들이/배우다 남은 학교에/배우다 남은 책상에서/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뒤를 따르렵니다.”

시위에 나선 수송국민학생들. 3.15의거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시위에 나선 수송국민학생들. 3.15의거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4·19 혁명으로 정권이 무너졌지만 어린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까요. 전군의 어머니는 “한승이가 살아 오는 꿈을 꾼 뒤 매일 밤 12시에 기도를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보배 같은 옥동자”를 낳은 기쁨과 전군의 죽음이 남긴 슬픔 사이에서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전군의 가족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못해 집을 내놓은 상태였습니다. 장면 당시 국무총리의 부인과 단국대학교 설립자인 장형 선생이 선물을 전해줬다고 합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4월도 참 잔인한 것 같습니다. 제주 4·3과 4·19 혁명, 그리고 4·16 세월호 참사까지…. 움트는 봄을 바라보며 달력을 원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멀리 떨어진 미얀마의 4월도 따사롭지 못합니다. 두 달째 계속되는 군부의 유혈진압에 사망자가 500명이 넘었고, 그 가운데 어린이만 30여명이라고 미얀마 현지 언론은 전했습니다. 4월은 무엇 하러 또 왔을까요. 이 잔인한 날들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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